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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뻔뻔으로 가지 않게

예레미야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69 추천 수 0 2018.09.19 18: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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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6:9-1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12-26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부끄러움이 뻔뻔으로 가지 않게

렘6:9-15

 

지난주에도 시 두 편 나누었는데 오늘도 윤동주의 시로부터 설교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이 되는 시인은 이 시를 쓰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거기서 사망했습니다. 한 번 그의 마지막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오늘 우리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시인은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을 ‘부끄럽다’고 합니다. 우리네 삶으로 치자면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사는 삶’이 이에 대응될 것인데, 아무 문제없이 편하게 살면 그걸 신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지 않고 되레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혹은 신앙인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인품의 사람일까요? 어떤 영성을 지닌 신앙인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울 같은 윤동주의 시를 한 편 더 알고 있습니다. 세 살 박이 아이부터 여든의 노인까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는 서시(序詩)가 그것입니다. 여기서도 시인은 ‘부 끄러움’을 시의 주요 언어로 쓰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인생이 살기 어렵다는데, 자기는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은, 남들은 살기가 고생스럽다는데 자기는 고생하지 않고 사는 걸 부끄러워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인생관을 죽는 날까지 유지하며 하늘에 부끄럼 없기를 괴로워하며 빌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인의 부끄러움은 단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현실인식과 시인의 작품 세계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변화시킬 수 없는 무거운 현실과 시대처럼, 무기력하게 아침만을 기다리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실망한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그러면 그 [부끄러움]이라는 게 일제시대 때 윤동주라는 시인에게만 국한된 자기윤리일까요? 그저 그 생각을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지고, 가슴이 뛰면서, 한없이 후회되는 그런 부끄러운 기억은 시인만 갖는 것일까요? 아니죠,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지난 삶의 한 꼭지와 같죠. 흥미로운 것은 부끄러움의 한자말 ‘수치(羞恥)’가 ‘바칠 수(羞)’, ‘부끄러워 할 치(恥)’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워 할 치’자를 보면 마음 심(心)과 귀 이(耳)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끄러움은 ‘마음에 달린 귀’와 관계가 있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하나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오는데, 그 목소리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지시한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것이 ‘마음에 달린 귀’ 즉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에서 들리는 선한 목소리, 근원적인 목소리를 따르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성서속으로 부끄러움의 문제를 옮겨서 ‘우리’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성서는 부끄러움을 공개적으로 모독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시44:15에 말합니다. 또 부끄러움은 뉘우침으로 인도하든지(에스겔39:26), 아니면 뻔뻔함으로 인도한다고도 되어 있습니다(렘6;15).그러면 성서에서 부끄러움이 뻔뻔함으로가 아니라 뉘우침으로 인도하여, 마침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도’가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롬1:16).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리낌으로 알았던 유대인,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은 어리석은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고전1:22-23).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왕권의 회복을 메시아에게 기대하던 유대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스캔들(거리낌)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지혜는 ‘자신을 아는 것’이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기에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나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저주받은 자의 죽임이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자의 죽임이기에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서 십자가형을 당한 그리스도는 왕조창건의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 수호신을 섬기고 마침내 황제를 신격화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낯설고 어리석은 인물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예수와 그의 삶과, 그의 언동에 부끄러움을 가졌습니다. 치졸하고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부류들을 척결하는 것이 자기에게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뻔뻔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처단하였습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해서 부끄러운 생각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부끄러움을 뻔뻔함으로 계속 포장하지 않고 자신을 벗겨 뉘우침의 자리에 섰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치졸하도록 부끄러운 처신을 한 게 아니라, 자기를 낮추어 인간이 된 하나님이며, 모든 믿는 사람을 차별 없이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뉘우치고 뻔뻔함(당당한 혹은 당연함)을 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는, 기독교인은 이걸 잃어 버렸습니다. [부끄러움]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뻔뻔한 기독교가 되었고, 뻔뻔한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뻔뻔한 목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부끄러움이 애초에 없는 사람들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을 갖고 교회를 드나드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이제 드디어 세금을 내게 되었습니다. 말이 많습니다. 뻔뻔하게 ‘목사는 거룩한 성직자라 세금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이 이런 교회와 기독교를 지탄합니다. 예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은 이 외에도 수 만 가지나 됩니다. 이런 부끄러움의 자리에는 ‘회개’로 가던지 ‘뻔뻔함’으로 가던지 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이미 한국교회와 교인들은 ‘뻔뻔한 길’에 들어선 거 같습니다.

 

예수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교회가, 예수처럼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예수와는 반대의 삶을 살도록 교인들을 가르칩니다. 이는 우리 스스로 예수를, 복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의 언동과 삶 즉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만이 권력과 세상의 뻔뻔함을 심판할 수 있는데, 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교회가 스스로 복음을 부끄럽게 만들면 과연 누가 교인의 삶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 것이며, 누가 교회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해의 마지막 드리는 말씀은, 부끄러운 줄 알자는 겁니다. 그리고 뻔뻔하게 낯짝을 내밀며 살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부끄럽지 않은 교회로 살아가길 결심하자는 겁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들으면서 한 교회의 일원으로써,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낯이 뜨거워지는 ‘부끄러움’이 역류하는 이가 있다면, 뻔뻔함으로 넘어가지 않게 단도리를 잘 하고 새해를 살겠다는 결심을 하나님께 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부끄러운]사람으로, 부끄러움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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