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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그 6062번째 쪽지
□하나님과 신비주의
1.조금 옛날에 ‘전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지금도 있다네요) 누군가에게 급하게 연락을 할 때, 우체국에 가서 전보 신청을 하면 바로 다음날 상대방에게 우체부가 전달해주었습니다. 편지가 며칠 걸리는 것에 비해 전보는 엄청 빠른 연락 수단이었습니다. 전보는 글자 한 자당 요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말 줄임’을 했지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으니 빨리 집으로 오너라. -부친사망급래
2.최근 옛날에 핸드폰에 ‘문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지금도 있다네요) 한 화면에 쓸 수 있는 글자는 최대 45자(90비트)입니다. 그런데 문자는 한번에 10원에서 20원씩 요금을 받습니다. 그래도 상대방에게 바로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합니다.
3.지금은 온 국민이 ‘카톡’ 이라는 메신저를 씁니다. 이제는 횟수 제한 없이 밤새도록 상대방과 문자로 수다를 떨어도 무료입니다.
4.앞으로 10년 후, 우리는 “옛날에 ‘카톡’이라는 것이 있어서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글자를 다다다다다 찍으면서 대화를 했었단다. 얼마나 불편했겠니. 호호호” 하고 카톡을 추억하겠지요?
인간들의 의사소통 도구의 발전이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과의 의사 소통 과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하나님께 ‘전보’를 쳐 놓고 하나님께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문자’를 보내 놓고 답장 문자를 기다립니다.
아..... 그런데 이 땅에 어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카톡을 합니다. 이것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아주 거룩하고 은혜스러운 기독교 신비주의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인들에게 ‘기도’는 물질주의이지만, 거룩한 성도들에게 ‘기도’는 신비주의입니다. ⓒ최용우
♥2018.4.26. 나무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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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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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뿌리, 이원론과 상승 사상>
신앙은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심각하게 진리를 왜곡하는 신비주의의 정체를 규명하려면, 먼저 플라톤의 철학 사상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신비주의의 뿌리가 바로 플라톤의 이원론과 상승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언급하기에 앞서, 골로새서의 말씀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를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쓴 서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한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8에서,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그리스도인들을 노략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는데, 18~19절에 이르러 바울의 통찰은 더욱 예리해집니다. 무엇인가를 봤다고 하며,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만을 우월하게 여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개인적인 체험을 의지하며, 자신들만이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세기 성도들을 향해, “제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혹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간파하도록, “그 본 것에 의지하며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18하-19상)고 구체적으로 골로새 교회에 있는 거짓 교사의 정체를 규명합니다. 즉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육체의 마음, 쉽게 말해 옛사람의 성품에서 나온 것을 근거 없이 과장하여 떠드는 무리들로서, 그들이 보았다고 하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은 참된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비중생자의 태도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본 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들임을 “저는……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는 구절을 통해 역설적으로 주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는 것입니다.
뒤이어 20-23절에도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 아래로 그리스도인들을 몰고 가려는 또 하나의 미혹, 금욕주의에 대한 경계가 등장하는데, 육체를 비천하게 여기면서 무시하는 금욕주의 역시 플라톤이 말한 정신세계에 속한 신성을 소유하고자 한 사람들의 사상이었습니다. 즉, 육체를 제한함으로써 일종의 영적인 상승을 얻고, 이를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나중에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경향, 하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비주의적인 체험 추구를 영광의 신학이라고 명명했는데, 그것은 이미 1세기 전부터 있어 온 풍조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초기 영지주의자들이 상승 신학으로 골로새 교회를 비롯한 다른 교회들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분별이 쉽지 않은 이 교묘한 세상 철학의 공격을 바울은 본문에서 보다시피, 정확하게 분별하여 배격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혼란을 겪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진리인지 바르게 알려 주었습니다. 1세기 당시 사도들의 주된 사역은 무엇이 진리인지 바르게 알려 주는 것이었고, 이러한 지도력은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초대 교회 때보다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낫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골로새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날카로운 지적은 1세기 성도들뿐 아니라, 20세기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침이 됩니다.
