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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봉쇄 수도원 개원을 앞두고(5) 한국 토속 수도사

수도관상피정 당당뉴스............... 조회 수 222 추천 수 0 2018.08.22 1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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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76 

봉쇄 수도원 개원을 앞두고(5) 한국 토속 수도사

한국 토속 수도사

 6월 10일 충주 봉쇄 수도원 개원을 앞두고 있습니다. 당당뉴스에 7번 연재 글을 올리며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1. 4월 22일 봉쇄 수도원을 세우라.
 2. 4월 29일 이스라엘 수도원 방문
 3. 5월 6일 수도학교 창립
 4. 5월 13일 수도원 건축
 5. 5월 20일 한국 토속 수도사
 6. 5월 27일 타 종교 수도원
 7. 6월 3일  수도의 길
 
한국 토속 수도사


 자연을 사랑하는 이와 돈을 사랑하는 이가 같이 걷고 있었습니다. 귀뚜라미 소리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듣는 데 다른 사람은 듣지 못 하였습니다. 500원짜리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듣는 데 다른 사람은 듣지 못 하였습니다.

 일본 유명한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23% 오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의사들도 놀라고, 일본 국민들도 놀랐습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하며 놀랐습니다.
 “그것밖에 안 되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 놀랐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의사도 그렇게 많이 오진하나?”

 봉쇄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면서 두 가지 반응입니다.
 “시대적 요청이다. 정말 멋지다. 같이 하자. 크게 감동받았다.”
 “시대에 맞지 않다. 착오다. 비난한다. 잘 난 척하지 말라.”

 내가 수도원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을 신비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는 바티칸입니다. 인구 1000명입니다. 두 번째 작은 나라는 아토스 자치국입니다. 지금까지 안 보이던 아토스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전 국민이 2,000명인 데 모두 수도사입니다. 모두 남자입니다. 여자는 한 명도 없는 나라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리스 영토에 있는 데 그리스 여왕도 못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수도한 소티리우스가 나를 초대하여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10여명을 소개하여 주었습니다. 7월 3일 입국하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4명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스어 통역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야보고가 걸었던 산티에고 800 km도 걷고 들어 올 예정입니다. 거의 2천년 동안 일년에 10만명이 걸은 길입니다. 같이 가실 분은 지금 신청하셔도 됩니다. 산티에고 순례 길은 7명이 걸을 예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토속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숨어 살고 있는 많은 수도사들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고 교제하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도에 대한 책을 싹쓸이하여 손에 들어오게 하시고 내 손에 들어 온 책은 모두 읽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일찍 수도원 영에 접하였으면 목사의 길을 걷지 않고 수도사의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수도사의 거룩한 영과 자기 절제의 삶 그리고 수도원의 오직 예수의 삶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로마를 하루 본 사람은 볼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달 본 사람은 일년 있어도 다 못 보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겨우 수도원에 대하여 눈을 뜬 정도입니다.


