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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의 다독다독 - 21세기형 로맨스소설의 탄생
베스트셀러는 언제나 당대에서는 대중이 쉽게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1980년부터 2010년까지를 정리한 <베스트셀러 30년>을 펴내기도 했고, 나중에 광복 70년을 맞이해 ‘베스트셀러 70년’을 정리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입니다. 그걸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인구 3000만명 중에서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전장에서 많은 남성들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전후허무주의가 엄습하던 1950년대에 홀로 된 젊은 여성들은 어땠을까요? 춤바람이라도 나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현실에서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었던 그들은 <자유부인>(정비석)의 여주인공 오선영을 바라보며 안도했습니다. 대학교수 장태연의 부인으로 정숙한 가정주부였던 오선영은 춤바람이 나서 가정이 파탄할 위기에 처합니다. 이 소설이 신문에 연재되자 서울대 법대 교수 황산덕은 정비석을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까지 격렬하게 몰아쳤습니다. 결국 작가는 잘못을 뉘우친 오선영이 장태연의 이해와 아량으로 가정으로 돌아오도록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업화가 이뤄지던 1970년대에는 호스티스소설이 떴습니다. <별들의 고향>(최인호)의 경아, <겨울여자>(조해일)의 이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모두 잘난 남자들 때문에 상처를 입고 호스티스가 됩니다. 그들을 ‘성(聖)처녀’로 미화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추락해갑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에 수많은 젊은 여성이 도시로 와서 여공이나 오피스걸(OL), 버스 차장이나 식모(가정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무책임한 사내들의 ‘방뇨’에 의한 가련한 희생자로 추락해가는 호스티스들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옷깃을 여몄을 것입니다.
사상 초유의 IMF 외환위기 직후 맞이한 2000년대는 벤처열풍이 대단했습니다. 글로벌 세상은 단지 생각을 바꾸거나 대화, 협상, 유혹, 칭찬 등의 기술 하나만이라도 잘 습득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계발 전성시대였습니다. 벤처열풍에 힘입어 일확천금을 건진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은 조금씩 나빠질 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후에도 5년마다 카드대란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포기하고 나에게 주어진 알량한 ‘행복’이라도 겨우 유지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에 크게 뜬 소설들은 모두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각막을 팔아가면서까지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려는 부정을 그린 <가시고기>(조창인), 위암에 걸린 여인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건강한 딸을 낳고 죽어가는 <국화꽃 향기>(김하인),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하고도 교양을 중시하는 가족들 때문에 상처조차 드러낼 수 없었던 여자가 세 명의 여자를 살해한 죄로 사형수가 된 남자를 면회하던 매주 목요일의 세 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여기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엄마가 지하철에서 실종되고 나서야 가족들의 여러 시점으로 엄마라는 실체가 점차 드러나는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등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명박 정권 내내 셀프힐링을 하면서 겨우 버티다 맞이한 2010년대에는 개인이 혼자 일어서기도 버거워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멘붕이 온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둘 포기하다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어 N포세대가 된 이들은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라고 외치는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의 삶에 자신을 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 떨치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이름은>(조남주)은 소설 ‘만인보’입니다. 28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아홉 살부터 예순아홉까지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드디어 희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타나고, 맞춤법도 맞지 않는 피켓을 들기도 하고, 비정규직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파업을 하면서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 하니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애의 마음>(김금희)은 초연결사회의 새로운 로맨스입니다. 37세인 남녀 주인공은 56명이 한꺼번에 죽는 20년 전의 화재로 친구와 애인을 잃은 경험을 공유합니다. 반도미싱에서 한 팀이 되는 경애와 상수는 회사에서의 삶은 늘 겉돌지만 익명으로 만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사이트에서는 진정한 마음을 드러내는 이중생활을 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가상현실에서의 만남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마음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드디어 서로의 손을 맞잡습니다.
지난 6·13 지방선거는 두 사람처럼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우리가 “사랑의 상실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과거를 떨치고 투표 하나로 진정한 마음을 공유한 대단한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잃어버린 사랑이 어떻게 안전하게 식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요? 소설 속의 두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저는 현실에서 늘 2% 정도 부족한 것을 네트워크에서 채우던 인물들이 주인공인 21세기형 로맨스 소설의 탄생에 무척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새로운 사랑을 한번 꿈꿔보시지요.
[출처] 21세기형 로맨스소설의 탄생|작성자 한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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