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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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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틀릴 수 있다
이의용 (국민대 교수·생활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1882년 우리나라에 ‘덕률풍(德律風)’이란 신기한 물건이 들어왔다. 바로 ‘텔레폰’이다. 처음에는 궁내에서만 사용됐지만 점차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됐다. 88서울올림픽 때는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덕률풍은 무선 전화라는 강적을 만나 소멸되기 시작했다. 잠시 각광을 받던 무선 전화기도 곧 스마트폰이라는 다기능 복합체에 밀려 단종되고 말았다. 이제 유선 전화기나 무선 전화기는 고쳐 쓸 수도 없는 폐품 신세로 전락했다.
앨빈 토플러의 예측대로 지식이나 기술이 조금씩 진보하던 연속의 시대는 가고, 단절의 시대가 왔다. “그때그때 달라요”처럼 전혀 다른 것이 등장하고 있다. 제품 수명이 짧아지니 전자제품은 죽기 직전에 사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경험이 지식이던 시대도 지나고 있다.
시·분침이 돌아가는 동그란 시계에 익숙한 아날로그 세대와 숫자만 바뀌는 네모형 시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는 의식이나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던 어느 날 덕률풍은 무선 전화라는 강적을 만나 소멸되기 시작했다. 잠시 각광을 받던 무선 전화기도 곧 스마트폰이라는 다기능 복합체에 밀려 단종되고 말았다. 이제 유선 전화기나 무선 전화기는 고쳐 쓸 수도 없는 폐품 신세로 전락했다.
앨빈 토플러의 예측대로 지식이나 기술이 조금씩 진보하던 연속의 시대는 가고, 단절의 시대가 왔다. “그때그때 달라요”처럼 전혀 다른 것이 등장하고 있다. 제품 수명이 짧아지니 전자제품은 죽기 직전에 사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경험이 지식이던 시대도 지나고 있다.
시·분침이 돌아가는 동그란 시계에 익숙한 아날로그 세대와 숫자만 바뀌는 네모형 시계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는 의식이나 라이프스타일이 확연하게 다르다.
아날로그 세대의 키워드는 옳고 그름 따지기, 이성적, 논리적, 분석적, 권위주의적, 경계 만들기, 내용보다 형식, 수직적 사고 등이다.
반면 디지털 세대의 키워드는 좋고 싫음 따지기, 감각적, 직관적, 본능적, 경계 허물기, 형식보다 내용, 수평적 사고 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나만 옳다!”며 독점, 통제, 간섭, 가르치기에 나서는데 후자는 “다 옳다!”며 공평, 자유, 자율, 위임으로 맞선다.
아날로그 세대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세대라면, 디지털 세대는 일일이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눈치 없는 세대다. 엄마는 아들 얼굴 보며 소통하고 싶어 하는데, 아들은 할 말만 문자 메시지로 날려버린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 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외계인’ 취급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꼰대’라며 멀리한다. 이러한 불통·갈등 현상은 가정과 사회, 경영, 교육, 문화, 심지어 목회 현장에서 심각한 일상이 돼 가고 있다.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세대는 주로 60대 남성 장로들이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원주민들이 디지털 원주민이나 디지털 이주민을 이끌어가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그럼에도 자신만이 옳다는 이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할 수밖에.
최근 어느 교회는 임직식에 작은 이웃 교회 남녀 목회자들을 초청했다. 설교도 여성 목회자에게 맡겼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노래하며 임직식장을 순례해온 노회 어른들이 뭐라 했을까. 젊은이들은 또 뭐라 했을까. 청년들을 대상으로 장로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봤다. 싸우지 말 것, 대표기도 짧게 할 것, 보수 성향의 대표기도 하지 말 것 등이 나왔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노욕, 물질욕, 명예욕에 취한 아날로그 원주민 목사·장로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들은 이미 화석(化石)이 돼 버린 덕률풍 사고로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걸 거부하며 “우리가 윗세대에 해준 것같이 너희도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외친다. 그뿐 아니다. “십일조 안 하면 암에 걸린다”는 등 엉터리 성경 해석으로 교인들을 협박하고, 교회를 사유화하며, 순진한 교인들을 아무 데나 동원하고 있다. 얼마나 추악한지 자신들만 모른다. 자기 성찰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이나 행동은 선험적으로 알게 된 ‘절차기억’,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기억’, 후천적으로 알게 된 ‘학습기억’이 만든다.