영지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오늘날 교회
신비주의를 좇는 태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등지고 배도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미 초대 교회에서 배격한 상승 사상을 오히려 공공연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상승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일단 신비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교회들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온갖 초자연적인 현상을 추구하며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려는 시도를 특별한 영적인 체험을 갈구하는 신앙적 행위인 것처럼 포장하는 태도들,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마치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인 듯 여기며 그 체험에 집착하는 모습들이 모두 상승 사상에 물든 결과입니다. 이런 신비주의 성향은 일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각종 영성운동들과 관상 기도, 방언이나 병 고침 등의 은사 집회들 속에도 신비주의는 짙게 배어 있습니다. 자연과 하나님을 일치시키고, 아예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직통 계시나 말씀을 들으려 하는 시도들이 요즘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최근 서울 강남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언자 운동이나 오순절이나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여러 그룹들 역시 신비주의적 배경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안에서 신비주의의 확산은 이제 심각한 단계에 도달했고, 균형 감각을 잃은 신학교나 선교 단체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테리토리얼 스피릿(territorial spirit)’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지역을 관할하는 특정한 귀신이 있다는 전제 아래, 그 귀신을 결박하여 그 지역과 도시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특정 지역의 영적 쇄신이나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성시화 운동’이나 ‘땅 밟기 운동’ 등이 이 일환입니다.
이들은 또한 육은 천하고 영은 귀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은사를 초자연적인 은사와 초자연적인 은사로 구분하며 우열을 논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는 열등한 것으로 여기고 방언이나 신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들만을 우월하게 여깁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마치 경건한 추구인 양 등장한 것이 자아 파쇄 운동입니다.
신비주의 계열의 다양한 영성 운동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데, 이런 면은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적 종교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를 좇는 태도는 기독교의 진리를 등지고 배도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신비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있습니까? 신비주의적인 종교 행위는 교회가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것이데, 배교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너무 편협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뿌리는 헬라 철학이라는 세상 정신이기에, 기독교 안에서의 신비주의 확장은 곧 기독교 안으로의 세상 정신의 유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자는 시도 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믿자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 줄 수 없는, 아니 결코 그렇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독자
이사야 2: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에 보면 관상기도를 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했던 성 프란치스코에게 한 마귀가 천신으로 변장한 모습으로 나타나 주니퍼라는 수사가 지옥에 간다고 얘기한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결국 주니퍼라는 수사의 경건함을 보고 그 천신이 마귀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속임수였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면 다행이겠지만, 깨달을 수 없는 속임수도 있습니다 .
'신비하고 경이롭다.'는 느낌은 신비주의와 구별되어야합니다.
<신비주의는 사전적으로 "절대자나 신 등의 초월적 존재를 내적인 직관이나 영적인 체험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하려고 하는 것"으로 정의가 된다. 신비주의자는 직접적 경험, 직감 혹은 통찰력을 통하여 궁극적 실재인 신에 대한 의식적 자각과 영적 교감과 합일을 추구한다. 기독교 신비주의,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 유대 신비주의 등이 있다. >
모든 종교의 <신비주의>에서는 마음 비우기가 선행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고, 이미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마음을 비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은 악한 영을 불러드리는 역할을 할 여지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합니다.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나 착각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마 7:21~23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에스겔 13:6-7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 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에스겔 22:28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였으며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고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했어요. 하지만, 이 세상은 신이라고 불려지는 많은 신이 아닌 것들이 존재해요. 그리고, 사탄은 다른 종교들을 통해 깨달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꼬십니다.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성경을 읽지 않으면 속을 위험이 있어요. 기독교는 느낌을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성경을 읽어보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셔서 올바른 판단을 하시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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