 요즈음은 은퇴하고도 20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투자한 것에 열매를 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시간을 죽이지 말고 선용하면 좋은 끝을 맺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휴가도 없이 부흥회, 쎄미나, 목회 그리고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눈이 오면 겨울인 것을 알았고 꽃이 피면 봄이 온 줄 알았습니다. 봉쇄 수도원을 잘 이루어 한국 강단에 바쳐야겠다고 주님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수도원 91개를 돌아보면서 한국 수도사 3명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수도원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에 전혀 몰랐습니다. 나도 그 분을 그 곳에서 만나고 놀랐지만 그 수도사도 나를 보고 경악하였습니다. 나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그들은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여기 오셨나요? 한국 사람은 전혀 오지 않는 곳입니다.”
 서로의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자체 하나만으로도 금방 정겨워졌습니다. 무엇이나 물을 수 있고, 어떤 물음에도 진솔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있는 것 모두 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분이 모두 전라도 사람이었습니다.
 “전라도와 수도사는 관계가 있을 것일가?”
 이 때부터 생긴 질문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전라도를 눈 여겨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서히 해답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전라도가 한국 토속 수도원의 뿌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광 수도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토속 수도원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이 주변을 발이 닳도록 다니며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선교 초기 호남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과 아픔을 치유해 주었던 오웬 Clement C. Owen(1898-1909), 포싸이트William H. Forsythe(1904-1912), Robert. M Wilson(1908-1949), 쉐핑Elizabeth J. Shepping(1912-1934), Herbert A. 카딩톤Codington(1954-1974), 루트(Florence E. Root 1928-1978 유화례),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들이 복음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생명, 권위, 지위, 고국 그리고 안락를 버리고 호남인들의 삶에 들어와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정(情)에 굶주린 호남인들은 기독교에 호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차 종찬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의료선교사들이 보여준 삶은 기독교의 선교를 단순한 ‘전달’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면서 한국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아픔을 느끼면서 한국인들의 상처를 싸매어 줌으로써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호남인들은 ‘나 혼자만이라도’ 나의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여 함께 나누고 싶어 하였습니다. 치료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 유형의 신앙과 삶의 신행일치(信行一治)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거룩함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호남인들은 그렇게 살도록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토양에서 전라도에 예수님을 닮은 많은 수도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찾아다니며 발로 수집한 수도사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영길 수도사, 이 세종, 이 현필, 최 흥정 그리고 방 애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1. 이 영길 수도사.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는 236년입니다. 그 동안 신부가 목사된 분이 둘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화순에 살고 있는 정 훈섭 목사입니다. 그 분을 통하여 이 영길 수도사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는 전남 화순 화학산 속에 10년 동안 하루에 한 끼 먹으며 수도하고 있습니다. 84년만에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는 2016년 5월 정 목사를 만나 같이 이 영길 수도사를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핸드폰 전파가 오지 않는 깊은 산이었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풀숲이었습니다. 길이 없어서 만들어 가며 걸었습니다. 비 오듯 하는 땀을 씻어 냈습니다.
 조그만 집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6.25때 공산당이 이 곳에서 수도하는 가족을 몰살시킨 순교터였습니다. 초라한 옷을 입고 하루 한 끼 먹으며 살기에 바짝 마른 이 영길 수도사를 만났습니다. 밖에 다 찌그러진 의자가 한 개 놓여져 있고 그 옆에 수도책들 10여권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조그만 솟 하나, 쌀통 하나, 그릇 두어 개가 전부였습니다. 마당에는 콩이 흙을 들추고 나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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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길 수도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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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학산 속에 이 영길 수도사

 
  어려서 의정부 감리교회 다녔습니다. 떼제 공동체에서 영세를 받았습니다. 이태리 수도원, 러시아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보성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감람산 수도원(Little family of resurrection)에서 20개월씩 2번 살다가 나와 은수자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감람산 수도원에서 수도한 추억이 가장 큰 것 같았습니다. 수도생활 27년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하였습니다.
 “내가 수도원을 세우고 있는 데 충주로 가셔서 저와 함께 지내시지 않으렵니까?”
 “안 됩니다. 수도가 끝나야 이 산에서 나갑니다.”
 “언제 이런 수도생활을 끝내겠습니까?”
 “두 가지가 완성되면 수도생활을 끝내겠습니다. 하나는 내 마음에 음란이 사라져야 합니다.

 “이 산속에서 여자를 본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음란의 영이 끊어지지 않았나요?”
 “네.”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요?”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십자가만 생각하면 한 시간에 한번씩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벌써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나는 여행을 좋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 버려야 합니다. 밖을 버리지 못 하면 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와 수도생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무게감을 느끼는 신중한 언어, 깊은 영성에서 조금씩 꺼내 나에게 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이었습니다. 너무나 말을 막하는 경박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말을 꺼내어 씹어 조심스럽게 나오게 하는 반추 동물의 되새김질 언어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 버립니다. 그리도 뒤를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너무나 대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코람데오로 자기를 완성하고 나오겠다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고 산을 떠났습니다.

 

 2. 이세종 수도사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세워진 토속 수도원은 동광 수도원입니다. 나처럼 수도원을 공부하고 세운 수도원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면서 수도하다가 보니 수도원이 된 토속 수도원입니다. 이 세종이 뿌리입니다. 이 현필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세종 고향, 이 현필 생가부터 발로 밟으며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2박 3일 일정으로 머물렀습니다.
 이 세종의 제자 한 영우 장로님은 89세입니다. 이 현필의 제자 김 금남 동광원 원장님은 90세입니다. 두 분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직접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육성을 들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더 고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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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광수도원 김 금남 원장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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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종 제자 한 영우 장로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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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종 생가


