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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올드보이를 위한 변명
경향신문 원문 l 입력 2018.08.14 20:49 l
이해찬, 정동영, 손학규. 마침 시민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들이 동반 복귀했다. 이 시점에 이들의 등장이 바람직한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김진표는 포함하고, 송영길은 제외한 채 올드보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한국 정치의 문제를 이들에게만 따져 묻는 것이 공정한 일인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올드보이론은 세대교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다음 세대가 없다. 386세대라는 송영길만 해도 내일모레 환갑이다. 386세대는 이미 기성세대이자 주류다. 그렇다고 3040세대가 치고 나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에는 3040세대가 없다. 세대교체? 하고 싶어도 못한다. 정치활동 금지법 때문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활동 금지법은 김대중·김영삼 등 특정인을 겨냥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 노골적이었다. 그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날 이름을 바꾼 정치활동 금지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저인망식이다. 게다가 교묘하게 분산되고 감춰져 있다. 나름의 논리도 있다. 그래서 오래간다. 선거법을 보자. 후보·정책에 관한 평가, 찬반 의사 표명을 막는 조항이 넘친다. 소선거구제는 새로운 정당, 소수당의 성장을 막는다. 가히 선거 참여 억제법이다. 노회찬의 비극을 부른 정치자금법은 죽음의 법이다. 신인, 원외 정치인은 정치자금 한도에서 차별받고, 후원회도 두지 못한다. 20대의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는 기탁금 5000만원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했다. 청년 진출 방지법이다.
이런 규제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청년 당원의 씨가 마른 민주당은 청년 나이를 45세로 늘려야 했다. 정당은 자발적 조직이다. 그런데도 정당법은 득표율이 낮다는 이유로 해산을 강제한다. 국고보조금은 거대 양당을 우선 배려한다. 정당 비활성화법이다.
정치활동 규제는 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다. 한국은 OECD국가 중 유일하게 18세 선거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다.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교사·공무원의 정치참여를 전면 봉쇄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당원가입·정치인 후원 금지는 물론 현안에 관한 개인적 의견 표명도 못한다. 민주주의는 자기 통치의 원리에 기반한다. 자신을 구속하는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거 참여뿐 아니라 평소 정당 활동을 하고 현안에 의견을 내고 토론하는 것은 결정의 한 과정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피할 수 없는, 정치활동이다.
그럼에도 학교는 정치 없는 순수의 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교육 현실을 지배한다.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한다는 교육기본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학교는 학생을 정치 문맹으로 만들어 사회에 내보내고, 반정치 문화가 만연한 사회는 시민을 탈정치화한다. 이런 조건에서 공공의 일에 헌신하는 정치를 해보겠다고 꿈꾸기도 어렵고, 꿈꾼다 해도 온갖 정치금지법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학교, 사회로부터 고립된 한국 정치에 피가 제대로 돌 리 없다. 동맥경화증을 앓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정치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고 그럭저럭 유지되는 비결이 있다. 강제 순환이다. 총선만 되면 각 정당은 현역 공천 탈락률이 얼마나 높은지를 두고 경쟁한다. 탈락자가 많을수록 신선도가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 보통 물갈이 하면 절반 정도를 초선으로 교체한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 유별나고 과격한 정치 충원이 ‘자폐 정치’를 은폐하는 데는 쓸모가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 효용은 별로다.
우선 주기적 단절은 정치인이 정치 역량을 차곡차곡 쌓을 기회를 앗아간다. 반복된 물갈이에도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 세대교체 효과가 없다. 20대 국회 초선의 평균 나이는 53세, 정치 경험은 거의 없다. 나이는 많고 정치는 모르는, 늙은 초선이 4년 주기로 집단 등장하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반정치 문화, 높은 정치 진입 장벽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정치를 반기지 않는 나라이니, 정치와 무관한 분야에서 명성과 지위, 부를 쌓은 다음 그걸 디딤돌로 국회의원 신분을 획득하는, 우회로가 불가피하다. 한국에 입신양명형 정계 진출이 대세인 이유이다.
정치로부터 배제되는 시민이 많을수록, 자연스러운 정치순환이 막힐수록, 그걸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강력할수록, 정치는 사회와 단절되고 민주주의의 질은 나빠진다. 그 때문에 시민의 고통은 커지지만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이게 권력이 바뀌어도 실패하기 쉬운 이유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고민하는 우리는 왜 ‘정치하기 좋은 나라’는 고민하지 않는가? 좋은 정치 없이는 나은 삶도 없다. 지금 올드보이가 문제가 아니다.
<이대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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