반면 디지털 세대의 키워드는 좋고 싫음 따지기, 감각적, 직관적, 본능적, 경계 허물기, 형식보다 내용, 수평적 사고 등이다. 그래서 전자는 “나만 옳다!”며 독점, 통제, 간섭, 가르치기에 나서는데 후자는 “다 옳다!”며 공평, 자유, 자율, 위임으로 맞선다.
아날로그 세대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세대라면, 디지털 세대는 일일이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눈치 없는 세대다. 엄마는 아들 얼굴 보며 소통하고 싶어 하는데, 아들은 할 말만 문자 메시지로 날려버린다. 이렇게 서로 다르다 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외계인’ 취급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꼰대’라며 멀리한다. 이러한 불통·갈등 현상은 가정과 사회, 경영, 교육, 문화, 심지어 목회 현장에서 심각한 일상이 돼 가고 있다.
한국교회를 이끌어가는 세대는 주로 60대 남성 장로들이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원주민들이 디지털 원주민이나 디지털 이주민을 이끌어가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더구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그럼에도 자신만이 옳다는 이들이 교회 안에 적지 않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할 수밖에.
최근 어느 교회는 임직식에 작은 이웃 교회 남녀 목회자들을 초청했다. 설교도 여성 목회자에게 맡겼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을 노래하며 임직식장을 순례해온 노회 어른들이 뭐라 했을까. 젊은이들은 또 뭐라 했을까. 청년들을 대상으로 장로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봤다. 싸우지 말 것, 대표기도 짧게 할 것, 보수 성향의 대표기도 하지 말 것 등이 나왔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노욕, 물질욕, 명예욕에 취한 아날로그 원주민 목사·장로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들은 이미 화석(化石)이 돼 버린 덕률풍 사고로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걸 거부하며 “우리가 윗세대에 해준 것같이 너희도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외친다. 그뿐 아니다. “십일조 안 하면 암에 걸린다”는 등 엉터리 성경 해석으로 교인들을 협박하고, 교회를 사유화하며, 순진한 교인들을 아무 데나 동원하고 있다. 얼마나 추악한지 자신들만 모른다. 자기 성찰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의식이나 행동은 선험적으로 알게 된 ‘절차기억’,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기억’, 후천적으로 알게 된 ‘학습기억’이 만든다.
학습기억은 독서 같은 자기 성찰 활동으로 형성되는데 나이가 들면 대부분 이를 포기한다. 결국 신념기억에만 의존해 “나만 옳다!”고 주장하게 된다. 정치·종교계에 그런 이들이 유독 많은 이유다.
갓난아이 몸 안에는 수분이 90%나 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수분은 계속 줄어 노인이 되면 60%밖에 안 된다. 노화를 막으려면 평소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 학습은 정신적인 수분 섭취 활동이다. 학습하지 않으면 그 정신세계는 늙어버린다. 나이를 불문하고.
아날로그 세대인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다른 사람의 비판을 통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도 틀릴 수 있다!”고 고백해야 더 급해질 단절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은 고쳐 쓰는 시대가 아니라 바꿔 쓰는 시대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을 바꾸게 된다. 나도 그렇다!
갓난아이 몸 안에는 수분이 90%나 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수분은 계속 줄어 노인이 되면 60%밖에 안 된다. 노화를 막으려면 평소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한다. 학습은 정신적인 수분 섭취 활동이다. 학습하지 않으면 그 정신세계는 늙어버린다. 나이를 불문하고.
아날로그 세대인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 것은 큰 잘못이다. 다른 사람의 비판을 통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도 틀릴 수 있다!”고 고백해야 더 급해질 단절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지금은 고쳐 쓰는 시대가 아니라 바꿔 쓰는 시대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을 바꾸게 된다. 나도 그렇다!
이의용 (국민대 교수·생활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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