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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고 믿음 ≠ 예수를 믿음

갈라디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5 추천 수 0 2017.12.23 21: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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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3:23-2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5.24 춘천 성암감리교회 

예수 그리고 믿음 ≠ 예수를 믿음

갈3:23-27

                         

우리가 양심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런데 양심이란 것이 개개인마다에 있는 부속품(Organ)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오르간’은 없습니다. ‘양심’이라는 말은 희랍말로는 ‘syneidesis’입니다. ‘syn’즉, ‘더불어’란 뜻을 가진 말에 ‘안다’는 의미의 ‘eidesis’를 덧붙인 것입니다. 영어로는 ‘더불어’란 뜻의 ‘con’에 ‘science’를 붙인 것이며, 독일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양심은 ‘더불어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개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성립되는 집단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홀로는 양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집단적인 눈’, ‘양심’이 없으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한 개인이라면 아니,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도 개인 개인이라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개인인 경우에는 그의 사건들을 우리가 우리의 일로 실감할 수 없으므로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적인 눈으로 성서를 읽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제가 ‘집단적인 눈’이라 할 때 ‘집단적’이란 말은 ‘전체적인 눈’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으로, 어떤 문제를 당하고 있거나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보는 눈입니다.

 

자, 이제 이걸 바탕으로 ‘믿음으로’혹은 ‘믿음으로만’이라는 이야길 해 보겠습니다. 요즘 기독교 신앙에서 이 말들은 마치 만능열쇠같이 쓰여 집니다. ‘믿음’만 있으면 모든 사건과 신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으로만’이라는 말, 저는 이 ‘믿음으로만’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믿음을 강조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이란 말을 한 가지 의미로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바울의 다양한 믿음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 시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믿음’혹은 ‘믿음으로만’은 종교 개혁 이후, 루터 이후의 신앙방식입니다.

 

1.바울이 말한 믿음의 의미 중에 ‘믿음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3~26에서 믿음 자체가 온다고 말합니다.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면 믿음 자체가 하나의 계시(실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에게도 이 계시, 믿음이 온 겁니다. 믿음이 왔다는 이야기는 뭘까요? 율법이 가고 믿음이 왔다는 말이고, 이는 새 시대(율법의 시대가 가고 믿음의 시대)가 왔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 자체가 주격이 되어 그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다’는 것은 ‘율법이 온다’는 것과 대치가 되는 말입니다. 율법을 준 시대는 지나가고 믿음이 주어진 시대가 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목적격이 없습니다. 무엇, 누구를 믿는다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 자체가 삶의 존재 양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도래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뭐가 이 시대에 왔나요? 돈이 왔죠? 그러면 돈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돈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서 ‘믿는다’는 말은 반드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2.또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라는 표현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라’ 그 말입니다. 이것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왔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한다는 걸 믿는 믿음’,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걸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예수 안에 있으라는 겁니다. ‘ 갈라디아서 3:26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과 그리스도는 별개가 되죠?

 

