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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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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7.4.2 춘천 성암감리교회 |
텅 빈 무덤’의 기독교
막16:1-8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성서상의 의미하나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무덤에 관한 것입니다.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무덤에 예수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전한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이것은 '주의 부활'을 묘사하는 구절 속에 들어 있는데, 이 부활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버전을 전하는 바울은 그이가 살아나서 누구누구에게 '나타났는지'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고전15:4~6), 그로부터 거의 20년 정도 지난 문서로 보이는 <마가복음>은 부활의 첫 증언을 '텅 빈 무덤'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가복음은 ‘무덤이 비어 있다’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자에게 혹은 마가공동체에게 이게 뭘 의미 하는가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가공동체에게 텅 빈 무덤은 '죽음의 종교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즉 '죽음의 의례가 이제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죽음의 종교의 종식'이라는 테제는 '예루살렘 성전 종교의 종식'의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죽음의 제의, 곧 희생 제의를 초석으로 하여 형성된 종교 제도이죠. 애초에 예루살렘 성전의 터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기 위해 올라갔던 모리아 산의 제단, 바로 그곳이었다는 신화적 기억을 유대주의 전통은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 유다국 계보의 역사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희생 제사 터를 수백 년 후 솔로몬이 재건축하여 성전을 지었다고 합니다(역대기하 3:1). 이렇게 예수의 '텅 빈 무덤'에 대한 마가공동체의 이해는 솔로몬의 성전, 나아가 아브라함의 희생 제의의 함의와 연계시키고, 그것이 죽음의 의례였다는 것이고 그것을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 종교 대혁신의 의제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는 <마가복음>의 구성에서 꽤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은 두 개의 대립적 장소를 문맥 구성의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 1:1부터 9:31까지는 갈릴리라는 장소가 핵심적 고리를 이루고 있다면, 9:32~16:8은 예루살렘이 핵심적 키워드입니다(마지막 부분인 16:9~20은 원래의 <마가복음>에는 없던 후대의 첨가 부분이다.) 한데 이 둘은 서로 대립적입니다. 전자가 예수 운동의 상승 국면을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하강 국면을 말합니다. 또 전자는 모이고 나누고 즐기는 것에 관한 얘기가 중심 골격을 이룬다면, 후자는 증오, 배신, 파괴의 기조를 지닙니다. 하여 전자가 살림의 장소라면, 후자는 죽임의 장소입니다.
<마가복음>은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를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텍스트가 저작된 서기 70년 어간에 존립했던 한 예수계 공동체의 주장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인들이 대대적인 반로마 항쟁을 벌이던 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사라져 버리는 등, 참혹한 패배와 파괴의 시대였습니다. 네로의 실각 이후 극심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로마 황제로 등극한 최대 군벌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이 반란 진압의 전권을 주었는데, 티투스는 이 작은 땅을 무려 14개 군단 병력으로 유린했고, 특히 예루살렘은 6개월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마가복음>이 마치 예수의 예언처럼 언급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 전쟁의 처참한 파괴의 양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거죠.
이 역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마가복음> 공동체 혹은 저자에게 예루살렘은 죽음의 저주가 뒤덮인 장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저주가 이곳에 내린 것일까요? 전후 유대주의 복원 과정에서 중심 세력이 된 랍비적 바리새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불경이 그 이유라고 해석했습니다. 해서 거의 700년 후 <탈무드>로 완성된, 율법에 대한 주석과 해석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반면 <마가복음> 공동체 혹은 저자는 그 도시가 예수를 증오하고 배신하며 살해한 장소였기 때문에 저주의 장소가 되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여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주의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첫 목격자들이 본 것은 부활한 그이가 아니라 '텅 빈 무덤'이었다는 새로운 해석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좀 더 부연하면, 예수의 시신도, 부활한 그이도 없는 그곳엔, 마치 천사를 연상시키는, '흰 옷 입은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이가 그 첫 목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이는 이곳엔 없고,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 계시다.'
