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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3: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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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3장 1절~12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하느냐?
‘모세’라 하면 모세오경을 생각하게 되는데 한 마디로 ‘모세’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하면 그 말씀의 권위성, 그 말씀의 위엄성.
모세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 말씀도 갔고, 하나님 말씀이 있는 곳에는 모세도 있었습니다. 말씀에 도전하는 자, 모세에게 도전하는 자는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심판을 하시는데 모세로 통하여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된 것입니다. 재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모세가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려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애굽의 왕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각오했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면 그런 결심, 각오는 못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을 미디안 광야에서 자기를 죽이고 살다가 80세에 부름을 받아 신발 벗고 40일 동안 금식 후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는 데까지 올라간 그 인격, 그 성품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내적 변화, 성장 없이 자기가 제 마음대로 해 놓고는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고 많이들 떠듭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인 제도만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가서 모세처럼 그 권위성, 그 위엄성을 행사하느라고 버티고 앉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중심을 아시는지라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세상종교인들은 인정을 해 줄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인정을 해 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모세의 자리에서 그 권위성, 그 위엄성을 휘둘러 대지만 주님은 그들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돼 먹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말하는 바는 행하고!’ 하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들의 말은 성경에 성문으로 있는 말이니까!
‘그러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왜? 저희 행위는 옛사람의 부패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는가? 남을 가르치는 자기는 안 고치고 교인들만 보고 야단치고!
‘무거운 짐을 묶어서 사람의 어깨 위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참말로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고치라는 것을 종교적인 어떤 행위만 잔뜩 올려놓는 참말로 고약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 짐을 풀어놓게 만듭니다.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후 세상을 소원 목적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물질성입니다. 물질성이기 때문에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 마음이 자꾸 무거워져 짐진 것처럼 걱정 근심이 되고, 밤에 잠을 못 자게 되니 눈이 십리나 쑥 기어 들어가고, 병이 들고, 사람이 쓰러집니다.
사람이 왜 이런가? 세상이라는 짐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생의 목적을 천국을 목표하고 쳐다보게 하기 때문에 이 짐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지어진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② 그리고 이 목적에서 말씀의 이치를 한 이치, 두 이치 깨달아 나갈수록 사람이 날개가 달린 듯 기뻐지는 것입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있다가 하나 둘 짐이 부려지니 자꾸 가벼워지는 거와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누적된 죄가 하나 둘 삭감되는 거와 같습니다.
이렇게 깨닫게 해 주어야 할 자들인데, 이렇게 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도리어 행동강조에다 잡아매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갖고 와서 으름장을 놓고, 공갈 협박을 하고. 그러면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그 말대로 안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벼락이 떨어질 것 같고.
이것은 성경구절을 회초리 삼아 충성봉사 안 한다고 때리는 거와 같습니다. 얻어맞는 교인들은 충성봉사 잘 할 수 있게 축복을 달라고 울며 몸부림을 치고, 교역자는 물질이나 충성봉사로 믿음이고 신앙인양 잣대를 삼고, 기준을 삼고 강조를 하고!
교회는 사랑과 감사로써 되어 가는 것입니다.
23장 5절~7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신앙을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식에 기준을 맞추는 생각은 영의 생각이 아니라 육의 생각입니다. 신앙의 기준이 사람의 기준, 인간기준, 보이는 면에 맞춘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신앙입니다.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하고’
‘나는 이런 신분을 가졌소, 나는 이런 권위성을 가졌소’ 하고!
구약성경에 미간에도 성경구절을 써서 붙이고, 소매 끝에도 성경구절을 써서 붙이라고 한 것은 그런 모양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신 사상을 가지고 그런 사역을 하라는 것인데 이게 그만 성경구절을 더 넓게, 더 크게 만들어 붙이면 믿음이 더 크고, 작게 붙이면 믿음이 작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으니 가슴에 십자가를 금으로 매달고 다니면 의인이고 신앙 믿음이 좋고, 은으로 매달고 다니면 조금 못한 것인가? 강대상 뒤에 십자가를 안 붙이는 예배당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붙이면 그 곳에 예수가 매달린 것 같고, 더 크게 더 찬란하게 매달아 놓으면 하나님이 더 가까이 오시고! 도대체 어느 누가 무당신앙으로 가르쳐 놓았는지? 교회가 어쩜 무당 집하고 똑 같은지?
‘잔치의 상석과’
잔치의 상석은 왕손, 귀빈, 높은 계급이 앉는 자리인데 그 자리에는 갈비만 있고, 잔치의 하석은 발바닥 고기만 있는 모양이지?