3.또 바울이 믿음을 표현할 때 ‘미래를 믿는다’는 뜻으로 쓰기도 합니다. 이는 로마서4:3,갈3:6~7에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믿는 거, 그게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4.또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을 믿는다’는 목적격의 표현이 있습니다. 이건 보통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엄마를 믿는다’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5.마지막으로 우리 신앙과 관련지어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믿는 것, 즉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다섯 번째 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도 상관없고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 있는 거죠. 물론 믿음을 가지면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만’이라고 하면, 즉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에서 믿음만이라고 한다면 성서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묵살이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닮는 노력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노력도 쏙 빼고 편안하게 믿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고난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에서 바울은 ‘나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명하는 것, 원하는 뜻을 행하는 것, 즉 이 두 요소는 모두 행동입니다. ‘믿음으로만’이 이상하게도 행동에서 나를 쏙 빼고도 내가 편안히 크리스챤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무서운 함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여러 관점에서 믿음을 이야기 했으나 루터는 하나만 집중시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으라, 믿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의 열쇠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 없이도 크리스챤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로마 교회가 성령 운동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하고 있을 때, 소위 성령을 받은 그룹을 이끌고 있었던 토마스 뭔쩌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 그는 대단히 환영하며 동의하고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루터를 비판한 것이 있습니다. 루터는 ‘그저 믿기만 하면 은총으로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달콤한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고 쓴 예수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달콤한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고 명령하고, 너를 극복하고,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한 것은 싫어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따른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믿음이 강조되지도 작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 거기에는 현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중요한 것은 소위 업적에 의해서 형성된 기존 체제 질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민족의 경계도 없어지고, 사회 계급도 남녀 계층도 깨어집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민족과 종과 상전과 남자 여자가 따로 없으며 공로 있는 자 없는 자의 자리, 약한 자는 밑바닥에 있고 강한 자는 위에 있는 그런 것들도 모두 없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이란 대단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은 보지 않고 믿음을 세상을 등지고 안주하는 장으로 보았으므로 이것이 우리에게 크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먼저 세계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한 첫 걸음으로 이 ‘믿음으로만’이라는 데서 해방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의 말씀의 중심입니다. 문제가 많은 이 시대입니다. 이걸 극복하는데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은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먹어도 이것만은 먹지 말라는 겁니다. 누구는 그것을 성(性)이라 하고, 누구는 지혜(지식)이라 하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공(公public interest)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주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공은 사유화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원인이 아담에게 있었고 해결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인류의 비극은 모든 사람의 물건을 사유화하려는 것으로써 타락과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땅은 공적인 것이지 사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싸워 카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카인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사유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벨탑도 하느님을 사유화하고 독점하려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것을 파괴해버립니다. 이렇게 사유화한 그 안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종과 그를 섬기는 자로 계속 분화되어 갑니다.

 

의(義)라는 것도 원래 공(公 public interest)입니다. 이것마저도 사유화한 것이 종교 권력입니다. 살후1:6에 ‘하느님이 공의(公義)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정의란 하느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사유화해서 하나님 이데올로기를 만들거나, 자기의 사유의 거점으로 삼아버린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공은 사유화하면 그 순간에 타락하여 썩기 시작합니다. 권력이란 것을 사유화한 것이 독재자들입니다. 공을 깬 자들이죠.

 

땅도 공이요, 하늘도 공이요, 바다도 공이요, 의도 공이고, 혹은 지혜도 공입니다. 죽음도 공적인 것입니다. 죽음은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고 공적인 사건입니다. 요즘은 지혜도 정보라는 것으로 차단하고 사유화하여 하나의 힘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유화를 통해 가공할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세계를 망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의 문제도 바로 이 공을 사유화한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유화하면 안 되는 것을 사유화하는 데서 죄(罪)가 시작됩니다. 죄는 공을 사유화하는 것입니다.

 

공을 공으로 되돌리는 것이 인류가 할 일이고, 기독교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며 성서의 목표도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4:18에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기쁜 소식을 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가난한 사람들은 빼앗긴 사람, 추방된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무엇이겠습니까? 공을 공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포로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 눈먼 자를 눈뜨게 하는 것, 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 주의 은총의 날을 선포하는 것은 원래의 상태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잘못된 것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체적 행위를 보면 모두 사유화된 것을 공으로 돌리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Praxis)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마저도 사유화된 것을 공으로 돌리는 최후의 결단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주의 죽음을 기념해서 그의 살을 기념해서 떡을 먹고 피를 기념해서 술을 마시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애찬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란해지자 바울이 그것을 의식화(Sacrament)하였습니다. 성찬은 더불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점점 형식화시켜 버렸습니다. 작은 떡 하나를 먹고 나누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복음서 기자는 너무 형식화되고 종교 예식으로 성찬이 남은 것을 비판해서 최후 만찬의 장면을 그의 복음서에서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현장인 6장에서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저항입니다. 우리의 나눔이란 것이 그렇게 형식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인 것을 왜 사유화하려 합니까?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공입니다.

 

공(公public interest)은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공을 사유한 데서 오는 모든 죄를 청산하기 위해 온 이가 예수입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을 공으로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경제·사회의 일체의 기존적인 것을 끝내버리자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종말적인 것입니다. 참 의미의 크리스챤은 언제나 종말적인 것을 가집니다. 종말적인 생각이란 것은 지금 나를 보장하고 있는 일체의 것을 버리고 공(公)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을 공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믿고(이것을 믿고),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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