 이 세종은 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기운이 감돌고 있는 1877년 7월 1일 무등산 자락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서 공부를 하지 못 하였습니다. 머슴살이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등광리에서 최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40세가 되도록 아이가 없었습니다. 무당의 권유로 산중턱에 신당을 짓던 중에 신당을 짓는 목수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이 세종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한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모아 놓고 차용증서 모두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며 말했습니다.
 “모두 탕감합니다. 안 갚아도 됩니다.”
 물건을 빌려가고 쌀을 꾸어간 이들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다 그냥 가지십시오.”
 세리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고 자신의 재산 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놓았습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읽자 말자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재산의 반을 면장님에게 주면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남보다 좋은 옷을 입으면 교만하여 진다고 하면서 항상 검은 옷만 입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생길 것 같아서 항상 눈은 반쪽만 뜨고 다녔습니다. 먹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거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잔치 집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을 때가 있겠지요? 나는 주님의 은혜를 안 날부터 지금까지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생활은 사실상 거지보다 못 한 생활이었습니다. 아내가 견디다 못 하여 다른 남자를 사귀고 가출하였습니다. 며칠 후 이 세종은 가출한 아내를 찾아 갔습니다. 아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왔어요? 나 망신주려고 왔소?” 문을 닫고 들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세종이 말했습니다.
 “이 남자와 살다가 못 살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 와요.”
 이 세종은 수없이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이키고 돌아 오도록 종용하였습니다. 후에 아내는 남편 이 세종 묘에서 3년 떠나지 않고 풀을 뜯어 먹으며 회개하였습니다. 철저히 회개하면서 죽기까지 바로 누워 자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을 중심으로 동광 수도원이 세워졌습니다. 나는 그가 태어난 곳, 살던 곳, 기도하던 곳, 묻힌 곳 모두를 돌아 보면서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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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종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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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종 기도처

 

3. 이 현필 수도사


 이 현필 생가에 앉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현필 선생은 191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권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농부로서 평생 농사일에 전념하였습니다. 7세 무렵 서당에 다니며 <학어집>, <추구>, <사자소학> 등을 읽으며 학문의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학문을 매우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곧 학업을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풀을 베어 소를 먹이는 등 집안 일을 도왔습니다.
 11세 되던 1923년에 ‘천태의숙’이란 사립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2년 뒤 공립학교로 승격 되어 일본인 교장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4년 과정을 마친 후 15세 되던 1927년에 비아학교로 전학하였습니다.
 5학년이 되었으나 1학기만 마치고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하여야 했습니다. 학교 성적은 항상 우등이었습니다.
 이 때 이 현필이 보고 느낀 세상은 온통 거짓과 음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결백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잘 먹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몸도 허약하였습니다. 더구나 막내로 태어나 형들 때문에 옷도 형들이 입던 옷만 입었습니다. 새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어서 장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슴, 소사, 품팔이등 닥치는 대로 하였습니다. 17세 되던 1930년 정월 보름날 그는 이웃집 할머니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처음 교회 마당을 밟았습니다. 세상에는 만남의 축복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남으로 디모데가 되었습니다. 아론은 모세를 만남으로 자기를 실현시킬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이 현필은 이 세종을 만남으로 이 현필이 되었습니다.

 이 현필 선생의 믿음의 계보는 이 세종, 최 홍종 목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최 홍종 목사는 윌슨, 포싸이트 등 의료선교사들이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고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내가 믿는 예수는 저 선교사들이 믿는 예수와 다른가?”
 그 후 그는 나환자들을 데려다 자신의 임야에 처소를 정하고 함께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여수 애향원의 시작입니다. 후에 손 양원 목사님이 그 곳에서 사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그 곳에서 죽었고 묘가 지금도 그 곳에 있습니다.

 이 현필은 스승 이 세종이 독신으로 사는 것을 보고 아내와 해혼(解婚)하였습니다. 결혼하고 2년 좀 넘어서였습니다. 아내가 동의하여 주지 않아서 한동안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해혼후 이 현필은 화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청소골 마당바위위에서 기도에 전념하면서 수도의 길을 닦았습니다.  산기도 생활로 육체는 쇠약하여져 있었습니다. 발에는 동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화학산에서 3년, 지리산에서 4년 바위위에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모인 곳이 동광 수도원입니다. 그의 제자 오 복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나요?”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빌어 먹으라.”
 거지가 되라는 말입니다. 삼박자 축복을 받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일체 세상만사를 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현필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머리도 빗지 않았습니다.
 옷도 빨아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맨발로 다녔습니다. 체면이고 부끄럼이고 전혀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취해서 찢어진 바지가랑이도 기워 입지도 않고 움켜쥐고 다녔습니다. 그야 말로 거지 중의 상거지였습니다.