‘회당의 상좌’
선생들이 앉는 자리, 나이 든 사람들이 앉는 자리, 장로들이 앉는 자리.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랍비라 칭함 받는 것’
대우해 달라는 마음, 높여 달라는 마음. 그래서 장자리 올라가려고 서로가 시기 질투하고 싸움입니다. 명예 영광심, 허영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대부분 다 예수의 이름으로 위장이 되어 있습니다.
진리신앙은 위장술이 없습니다. 진리로 되어지지 않는 것은 전부는 인본주의 세상인데 감추어지고 둘러 씌워진 것이 껍데기가 벗겨지듯이 홀딱 홀딱 벗겨질 날이 오는 것입니다.
현재적으로도 자기에겐 인본주의 옛사람, 세상성, 눈에 보이는 그것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그 만큼 가로막혀져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3장 8절~10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선생된 자의 심판은 더 큽니다.
왜 심판이 더 큰 건가?
엄격히 따지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선생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따진다면 선생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① 이방세상에서 말하는 선생은 일반 세상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습니다.
물질세상의 자연법칙이나 일반생활의 도덕성이나 육신이 사는데 있어서 생활의 수단을 가르치는 물질세상을 향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활용하고 사용하고 응용할 영적인 신앙생활의 보조적인 지식들입니다.
② 영적인 가르침이 있는데 이 가르침은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영원 궁극적 목적적 구원에 해당되는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들어있는 가르침인고로 이 목적에서 이탈된 가르침이면 자타가 영원 궁극에 해당되는 그 자체적인 심판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궁극적인 목적을 하더라도 도달하는 방편이 빗나가 버린다면 이 역시 목적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는 것도 진리와 영감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면서 세상 애굽성을 계속 준다면 영적 실력의 정복성과 가나안의 태평시대가 있을 수 있겠느냐?
교회의 인도자가 궁극적 목적적인 면에서 이탈된 줄도 모르고 사람을 잘못 가르쳤다면 그 잘못 가르침에 대한 성도들의 자체적 개체적 실력, 능력 존귀 영광 면에 해당되는 심판을 인도자 자기가 무슨 수로 책임을 질 수가 있느냐?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의 생명을 인간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책임을 진다면 어떻게 진다는 말인가? 생명을 도로 집어넣을 수 있고, 생명연장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한 사람의 생명도 책임을 못 지는 일인데 아무리 인간 자기가 교역자요 인도자라 할지라도 영원 궁극에 해당되는 자체적인 심판을 어떻게, 무슨 수로 책임을 질 수가 있겠는가? 예를 들어 인도자 자기가 영광자리에 앉았다 하자. 책임을 진다고 그 영광자리를 자기 교인에게 물려주고 자기는 내려앉을 수 있는 일인가? 하나님도 못하는 일인데! 말하자면 교회의 교훈은 이렇게 엄하고 두려운 가르침입니다. 벌벌 떨리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사람들은 흔히들 ‘그것 내가 책임을 지겠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몰라서 그런 거지 누구든지 자기가 행한 것은 자기의 뒤를 따르는 법이지 남의 뒤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인도자로서 무슨 말, 어떤 행동, 어떤 일을 했던 자타에게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손해 되게 만들었다면 여기에 대한 심판은 영원에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교회의 교훈은 현재에서 궁극적 구원에 해당되는 구원이 죽고 사는 문제가 들어 있다는 것을 크게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우리의 완전한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 지식적,
하나님의 도덕적,
하나님의 능력적으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온전을 위해서 진리의 종들도 잡고 쓰시고, 사건 환경을 잡고 쓰시고, 심지어 마귀의 역사까지 잡고 쓰기도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특히 진리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전부는 주님의 일만 잘되게 하는 수종자들입니다.
‘너희는 다 형제니라’
형제는 다 하나에서 난 것이고, 형제는 주님의 한 일에 다 같이 협조하고 동참하고, 서로가 돕고 짐을 같이 지는 것이 형제입니다. 다른 일에 가서 협조 동참하고 거드는 것은 형제가 아닙니다. 아가페사랑을 가진 자는 주님의 일을 놓고 모이고 사랑하고 서로 거들고 해야 합니다. 거들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이것은 남이지! 뺏어 가는 이것은 강도지 형제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의 주님의 복음에 어떠한 모양으로서든지 동참이 아닌 것은 형제가 아닌 것입니다.
당시에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지도자들은 성경 성문의 모세오경 속에 감추어진 계시성을 무시하고 문자적인 것만 들어서 종교생활만 강조하고,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없고 진리이신 주님을 무시하고, 고치려고는 생각지도 않고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고, 대우만 받으려고 하니 선생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선생으로 삼았다간 신앙도적을 다 맞습니다. 속지를 말아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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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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