이들 첫 목격자들은 모두 갈릴리부터 예수와 함께했던 '여자 제자들'이었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와 갈등을 일으켰고, 배신했거나 도망쳤습니다. 반면 이들 여자들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고, 살림의 장소인 갈릴리로 가서 예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 사후의 예수 운동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남자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를 위시한 몇몇 주요 인물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예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이를 '예루살렘계 예수 운동'이라고 하자). 하여 <누가복음>은, 비록 <마가복음>이 대본이었음에도 이 복음서와는 달리, 부활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곧 <누가복음>은 예루살렘계 예수 운동의 계보와 친화적인 집단에 의한 기록입니다. 한데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결국 예수를 죽이는 일에 동조한 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예수 공동체에 대한 명백한 반감을 전제로 하는 것이죠. 요컨대 <마가복음>은 반예루살렘계 예수 운동의 계보에서 예수를 묘사하는 겁니다.
‘텅 빈 무덤’이란 죽임의 종교의 종식, 곧 예루살렘적 장소성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해체되어야 할 장소성에 얽힌 종교 세력은 성전 권력만이 아니라, 성전 체제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유보한 채 존속하고 있던 예루살렘계 예수 운동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시사적인데, 오늘날 주류 교회들은 서로 이 예루살렘 예수 공동체, 특히 그 주요 지도자였던 베드로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한데 <마가복음>은 아주 일찍부터 형성된 예수 운동의 주류에서 비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초기부터 주류 예수 운동 계열에서 기억이 제거된 여성 제자들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처음 주장했던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에 기초하여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얼마 안 가 '죽음의 의례와 상징'으로 가득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의례와 상징 곳곳에 스며 있는 희생양 제의의 기억은 실제로 역사 속의 잔인한 폭력으로 구체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제국 종교의 위상을 갖게 된 지 얼마 안 된 4세기 말(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에 벌써 그리스도교는 '적'에 대한 가차 없는 살육을 소리 높여 신학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종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적'은 물론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례와 상징은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폭력으로 구현되는 겁니다. 사실 그렇게 구현되었습니다.
지난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잔혹한 폭력성은 '희생 제의의 해체'를 강변한 복음서를 잘못 이해했거나 오용한 '잘못된' 그리스도교의 산물입니다. 여기서 '잘못된' 그리스도교란 콘스탄티누스적 그리스도교를 의미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4세기 초 로마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공인하고 나아가 제국 종교로 이용하면서 새롭게 제도화된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그리스도교의 원류입니다. 그 이후 교회들이 그 잘못된 제도의 계보를 따름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잔혹성은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아주 초기에 벌써 그 맹아가 자리 잡았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이 저술된 지 불과 20~30년 이후인 서기 1세기 말의 문서 <요한복음>에 이르면 악의 표상인 '사탄'은 다름 아닌 '유대인'으로 묘사되고 있었던 보면 말입니다. 이것은 훗날 유대인에 대한 범주적 증오와 적대의 성서적 근거가 되었고, 결국 '텅 빈 무덤'의 신앙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 종교, 곧 죽음의 종교로 회귀하고 말았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기독교는 ‘텅 빈 무덤’의 기독교신앙을 유지 보전했어야 하지만 다시 예루살렘 종교로 회귀해서 현대적 의미의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과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 증오와 공격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몇 년 사이에 벌어진 미국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벌인 아프칸이나 시리아와 같은 이슬람권에서 행한 살인행위입니다. 근년에는 아이에스(이슬람국가주의)가 10만 명가량 살해되는 폭력이 기독교에서 의해서 자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잘못 괸 기독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마가복음의 길,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의 길을 기독교가 갔더라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성암교회는 예루살렘 기독교냐 아니면 갈릴리 기독교냐? 성암교회 성도들은 마가복음의 정신에 기독교신앙의 뿌리를 두었느냐 아니면 누가복음 의례에 믿음의 근거를 삼느냐?
우리는 ‘텅 빈 무덤’의 신학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나는 예수를 따라 사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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