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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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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324) |
산상팔복(3) 온유한 자의 복 (마태복음 5장 5절)
< 온유함이 아닌 것 >
온유함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온유함을 오해한다. 그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먼저 온유함이 아닌 것부터 알 필요가 있다.
첫째, 온유함은 마냥 부드러운 것이 아니다. 온유함이란 주관도 없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다. 온유함이란 외유내강을 말한다. 속으로는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부드럽게 남을 감싸 안는 것이 온유함이다. 한 호인 전도사는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팠다. 주일에 교인들이 부탁하는 일을 사소한 일까지 다 들어주니까 호인으로 여겨졌지만 속으로는 자존심이 상했고 결국 내면 안에 억제된 분노로 배가 아팠던 것이다. 부드러운 것은 좋지만 주관도 없이 굽어지는 것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둘째, 온유함이란 마냥 느긋한 것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마음을 잘 다스리기에 느긋함을 잃지 않는다. 온유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대개 여유가 있다. 여유는 능력의 표시이고 조급함은 무능의 표시이다. 물론 지나친 여유는 게으름과 무책임의 표시일 수도 있다. 진짜 온유한 사람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때로는 박력과 추진력도 있고 책임감도 탁월한 사람이다.
셋째, 온유함이란 마냥 참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지만 끝까지 참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룩한 분노도 필요하다.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가 이방인 구스 여인을 취할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 일을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그때 모세는 전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그 모습에 대해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상 최고였다!”고 표현했다.
그런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춤추고 절할 때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내던지며 분노했다. 주님도 온유했지만 성전 청소를 할 때는 장사꾼을 몰아내고 장사꾼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막 11:15). 모세와 예수님의 분노의 공통점은 자기를 위한 분노가 아닌 악에 대한 분노였다는 것이다. 그처럼 온유한 사람도 때로는 악에 대해 분노를 터뜨릴 수 있어야 한다.
<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
온유함이란 무엇인가? 첫째,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성품이다. 요즘 결혼조건으로 제일 중시하는 덕목 중의 하나가 ‘치우치지 않는 성품’이다.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치우치는 사람보다 비록 40일 금식기도는 못해도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낫다. 치우치면 일은 잘 성취되어도 행복은 잘 성취되지 않는다.
큰 믿음을 구하되 극단적인 믿음은 피하라. 절제가 없으면 대개 실패한다. 너무 모자라도 안 되지만 너무 지나쳐도 안 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過)’ 자가 들어간 말에 좋은 말은 거의 없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전 9:25). 절제할 줄 알아야 결국 승리한다.
둘째, 생각과 언행이 겸손한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짝꿍이다(엡 4:2).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마 11:29).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온유하다. ‘겸손’이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혜가 없으면 자기가 꽤 괜찮은 줄 알다가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인 줄 깨닫는다. 거꾸로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할 때 은혜도 넘치게 부어진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알면 판단하지만 어떤 사람은 많이 알아도 판단하지 않는다. 대개 판단이 많은 사람은 판단 받을 것도 많고 판단이 적은 사람은 판단 받을 것도 적다. 자랑과 판단이 많으면 은혜와 능력은 떠나고 기도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만 자랑과 판단을 줄이면 은혜가 속히 임하고 기도도 능력 있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면 영적인 허영심을 주의해야 한다.
셋째, 말씀에 길들여진 것이다. 온유란 헬라어로 ‘프라우스’라고 한다. ‘프라우스’란 짐승이 잘 길들여진 상태를 뜻하는 단어이다.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에 순종할 때 헬라인들은 ‘프라우스’란 단어를 썼다. 그처럼 온유란 하나님의 말씀에 잘 길들여진 것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형편이 되지 않아도 힘써 순종하는 모습이 온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어떤 집사가 작은 아파트를 팔고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살 때보다 약 2억 원을 더 받고 팔았는데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대출을 더 받아야 했기에 계산상으로는 2억 원을 벌었지만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고민하다가 전화했다. “목사님! 이때도 십일조를 내야 합니까?” 그때 “집사님!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때 신학적인 정답을 아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어떻게 하든지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그의 마음자세다. 그처럼 말씀에 최대한 길들여지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바로 온유한 마음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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