 그이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늦가을이었기에 코스모스가 뜰에 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나는 맨 발의 성자 이 현필을 생각하며 활짝 핀 코스모스 씨앗을 받았습니다. 충주 수도원 뜰에 심었습니다. 우리 수도원 뜰에서 이 현필의 영성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싹이 예쁘게 올라와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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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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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필 방에서

 

 4. 최 흥정 수도사


 이 현필에게 영향을 준 분이 최 흥정 목사입니다. 그는 1880년 5월 4일 광주시 불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66년 5월 14일 86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기 전 별명은 <최 망치>였습니다. 술, 여자 그리고 주먹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제일 먼저 할 것은 거세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욕이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세 후에도 성욕은 그대로 발동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거세를 해도 성욕은 여전해.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수술했어. 하늘나라는 금욕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는 곳인 것을 거세하고 알았어. 하늘 나라는 무릎으로 가는 거야.”
 거세한 후 그는 자기 호를 오방(五妨))이라고 지었습니다.
 색욕, 식욕, 명예욕, 물욕 그리고 생명욕 으로부터 자유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사에는 방만, 사회에는 방일, 경제에는 방종, 정치에는 방기, 그리고 종교에는 방기를 금한다는 뜻입니다.
 5가지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늘 말했습니다.
 큰 아들 득은이는 아버지가 이렇게 사는 것을 보고 반대로 자기 호를 오취(五取)라고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버린 5가지를 자기는 취하겠다는 뜻입니다. 후에 아버지 뜻을 알고 회개하였습니다.
 
 최 목사는 거친 바람이 세차게 몰아 부는 밤중에 무등산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들고 외쳤습니다.
 “주여!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 헛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되게 살아 온 것은 아닙니까?” 해가 떠오를 때까지 밤을 지새우며 몸부림쳤습니다. 아침에 하산한 그는 “사망 통지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사망통지서

 

  1935년 3월 17일 이후 나 오방 최 홍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 홍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로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 주시기 바라오.   나 최 홍종은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속으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바랄뿐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명단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가정에 대하여 방만자,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 국사에 대하여 방기자,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 소위 오방을 제창하면서도 명실이 불합한 가면이 왕왕 연출되어 양심상 사이비한 생활을 절실히 참회하고 무익한 죄인이 세시에 관여하는 것은 유익보다 폐해가 더 될 것을 각오하므로 십자가의 구주 예수만 신뢰하고 범사에 예수의 교훈으로 생활할 것을 맹약하고 이제는 생사간에 예수 이외의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상에 대하여 사망자가 되어 스스로 매장한 것이 외다.
 가족적 행열에서나 윤리적 예의에서나 사회적 규범에서나 제외자요, 黜陟者요, 廢棄者로 인간사회에 무용의 일종 폐물이오니 자금 이후로는 사망자로 인정하시고 모든 관계와 통신을 단절하여 주심을 통고하나이다.


