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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cafe.daum.net/peter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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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이 없다
‘노란색 봉투만 봐도 끔찍하다’
20년 동안
땀 흘렸던 슈퍼 일을 접고
이제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어느
상인의 독백이다.
소도시까지 e-마트가 개점되면서
중소상인들이
사지에 내몰리게 된 것은
대형마트의 공격에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형화 추세는
e-마트가 대표적 사례지만
세계는 지금 글로벌기업 짝짓기에
붐이 일면서 사회적인
양극화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언론에서는
교육, 임금, 고용, 부의 양극화라는
기사를 다루더니
이제는 그 주제가 더욱 다양해져
집값이나
펀드, 수출 등 심지어 문학까지
양극화가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몇 가지 과정을 통해 어느 나라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정보화와 세계화 속에
생산성이 높은 부문으로 자원이 이동되면서
상대적인 다른 산업은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빈곤층은
더욱 확대되고 사회경제적 갈등은
더욱 야기되어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낳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짝짓기가
이루어져
대형화되는 추세는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대조적인
사회계층은 극한 양상을 띠며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이 더욱 실감나게 하는 것은
소수의 부유층들은
더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 절반은 아직도
하루 겨우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이다.
우리 경제규모는
세계 11위라고 하지만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 현상은
이 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위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복지제도 등을
보완하지만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대책은 다름 아닌
‘중간의 자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중간을 무시한 채
너무 극단적이고
이분법적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부자가 아니면 실패한 인생’이고
‘쿨하지 아니하면 굴한 인생이다’라는 식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근세 이후에
하나의 세력을 이루면서 오로지
정신과 물질로만
세상을 구별 지어 왔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주관자와 객관자로
극단화시켜
상호교통을 철저하게 단절시켜
자연경시와
자연 파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그 때처럼
타협이나 상호인정이라는
중간영역은
사라지고 양극화만 치닫고 있다.
역사는 항상 수구세력과 개혁과의
싸움이 반복되었지만
언제나 정치와 언론의 논리에 따라서
한 순간에 어느 한 세력이
판을 장악한 것이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 시켜 왔던 것이다.
이전에
O, X 문제를 많이 풀었지만
세상은 그런 문제처럼
간단하게 결정할 수 없는 중간의 애매한
자리가 얼마나 많이 있던가.
수학에서도 +와
-중간에 O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에서도 중성자가 있고
생물에서는 중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중도라는 개념은
어느 한 쪽은 될 수 없으나
양쪽을 다 끌어안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엔 모든 기기들이 디지털방식이다.
그러나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초침 사이의 무한히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시간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말고
서로의 장점을 살리는 길이 바로
중심을 지키는 일이다.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은
그 중심을 찾지 못할 때 생겨난다.
세상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도 많지만
더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주지하고,
그 중간에서 자신의 길을 찾을 때
행복의 파랑새는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이렇게 중간의 자리를 찾았다면
그 자리에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만드는 것은 양극화의
희생물이 아닌 특별한 축복의 생을
살게 한다.
‘남미’하면 나는
축구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 다음으론
‘남미처럼 하면 망한다.’는 인식이 있다.
물론 칠레는 성공했고
멕시코는 중간 정도로 갔지만
아르헨티나는 완전히 망해 버렸다.
우리보다 경제력 강국이었지만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에 따라
여론에 의한
대중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노동자의 고임금과
복지비 부담으로
엄청난 부채가 지금의 빈국을 만들었다.
민중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었기에
국민의 뜻을 중시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우파든 좌파든
한 마디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더 근본적인
실패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연예인들을 우상시하여
자신의 자아를 그들 속에서 찾고 있는
철부지 청소년처럼
아르헨티나는
중산층이 몰락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부강한 유럽국가인 줄 착각하여
허세만 부리며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했기에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남자다 여자다’,
‘극우다 극좌다’ 이러고 있을 때에
중간의 목표로서의
자기 역할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종속 속에서도
그들이 아직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미국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자기색깔이 너무나 강렬한
남미문화가 있기에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어느 한 쪽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중간의 자리에서
자신의 독특한 칼라를 알고
이제 그것을 브랜드 화 할 수 있는 것이
양극화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얼마 전에
풍운의 정객으로 불리는
김종필 전총리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남긴
족적에는 명과 암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름대로
소신 발언을 했었다.
외신에서도 그에 대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끈 주역으로
소개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통해 인생은 2등도 필요하다는
남 다른 의미가 되새겨졌다.
그의 손에서
세 사람의 대통령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본인은 평생
2인자로 살아오면서도 만족했는데
과연 조국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공을
후세는 어떻게 기록할지 모르겠다.
한 평생
내각제를 평생 목표로 추진했건만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인생의 도리로 삼았다는
사무사(思無邪)는
어쩜
인생이나 정치나
관용과 타협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은 정치와 또 다르다.
정치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책임의 한계가 있지만
인생은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자신의 분명한 목표를 정해놓고
달성하기만을 원하는
인생에는
정치와는 차원이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돌이킬 수 없다.
인생 최후 보루를 밟기 전에
중간 봉우리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중간목표들을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속도를 조절할 줄
여유 있는 중간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내 인생 최종비전을 위하여
자신이 디자인하는 중간목표는
이분법이 아닌
다분히
이타적인 길이어야만 한다.
2018년 7월 19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이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아굴라님, 이요셉님
경포호수http://cafe.daum.net/peter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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