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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가시

고린도후 김중곤 목사............... 조회 수 568 추천 수 0 2018.01.04 15: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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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12:7-10 
설교자 : 김중곤 목사 
참고 : 들풀쉼터교회 

성경 : 고후12:7-10

제목 : 가시

찬송 : 315(512), 339(365), 455(507)


고후12:7-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열다섯 살에 최초의 실용적인 점자를 발명한‘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는 프랑스 파리에서 동쪽으로 58 km 떨어진 쿠브레(Coupvray)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시몽 브라유는 말에 장착하는 안장, 재갈 등의 말 장신구를 만드는 마구장 이였는데, 브라유는 3살 때 아버지의 마구 작업실에서 송곳을 가지고 놀다가 왼쪽 눈이 찔리는 사고를 당해 실명하였고, 4살 때는 오른쪽 눈마저 감염으로 실명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색도 형체도, 찬란한 정오의 햇빛과 한밤의 신비한 별빛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어둠, 오로지 어둠뿐이었습니다.


국립맹아학교에 다니던 브라유는 1821년 어느 날, 학교를 방문한 육군 포병 장교인‘샤를 바르비에’(Charles Barbier)로부터 이상한 종이 한 장을 건네받았는데, 그 종이는 밤중에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요철로 암호를 볼록하게 새겨 놓아 빛이 없어도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종이를 접한 순간 브라유의 굳게 닫힌 눈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 바로 이거야, 문자를 기호화하는 거야. A는 동그라미 하나, B는 동그라미 두 개, ···. 이런 식으로 우리도 암호를 만들면 돼. 이제 우리 맹인들도 읽고 쓸 수 있게 될 거야.’


브라유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그 송곳을 이용하여, 3년간의 노력 끝에 1824년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정렬된 여섯 개의 볼록한 점을 가지고 알파벳 26글자를 모두 표시하는 새로운 점자체계를 창안했습니다. 그리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쉽게 읽는 것뿐만 아니라 쓸 수도 있는 점자를 완성하였습니다.


1852년 43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그의 점자 방식은 맹인 사회의 폐쇄성과 사회의 무관심으로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졌습니다. 1932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브라유의 점자는 국제회의에서 표준으로 합의되어 암흑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줄기 빛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 후인 1952년 프랑스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의 유해를 파리의‘팡테옹’굴립묘지에 옮겨 안장하였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그 송곳으로 모든 시각장애인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송곳이 우리 눈을 멀게 할 때, 우리 중에 누군가는 '왜 이런 고통이 하필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하고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 눈을 상하게 한 이 송곳을 도대체 어떻게 사용할까?’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송곳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를 아프게 찌르고 상처가 나게 하는 송곳은 반드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송곳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순전히 우리‘자신의 몫’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송곳과 같은 가시가 나옵니다.


바울사도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이 가시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신 사탄의 사자라고 말합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세 번이나 이 가시를 떠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응답은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강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면 그 건강 때문에 자만에 빠지게 됩니다. 부유하면 그 부요함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되고, 우리가 명예와 권세를 갖게 되면, 불통이 되고 백성을 우습게보다가 돌이킬 수 없는 자기 덫에 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이 약하면 얼마나 건강에 조심합니까? 가난해 보십시오. 잘살아보려고 허튼 짓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세가 없으니 교만하지 않고 자기 덫에 빠질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약한 것들을 자랑하고,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을 기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가장 약해보이는 것이 어떤 때는 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촛불이 약하고 강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둘이 되고, 모이고 모여서 수십 수백만이 될 때 아무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내는 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못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작은 불은 쉽게 끌 수 있지만, 큰 불은 끄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것을 태워버린 후에야 불이 꺼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를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작은 불씨라고 우습게보고 조심하지 않으면 모두를 태우고 돌이킬 수 없는 폐허와 패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요8:1-11절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에오시고, 그들을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는 송곳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예수님께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시험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지를 쓰시고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라는 것이, 그리고 죄에 대한 극단적인 처벌이 송곳과 같은 율법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송곳이 아닌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참 많이 마음이 무겁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작은 짐이라도 질 수 있는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할 때,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는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 용서할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아마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욕심꾸러기 이고, 내 속에는 세상의 모든 죄가 살아 꿈틀거리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 중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악한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빚을 진 사람은 어떻게든 진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진 큰 빚은 갚지 않고, 형제와 자매가 자기에게 진, 작은 빚을 갚지 않는다고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마18:24-35절에 만 달란트 빚 진 종을 주인이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간구하여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며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와 자매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나누어 지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할 수 있는 것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 용서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해주는 것이 무슨 사랑이고, 용서고, 이해해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믿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들풀쉼터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 용서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게 될 때에 어떤 송곳이나 가시도 우리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찌르던 송곳이 우리를 더 강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들풀쉼터교회 성도님들은 사랑과 용서, 이해와 섬김이‘회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J 하비스’는 ‘승자와 패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먼저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너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못 숙입니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일어나 뒤를 봅니다.


승자는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합니다. 승자는 실패를 거울삼지만, 패자는 성공도 휴지로 만듭니다. 승자는 과정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패자는 결과에만 매달려 삽니다. 승자는 바람을 돛을 위한 에너지로 삼고 패자는 바람을 만나면 돛을 내립니다.


승자는 ‘다시 한 번 해보자’라는 말을 즐겨하고 패자는 ‘해봐야 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승자는 순위나 포상과는 관계없이 열심히 달리지만 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포상만을 생각합니다. 승자는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보면 존경심을 갖고 그로부터 배울 점을 찾지만 패자는 질투심을 갖고 그의 갑옷에 구멍 난 곳이 없는지 찾아봅니다. 승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도 친구가 될 수 있으나 패자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면 즉시 지배자가 되려고 합니다. 승자는 책임지는 태도로 삶을 살지만, 패자는 약속을 남발하며 삶을 허비합니다. 승자는 구름 위에 뜬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속의 비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들풀쉼터교회 성도님들은 승자입니까 아니면 패자입니까.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우리는 누구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모두 좋은 사람도 모두 나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고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가시를 주시고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심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고, 우리의 눈을 찌르는 송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사도처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드릴 때, 브라유처럼 자신의 눈을 찌른 송곳으로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점자라는 빛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너 때문이야 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알아, 형제와 자매의 부족함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으로 서로 채우고 감싸고 안아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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