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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3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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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6장 36절~4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인데 이 동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았고 감람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는 고로, 또는 기름을 짜는 틀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환난 시험 고통이 다가오고 있는 중인데도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기도를 하시고 지상 최대의 과업이요 최대의 전무후무한 십자가의 사건에서 대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환난 시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먼저 내 안의 싸움 즉, 대내전을 이겨야 대외전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여기 ‘너희’는 몇 사람이냐? 가룟유다는 빠졌으니까 8명의 제자들입니다. ‘여덟 명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는 세 제자를 데리고 가십니다. 세 제자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여덟 제자 입장에서 볼 때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안 들까? ‘왜 우리 여덟 사람만 여기 있게 하고 세 사람만 데리고 가지?’ 순간적으로 아마 떠오르는 게 있을 것입니다.
세 제자는 따로 높은 산으로 주님과 같이 가서 헐몬산에서 천국이 이 땅에 임하는 신비로운 광경을 본 제자들입니다. 그 때 아홉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다가 귀신들린 사람한테 도리어 얻어터진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여러 번 보았으니까 쉬운 것 같이 느껴졌겠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도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니까 별 것이 아니거든. 그래서 산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붙지 않고 ‘우리도 귀신을 한 번 쫓아내어 보세’ 하고 시험 삼아 하려던 것이 귀신들린 자에게 얻어터지기만 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제는 죽어도 따라가야지’ 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이제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으라’ 그러시네! 그리고 이제는 세 제자보고 ‘따라가자’ 그러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따라가려야 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따라갈 기회를 놓쳐 버리니까 이제는 스스로 따라가려 해도 주님의 제재가 옵니다.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으라’ 차별대우를 한다고 해도 별 수가 없습니다. 차별대우 받을 만큼 자기가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또 한 면은 한 번 격차가 생긴 것은 추월하기가 그 만큼 힘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추월을 못 하면 그 격차는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또 한 면은 사람이 특수한 것을 3년을 따라다니면서 배웠으면 특수한 인격성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영적인 면에 감각성이 민활하고 민첩하고 민감해야 할 터인데 피동적 피동으로만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맹종입니다. 곧이곧대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순종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에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것이 있고, 긍정적인 말에 부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 있어라’고 말은 해도 따라오기를 기대하는 그런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라’(사무엘이 순회하며 다스린 곳) ‘여리고에 머물라’(건설을 하면 저주받는 곳) ‘벧엘에 머물라’(왕하 2:1-3, 선지생도들이 많은 곳)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따라오지 말고 머물러 있으면서 부흥강사 해 먹어라, 신학교 학장 해 먹어라, 종교사업이나 해 먹어라!’ 했는데 엘리사는 끝까지 따라 붙었습니다. 어디까지 따라 붙었느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는 것을 볼 때까지!
그 결과로 능력의 두루마기를 받아가졌습니다. 요단강을 치니 사해바다 죽음의 바다로, 사망계로 모두 몰고 가는 그 물을 끊어 놓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누가 알랴!
모두들 사망계에서 부흥강사를 못 해 먹어서, 신학교 학장을 못 해 먹어서, 종교사업을 못 해 먹어서 안달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면에서 커져서 일인자가 되어 불까? 한 번 붕 떠볼까?’
주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전 재산, 피 한 방울까지 주님께 쓰임이 되게 하려는 사람이 있고,(못난 부자청년과 정 반대입니다) 자기의 세상을 세우려는 사람이 있고, 주님의 진리의 세계를 세우려는 사람이 있고.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앉아 있으란다고 지금 앉아 있을 형편이냐? 주님이 지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끝까지 따라 붙어야지, 진리가 가면 따라 붙어야지, 제자 전부를 따라오지 말란다고 해도 주님 곁에 바싹 따라 붙어야지 일순간 분초찰나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세 제자는 가는데 왜 남은 제자는 가만있으란다고 가만있느냔 말입니다. 여덟 제자의 제자라는 이 위치가 무엇이냔 말입니다. 참말로 멍청한 제자들입니다.
다윗이 피난가면서 궁녀들보고 궁안 에 있으라고 한다고 그대로 있다가 궁녀들이 원수들에 의해 변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따라가다 죽는 게 옳지 있으란다고 있었습니다. 이게 순종입니까? 참말로 멍청한 것들입니다. 어디서 그런 멍청한 것들이 선발되어 왔는지?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면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무척 괴로운 표정입니다. 멍청한 여덟 제자는 모릅니다.
주님의 이 표정을 본 세 제자는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까?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면서 세 제자들이 어떤 느낌을 가지기를 바랬을까?
세 제자들은 세 제자들대로 ‘이상하다, 3년 동안 저런 고민은 없으셨는데!
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막상 죽으려니 죽기 싫어서 저러실까?
② 안 죽으려면 복음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오신 목적이 안 되고, 죽으려니 두렵고 해서 그러실까?
③ 장가를 가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그 고민이실까?
④ 십자가에 힘없이 매달려 죽느냐, 다 도망가게 이적을 한 번 나타내느냐?
⑤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고민이실까?
예수님 당신을 위한 고민이신가, 제자들을 위한 고민이신가? 누구를 위한 고민이신가? 누구를 위한 고민 같은가?
‘주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찌 되지? 주님이 잡혀 죽으면 우리는 살지 못할걸? 3년 동안 믿고 따라온 종착역이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보면 가룟유다가 참 부럽습니다. 왜?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고 자기 살길을 찾아 큰 곳에 가서 붙었으니까! 안 그럴까?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생겼다. 그러니 이럴 때 나와 함께 깨어 있자’고 말씀을 하시고 39절의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제자들이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못 들었습니다. 왜 못 들었느냐? 깜빡 졸은 것입니다. 39절의 몇 마디 기도가 글자 그대로 라면 보통사람들의 말 속도로 보더라도 10초 내지 20초, 길어보았댔자 30초 안 입니다. 그 30초 동안 깜빡 졸은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랬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못 들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한심하셨을까?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죽기를 각오한다고 해서 배짱으로 악으로 이길지 모르나 주님의 환난 때, 진리의 환난 때 주님의 기도를 깨어서 듣지 못한 상태인데 환난 때의 기도를 알지 못한 주제에 죽기를 각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순교가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개죽음밖에 더 되겠느냐? 평소에 닦아 놓은 실력이 없다면 어떻게 환난 시험 고통을 이기겠느냐?
주님이 뭘 도와달라고 했느냐? ‘나와 함께 깨어 있자’ 입니다. 무슨 큰 것을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집문서 논밭문서 가지고 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자’ 입니다.
장담하는 사람보다 현재적으로 부지런히 진리 자체화로 만들어지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배반하라고 해도 배반 안 할 사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배반을 하려고 하면 도리어 죽기보다 더 괴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 그 근방에 있는 여덟 제자들이 세 제자가 자는 꼴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했겠느냐? ‘베드로형님이 우리를 무시하고(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라고 했으니까) 큰소리 떵떵 치고 장담만 하더니 자는 꼴 참 보기 좋다’ 하지 않겠느냐?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신앙양심이 바로 섰다면 ‘내가 먼저 믿은 선배로서, 나이가 제일 많은 자로서 졸고 있는 이 꼴이 뭐지?’ 할 것이고, 또 주님께서 특별히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셔서 앞으로 하나님의 진리말씀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오는 환난 시험을 이기려면 주님처럼 깨어 있으라고 기도를 하셨는데 조느라고 뭐라고 기도를 하셨는지를 모르겠으니 ‘참말로 주님 보시기에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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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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