1937년 1월 오방 최 홍종 謹告


 주변 사람들은  최 홍종 목사가 자살하려는 것인 줄 알고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무슨 사연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모든 인연이 끊어졌으니 앞으로는 나를 아는 체 하지 마십시오. 어서 돌아십시오.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목사님! 사망 통보서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까?” 최 목사가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내가 감상적으로 수도사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고 싶은 것뿐이네.”
 그 후 최 흥종 목사는 무등산 오방정에 은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최 흥종이 손수레를 타고 광주 시내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손수레에서 자면서 나환자, 거지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거지들의 아버지” “나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흉내 내는 정신병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의 손수레가 나타나면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있었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이 와서 집으로 가자고 끌었지만 결코 가지 않았습니다. 옷을 주면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나에게 남편이라고 말하지 마시오.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나에게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형제요 자매다. 내게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다. 모두 하나님의 식구다.”
 어느 날 그는 다시 무등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곳에서 폐결핵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1961년 봄 아내가 80세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최 흥종 목사는 산에서 잠간 내려와 아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많이 했소. 주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실 것이요. 나도 곧 따라갈 터이니 먼저 가서 기다리소.”
 그리고 아내 장례를 치루지도 않고 곧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이제 그는 탈진하였습니다. 큰 아들이 시체 같은 아버지 몸을 자기 집으로 옮겼습니다.
“내 나이 86세다. 많이 살았다. 나는 사망 통보서를 내고도 28년 넘게 살았다. 덤으로 산 것이다.” 그는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찬송가를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해맑은 웃음을 얼굴에 담으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최 흥종 수도사에 대하여 사람들은 후에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인 신 경림은 이렇게 최 흥정 목사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오방, 그는 결코 기인이 아니었다. 하나님 말씀을 충실히 따른 기독교인으로, 세속적인 눈에 기인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는 세속적인 의미의 부가가치는 창출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에게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영감과 에너지를 주었다.

 한양대학교 리 영희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의 삶은 시궁창 속의 한 송이 연꽃과 같은 것이었다. 단지 진리를 실천하고 행동하고자 할 뿐 세상으로부터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자 하였다.”

 김 천배 전 광주 YMCA 총무는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그는 성자요. 투사요, 전도사요. 사회운동가였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여러 가지 상충하는 가치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은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범용의 자리에서 선생은 하나의 괴벽, 하나의 모순, 하나의 호사의 권화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의 이 다면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목자’ 라는 명사일 것이다.”

 최 흥종 목사의 손자요 전남대 교수인 최 협은 할아버지는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신 삶을 사셨다. 또한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셨다. 할아버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나, 많은 것을 남겨놓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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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방 최흥정 목사

 

 4. 거리의 수도사 방 애인


 나는 방 애인 선생님을 “수도의 향기”라는 책에서 처음 접하였습니다. 최 두섭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방 애인 묘 앞에서 최 목사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그 묘지에 한번 가보고 싶다.”
 마침 전주 수양산 집회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주 배 기남 장로를 만나서 부탁드렸습니다. 그가 완벽하게 나를 인도하여 주었습니다. 방 애인을 잘 알고 있는 최 창선 장로님을 찾아 대기하게 하였고, 방 애인 묘를 찾아 두었습니다.
 
 1933년에 세운 묘비가 약 90년 동안 비바람을 맞은 흔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초라한 묘지앞에는 비문이 검은 돌에 가지런히 쓰여져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 관리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러웠습니다. 배 기남 장로가 풀 베는 낮을 가지고 와서 묘지를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서문밖 교회로 갔습니다. 그의 생애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방 애인은 황해도 황주읍 벽성정에서 1909년 9월 26일 출생하여 전주에서 일하다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례는 온 전주가 합하여 드렸습니다.
 방 애인은 호수돈을 졸업한 후 그 해 1926년 4월 1일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사회생활에 첫 걸음을 이었습니다.

 처녀 선생님으로서 전혀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향수는 물론 크림조차 얼굴에 바르지 않았습니다.
 옷도 한 벌 가지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값진 옷감이나 멋있는 옷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오직 기도, 오직 성경, 오직 전도, 오직 예수의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병든 자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슬픈자에게 다가가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거지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싸우는 자에게 다가가서 화평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불평이 없는 온유한 선생님, 거만이 없는 겸손의 성도, 꾸밈이 없는 청빈의 시민, 그리고 항상 정직하고 누구나 사랑하는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산속 깊은 곳의 수도사가 아니라 거리의 성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청빈과 거룩과 순복을 생명으로 여기는 수도사로서 삶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작은 예수님 같았습니다.
 성경적 생활의 모델 같았습니다.
 산속에 숨어 있는 수녀가 아니라 학생 속에 성자요, 사회 속에 등불을 비추는 성녀요, 그늘진 곳에 서광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도피하는 숨은 선지자가 아니라 세상에 희망을 주는 신앙적 낙관의 성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제자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죄인을 책망하는 매서운 선지자가 아니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는 눈물의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방 애인은 미모를 지닌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남자들의 유혹과 청혼이 줄기차게 몰려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을 위하여 몸바쳐 살기로 작정한 후부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방 애인이 결혼하지 않기로 한 마음이 바위같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친구들을 통하여 또는 부모를 통하여 청혼을 하였습니다. 청혼이 올 때마다 그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집가면 무엇하나요?”
 그래도 집요하게 요청이 오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24살의 아까운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방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주 전역에 퍼졌습니다. 고아, 창녀, 기생, 걸인들이 만장을 들고 장례식에 모여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부르짖는 학생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목메어 부르는 고아들의 부르짖음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갔습니다. 펄럭이는 만장이 1km 늘어섰습니다. 온 전주가 떠들썩하였습니다. 전주 전체를 울리는 장례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공동 묘지에 안식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토속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성경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친 토속 수도사들이 많습니다. 한 명 한 명 발굴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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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애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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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애인 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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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애인을 잘 알고 있는 최 창선 장로와 함께

