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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1 추천 수 0 2018.02.10 22: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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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9:35-4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6.18 춘천 성암감리교회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요9:35-41


오늘의 질문은 22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보도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 말 ‘출교를 결의하다’라는 말은 상당히 독특한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예수님 당대의 상황이라기보다는 1세기 후반의 요한공동체가 처해 있었던 유대교 회당과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 사후부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가 로마에 완전히 종속되는 70년 전쟁 이전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반영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쫓겨났다는 진술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예수님 당대에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보도는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현재적 경험을 예수님 당시의 과거로 투영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요한공동체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결합된 두 차원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계신 말씀의 요지는 이겁니다.

 

당신(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는데, 그 심판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원문에 따르면, ‘눈이 멀어 버리게’)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에 발끈한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눈이 먼 사람이라는 것이냐고 따지자, 예수는 당신네들이 스스로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스럽게 죄인은 아니겠지만, 발끈하는 태도로 보아 스스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당신네들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일까요? 예수가 말하는 ‘보게 하는 것’과 ‘못 보게 한다’는 것이 심판의 행위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서 볼 수 있게 한다거나 반대로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을 해코지하여 실명하게 하는 그런 차원의 얘기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좀 유치해지잖아요?). 오히려 이 이야기는 매우 신학적인 차원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눈먼 자를 눈 뜨게 하는 일은 단지 병을 고쳐주는 예수의 자비의 행위가 아니라 [심판]의 행위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리는 심판이 곧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눈으로만 읽고 보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게 이 본문입니다. 그러나 꼭 꼬집어서 이게 무슨 말이냐 하고 물으면 대답할 신앙인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목회초기에 강해서를 써서 책으로 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가당치 않은 짓이었지만, 그 땐 제가 주체할 수 없는 영적 감흥이 충만하던 때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이 발언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데 고심해왔습니다. 어쩌면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앞에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봤습니다. 앞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가 하신 이 말씀의 진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주석한 학자들 역시 이런 예수의 심오한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요한복음 본문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요한복음 9장의 상황을 잠시 정리해보겠습니다. 9장은 세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와 제자들이 소경인 사람을 화두로 대화하다가, 예수가 그를 고쳐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7절). 두 번째 장면(7-34, 특히 13-34절)은 바리새인들과 고침 받은 사람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삐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람을 윽박지르며 말합니다. “너를 눈뜨게 한 이는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가 아니라 죄인이다”(24절). 이런 문맥에 이어지는 세 번째 장면(35~41절)에서는 예수와 그 고침 받은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봄’(보게 함)과 ‘보지 못함’(보지 못하게 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소경인 자는 누군가에 의해 항상 관찰되어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항상 타인의 시선 안에 들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타인을 바라볼 수 없었던 존재인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보는 자들입니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때론 엿보고, 때론 훔쳐보면서 남들이 율법을 준수했는지 안 했는지를 판정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러한 시선의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대목이지요.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명제는 달리 말하자면, 그 시선의 권력을 가져가는 이가 ‘보는 자'가 되고, 반대로 그 시선의 권력 하에 놓인 자가 ‘보임을 당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렇겠지만, 예수 당시의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건대, 보는 자는 곧 권력을 가진 자들이고, 보임을 당하는 자들은 권력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보는 자’는 소경과 같이 보이는 자를, 그의 존재의 됨됨이 곧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규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보는 자는 그를 제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린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제압당해 버립니다. 즉 보임을 당하는 자는 보는 자의 ‘시선’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주종관계는 보는 자의 마음대로 규정되는 ‘사실의 세계’를 현실 가운데서 만들어냅니다. 언제나 그렇듯 지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특정한 세계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볼 수 있는 자의 시선에 진리가 만들어지고, 보임을 당하는 자는 그렇게 보고 있는 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그 진리를, 그 기만적인 세계관을 객관적인 현실로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시선의 권력을 장악한 자의 산물이며, 그런 그의 전유물로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던 1세기 초반 유대 촌락 사회의 일상적인 죄인 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과 바리새인의 관계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에 제압당해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고 있는 당시 사회의 권력 질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경이 단지 한 불행한 개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시선에 의해 제압당하고 존재가 규정된 사람들 일반, 즉 바리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속의 대중을 집합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경험에선 70년 전쟁 이후 더욱 보수화된 기조로 무장된 재건 유대교 회당체제의 이념적 지배의 틀인 랍비적 바리새주의 아래 포획된 전쟁 이후의 대중 일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바리사이(바리새파)가 본 것을 자신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당당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소경은 남이 보고 말해주는 것을 마치 그게 내 말 인양 하고 살았습니다. 진짜 내 말이, 내가 보고 알게 된 것을 스스로 선언하는 [내 말]이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그 시선의 권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바라보던 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이 경험해온 시선의 권력의 지배관계를 완전히 전복해버린 것입니다.

 

소경과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보는 자와 보이던 자의 권력 관계를 전복하여 이제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던 자들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반대로 권력의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보고 있던 혹은 감시하고 있던 자들을 눈 멀게 해버리는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9장 39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러한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는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행하는 ‘심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뒤에 오는 구절이 되는 12장 47절에서는 이렇게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행하는 구원 활동의 요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규정하기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고 구원하려고 왔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본 대로 자기 말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 사람에게 구원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보거나 갖고 있는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여 그로 하여금 그 것을 앵무새처럼 되 뱉게 하는 자를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 그게 그에게 심판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는 못 보게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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