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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살과 뼈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89 추천 수 0 2018.06.17 08: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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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4:36-4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67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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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부활절 셋째 주일, 2018년 4월15일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오늘 설교 본문은 눅 24:36-48절입니다.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활절을 두 주일 전에 보냈는데도 다시 부활 설교를 하는 교회가 대구샘터교회 외는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일반적으로 부활 설교는 부활절 하루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건 오해이며 착각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예수 부활이 기독교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와서 잠시 살다가 죽어야 할 운명의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직결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생명 충만하게 살고 계십니까? 부활 신앙에 근거해서 세상의 모든 허무와 강요와 불안과 좌절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분들에게 오늘 설교는 큰 위로가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하는 분들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


어느 날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 큰 실의에 빠져 있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는 식의 장면 묘사가 없습니다. 예수 현현이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에이레네 휘민!’(그대들에게 평화가!)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얼마 전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 이가 자신들 앞에 나타났으니까요. 일상에서 가능하지 않은 사건을 만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일종의 혼령, 즉 귀신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는 말씀입니다. 악몽을 꾸면 식은땀을 흘리는 거처럼 귀신을 만나면 누구나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자신들 앞에 나타난 존재가 실제로 누군지 믿기 힘들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합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의심은 그들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과 지금의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자신은 영이 아니라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바로 그 역사적 예수라는 것입니다. 39절 말씀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 처형 당시에 생긴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귀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상처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붙들려고 하자 붙들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이 이번에는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걸 확인할 실증이 필요 없지만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실증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은 실체가 없는 귀신과 달리 자신에게 살과 뼈라는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구성요소인 영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영은 순수하고 아름답고 영원하지만 육은 그 반대로 욕망 덩어리입니다. 인간 영혼은 육이라는 지옥에 갇혀서 살다가 죽으면 육으로부터 해방되어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일견 옳습니다. 사람의 몸은 시간과 더불어서 노쇠하고 결국 죽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습니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한 늙어도 마음과 생각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헬라철학의 이원론적 관점이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동의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육체적인 삶을 낮춰보는 금욕주의가 끊임없이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도 제법 많습니다. 고전 15:5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은 이런 순수 영혼주의를 거부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살과 뼈를 가지신 분이었다고 누가는 보도합니다.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댔는지에 관해서 본문은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도마 이야기(요 20:24 이하)에서도 도마가 예수님의 몸에 난 못 자국을 손으로 확인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확인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단백질로서의 몸과 똑같은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예수님은 살과 뼈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에게 뼈와 살로 된 몸이 있다는 사실과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살과 뼈는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과 뼈는 원소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살과 뼈는 세상의 원소로 해체됩니다. 지금 우리 손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지금 손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 자신들과 함께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너무 기뻐 믿지 못하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마침 구운 생선 한 토막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걸 드리자 예수님이 먹었다고 합니다. 귀신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제사 행위에서 죽은 조상의 혼령에게 음식을 바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걸 실제로 믿고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제사가 다 끝나도 음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의 예수님 경험은 이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과 똑같이 생선을 먹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수님을 살아있는 자로 경험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받아들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에 부활의 예수님이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삶이 곧 부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은 살과 뼈로 된 몸을 가진 사람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부활의 현실성, 살과 뼈


이런 부활 경험이 무슨 뜻일까요? 직관적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것,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것, 삶의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것들을 다 포함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묶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살과 뼈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명이 살아나고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을 살리는 것은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차원은 이 세상을 생명 지향적으로 개혁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인 차원은 자신의 삶과 세상을 창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자에 필요한 것은 연대와 투쟁이고, 후자에 필요한 것은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저는 먼저 적극적인 차원을 설명하겠습니다. 적극적인 차원이 주어져야만 소극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둘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적극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에서 세상을 아름다고 선하고 보기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선함을 누리는 것이 바로 부활 생명의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절대적으로 선하기에 지금 우리 눈에 악하게 보이는 것마저도 전체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진이나 자연재해는 생명을 파괴하기에 악하게 보입니다만 결국에는 그것마저 지구의 생태계를 조화롭게 하는 현상입니다.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생기는 고름도 역시 몸이 건강을 유지하려는 생리현상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악마저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선에 휩싸인다는 게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죄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그것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저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냅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을 겁니다. 그 자리가 겉으로는 단조로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주의 깊이만큼 신비롭습니다. 손을 뻗어서 성경책을 들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책과 나 사이에 일정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사실이 놀랍고, 그걸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놀랍습니다. 제 서재는 2층입니다. 1층으로 내려올 때면 18계단을 하나씩 밟아야 됩니다. 제 몸이 지구의 중력을 느끼면서 중심을 잘 잡아야만 흔들림 없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보다 더 즐겁습니다. 요즘은 특히 계단에서 내려올 때 정면 벽에 걸려있는 주기도문 족자를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천지사방에 재미있고 호기심 가는 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살아있다는 것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큰돈을 들여서 고급식당에 가지 않아도, 외국여행을 다니지 않아도, 좋은 차를 타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그런 기회를 일부러 피하지도 않습니다. 성찬예식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처럼 사소한 사물이 바로 생명의 근원인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여기서 이미 부활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당신 말이 맞지만 이전투구 방식으로 돌아가는 현실에서는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교회는 가난합니다. 예배당도 월세입니다. 신자들 숫자도 적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대형교회를 전혀 부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작은 사물 하나에서 생명의 신비를 아는 사람처럼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 생명의 소극적인 차원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복잡합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스로 자신의 살과 뼈를 방어할 수 없는 이들을 돕는 것은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과 어린이들은 국적과 종교에 상관없이 무조건 보호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기근 등으로 삶이 파괴되는 아이들은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부정당하는 이런 사태는 곧 부활생명이 부정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난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참여하고 연대하겠다는 삶의 태도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4월16일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세월호 참사’ 4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 참사로 승객 476명 중에서 304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 250명이 포함되었습니다. 교사까지 합하면 대부분 희생자들이 단원고 식구들인 셈입니다. 전쟁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열일곱 살 아이들 수백 명이 배에 갇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티브이로 생중계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에서 국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구조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구조할 의지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해양 대원이 구해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구조된 이들은 스스로 배 밖으로 나온 이들 뿐이었습니다. 세월호 사건도 흔한 교통사고와 마찬가지이니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벌어졌을 때 대통령이 자기 역할을 다 했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진상조사회원회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밝혀진 바이지만 당시 대통령은 골든타임이 훨씬 지나서 침실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창 4장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낀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대한민국에는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인가?’라는 가인의 책임회피가 만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는 생명을 파괴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수단으로 다루면서 책임 회피를 일삼는 세력에 저항했는지, 아니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외면했는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


오늘 설교 본문은 두 대목입니다. 한 대목은 36-43절인데,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다른 한 대목은 44-48절에 해당됩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생선을 드신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이 바로 예수님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뒤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증인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은 아무나 될 수 없고, 사건을 실제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거짓 증인도 있긴 합니다. 그는 자기도 믿지 못하는 말을,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합니다. 기껏해야 들은풍월에 불과하니 그의 증언에는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 증언한 대로 살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헛소문에 마음을 빼앗길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생명의 현실성으로, 즉 살과 뼈를 지닌 분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설교하는 저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 모두 이런 증인의 대열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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