 

수도원 운동에 반대 이론


 수도원 운동은 성경과 반대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피하여 사막이나 산속이나 동굴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둔 수도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성경의 전통과 어긋난다.
 성경은 은둔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가나안에 들여보낼 때에는 수도원적인 삶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욕과 고행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수도원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은둔은 박해받던 시대에 나타난 산물에 불과합니다.


 2. 정통 교리에 어긋난다.
 정통교리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세상 속에서 사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순교하는 것이 성경적 전통입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반 그리스도적입니다.


 3. 닫힌 길이다.
 수도원 영성은 누구나 갈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이 아닙니다.  금욕의 길, 은둔의 삶은 보편적인 삶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그림의 떡은 배고픈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 속에 불로는 밥을 지을 수 없습니다. 참 진리는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세상 속에서 있어야 합니다.


 4. 현실과 무관하다.
 은둔은 세상을 등짐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해지기 위하여 은둔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 발을 닦아주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죽어가는 영혼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수도원 운동은 <은총의 종교>를 <행위의 종교>로 전락시켰습니다. <타력 신앙>을 <자력 신앙>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바리새파형으로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 수도원 운동이기에 수도원 운동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수도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1. 수도원은 구시대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추구이다.
   2. 수도원은 천주교 전통이 아니라 성경적 모델이다.
   3. 수도원은 도피가 아니라 세상 포용이다.
   4. 수도원은 사람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접근하는 것이다.
   5.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잊혀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6. 수도원은 무의미가 아니라 영원을 찾는 순례이다.
   7. 수도원은 세상을 등짐이 아니라 기도의 화력을 일으키는 기도 발전소이다.
   8. 수도원은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부요 창고를 건설하는 것이다.
   9. 수도원은 외적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내적 전쟁터로의 참전이다.
  10. 수도원은 영적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겸손자가 되는 것이다.
  11. 수도원은 체험 추구가 아니라 조용한 침묵을 통한 자기 완성이다.
  12. 수도원은 매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13.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 이방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식구가 되는 것이다.
  14. 수도원은 세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을 받는 것이다.
  15. 수도원은 자기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움이다.
  16. 수도원은 혈연 가정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가정을 건설하는 것이다.
  17. 수도원은 현실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보는 것이다.
  18. 수도원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오아시스에 머무름이다.
  19. 수도원은 육적 생활의 기피가 아니라 영적 보화의 탄광 개발이다.
  20. 수도원은 고행이 아니라 자유함이다.
  21. 수도원은 입술의 떠남이 아니라 귀 사용의 시작이다.
  22. 수도원은 세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듣지 아니하려함의 침묵이다.
  23. 수도원은 울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라 웃으면서 머무는 안식처다.
 
 한국 교회는 지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다시 상향 곡선으로 바꿀 수 있는 대안중에 하나는 수도원 운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이미 축복하고 계셨습니다. 토속 수도사, 토속 수도원들이 많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이런 은총은 앞으로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 선교사 일등 국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미에 드리는 글


 지금이 5편입니다.  7편의 글은 이미 출판중입니다.
 7편이 당당 뉴스에 실리는 순간 출판될 것입니다. 수도원 개원 예배 기념입니다.

 “천국을 미리 사는 봉쇄 수도원”

 이런 제목입니다. 정말 부족하고 모릅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실수가 많습니다.
 격려는 용기가 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조언과 진심의 충고는 양약이 되고 있습니다.
 악성 댓글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똑바로 하라는 채찍이기 때문입니다. 잘 하겠습니다. 내게 던지는 돌을 주워 모아 담을 잘 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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