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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에서 생명으로!

민수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47 추천 수 0 2018.06.17 08: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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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민21:4-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6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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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사순절 넷째 주일, 2018년 3월11일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 역사에는 두 분기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원전 15세기의 출애굽과 이어지는 40년 광야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6세기의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과 이어지는 50년 바벨론 포로생활입니다. 구약성경은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에 얽힌 크고 작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민 21:4-9절에 나온 이야기는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로 앞 장인 20장에 모세의 형인 아론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이 사건은 40년 광야생활의 후반부에 속하는 걸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민 21:4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해서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했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애굽을 떠날 때는 곧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인해서 의기양양했을 겁니다. 홍해와 가나안 사이에 놓인 미디안 광야를 횡단하는 데는 건강한 남자 걸음으로 보름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간다고 해도 두 달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들이 광야에서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무 살 이상 되는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걸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과정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민 21:5절이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묘사합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이유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생활을 견딜 수 없다는 겁니다. 광야로 나오지 않았다면 비록 소수 민족으로 무시당하기는 했어도 애굽에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었으니 자신들을 광야로 끌고 온 모세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이럴 바에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의 처지가 되었더라도 똑같이 반응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생존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기대했던 먹을거리가 보장되지 않고, 원주민들로부터 유형무형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요즘의 유럽 곳곳에서 떠도는 난민과 비교하면 됩니다.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모세 같은 영웅들에게나 절실하지 일반 백성들에는 별로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일단 먹고사는 생존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나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반적으로는 인간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순간이 되면 모든 정신적인 가치를 포기합니다. 생존 본능이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백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인 유인원들은 물론이고 수만 년 전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생존 경쟁을 벌였습니다. 다른 동물을 잡아먹지 않으면 자신들이 잡아먹힙니다. 지금은 인간이라는 종(種)이 모든 동물을 지배하는 위치에 올랐지만 다른 동물과의 생존 경쟁은 여전합니다. 문명의 이름으로 세련되게 생존 본능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수렵을 했지만 지금은 소와 돼지와 닭을 키워서 잡아먹습니다. 문명사회는 이런 생존경쟁이 더 노골화되었습니다. 다른 포식자들과의 표면적인 경쟁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경쟁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이고, 평상시에는 무역전쟁을 벌입니다. 북한이 핵무기에 매달리는 이유도 생존 본능의 결과입니다. 인류 역사에는 생존 본능으로 인한 갈등과 원망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망은 광야생활 40년에 걸쳐서 반복되었습니다. 애굽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이미 원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출 15:22절 이하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으나 마실만한 물을 얻지 못하자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출 15:24) 했습니다. 출 16:2절에서도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먹던 때가 좋았다고 회고하면서 이제 광야에서 굶주려 죽겠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광야 초기만이 아니라 끝나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서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게 만듭니다. 그게 극단으로 치우치면 마녀를 만듭니다. 정치인들은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불뱀과 놋뱀 사건


민 21: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해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불뱀은 독사겠지요. 광야에 독사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독사만이 아니라 사람이 물리면 죽을 정도로 독성을 가진 곤충들도 많았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독사 떼가 몰려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성경구절을 오해해서 하나님이 실제로 독사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독사를 보내서 그들을 죽게 했다면 오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술들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상충됩니다.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죽인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는 이상한 일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출 32:25절 이하에서 또 하나의 사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을 설득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신으로 섬겼습니다.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가 그 장면을 보고 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레위 자손으로 하여금 중무장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든지 자신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구절은 출 32:3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이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이 사건도 독사에 물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오늘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칼날 위에 살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것이냐, 아니면 세상과 타협할 것이냐를 요구받았습니다. 독사 출몰로 인해서 벌어진 끔찍한 재앙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당시 상황을 그들은 뚫고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적인 태도는 옳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께 기도를 드려서 이 재앙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는 당연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특별한 퍼포먼스를 명령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매달아 뱀에 물린 자들로 그걸 보게 하라는 겁니다. 그걸 보는 사람은 해독됩니다. 모세는 그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이런 설명을 듣고 정말 초자연적인 기적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막 16:17,18절을 사실로 믿고 그대로 따라서 했다가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 구절에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열거됩니다.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장대 끝에 달아놓은 놋뱀을 본다고 해서 독이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조치로 보입니다.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습니다. 독사 떼가 출몰했을 때 처음에는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아서 많이 물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리는 일이 줄어들었을 겁니다. 독사에 물렸다고 해서 모두 죽는 건 아닙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 치료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 민심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영적인 권위가 막강했던 모세의 말이 특별한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냈다거나 놋뱀을 쳐다본 사람이 치료되었다는 것은 어떤 근원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신학적인 장치입니다. 그 메시지는 생존에 대한 염려에서 시작되는 원망은 죽음을 불러온다는 사실입니다. 거꾸로 비록 생존 조건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야말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성경의 메시지를 단순히 종교적인 처방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에서는 서로에게 원망하지 말고, 특별히 목사를 원망하거나 대항하면 무조건 안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합니다. 이것은 훨씬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실제로 삶을 파괴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염려에 빠져서 삶의 중심을 놓칩니다. 마 6:25-3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몸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숨이 음식이나 옷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런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생존 조건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 조건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20평 임대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50평 주택에서 더 큰 집으로 옮길 염려를 하면서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까요? 이런 설명을 비현실적인 거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생존경쟁에만 몰두하는 세상살이에 익숙해졌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억지로 바꾸라는 게 아니라 바꿔야만 생명을 얻기 때문에 바꿔야 합니다. 일전에 몇몇 집사들과의 모임에서 아무개 집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 목사는 교회문제에 관해서 천하태평이라는 겁니다. 좋은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준비해야겠지만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염려가 끼어들기에는 모든 것들이 다 좋은 것이며, 또한 복된 것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염려보다는 지금 귀한 예배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는 생명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이 놋뱀 이야기를 요 3:14,15절에서 언급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주신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장대 위에 달린 놋뱀에 비유했습니다. 광야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배성들이 놋뱀을 보고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를 교리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존과 미래에 대한 염려로부터 해방되어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요한의 메시지가 옳을까요?


그 답을 말씀드리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려와 원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버텨온 세월이 자그마치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언제 이런 생활이 끝나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가운데 여전히 먹을 것이 없고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민 21:5절을 좀더 자세하게 읽어보면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금 당장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만나로 추정되는 그 하찮은 음식이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인 줄 몰랐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좀더 풍성한 먹을거리가 제공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원망을 거두어들이고 감사했을 거라고 추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훗날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먹고 살 물적인 토대를 갖추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반복해서 바알숭배에 기울어졌습니다. 실제적으로 궁핍하거나 풍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궁핍하다고 느끼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물질적인 토대로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렵습니다. 부자 교회가 된다고 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무조건 행복해질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부활 생명이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서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종말에 일어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절망적인 자리에서, 가장 고독한 자리에서 절정의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면 그는 더 이상 ‘하찮은 음식’으로 인해서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걱정하지 않음으로써 원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자기의 운명에 무조건 순응하면서 살아야지 삶의 조건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고하고 투쟁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수고와 투쟁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세상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문제는 하찮은 음식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서로 원망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보고 생명을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니 그들과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즉 하찮은 음식과 하찮은 삶의 조건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있음의 기쁨과 환희’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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