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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춤을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48 추천 수 0 2018.09.19 18: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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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01-08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예수와 함께 춤을

막1:17

   

지난주일 오후에 예배에 참석했던 교우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오늘,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종소리 하나 들었습니다. 감사!’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유투브 동영상 한편을 보냈는데, 그걸 보다가 오늘 설교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교 문을 쓰는 도중에 오래전에 하나님께로 간 고 김은희 집사 생각도 났습니다. 집사님이 살아생전에 ‘삶이 놀이였던 예수’라는 설교를 하다가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라는 말을 했더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에 일어나는 ‘놀이와 학습’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내게 보내 주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들 두 분에 대한 회상과 답례의 설교가 될 거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의 족보 맨 마지막구절입니다. 이 족보는 예수의 족보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 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슈퍼 히어로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터미네이터 람보와도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다윗 아닙니까. 저는 예수를 유대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력한 왕으로 존재했던 다윗과 연결시키려는 마태저자의 의도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이런 저의 해석에 갇히는 성서는 아닙니다. 왜 마태의 저자가 굳이 예수를 다윗과 연결시키려 했을까, 물론 지금 앞서서 한 설명이 가장 근거 있는 주장이겠지만,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설사 마태의 저자가 예수를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 다윗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손 치더라도, 여러분 함부로 이런 해석과 결정들에 동의하지는 마십시오. 마태의 의도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마태복음을 읽는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진리해석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so What?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 며 따지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마태를 보겠다”, 라고 우기는 태도가 어쩌면 성서를 더 풍부하게 보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천 개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마태복음 1장1절부터 17절까지 나오는 예수의 족보 중 맨 마지막에 족보를 정리하는 문구입니다. 밑에 있는 예수의 족보를 빠르게 스캔해주십시오.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제가 밑줄을 그어놓은 인물들이 보이시나요. 이들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이방의 여인들입니다.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은 다말, 창녀 라합, 과부로서 재가한 롯, 다윗은 유부녀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얻었습니다. 마리아는 저주받은 땅 갈릴리 출신의 여인입니다. 왜 그동안의 신학은 예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을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교회의 남성 목회자들이, 그리고 신학교의 남성 신학자들이 예수를 단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 왕조의 합법적인 후손임을 강조하기에 급급해서 족보에 명시된 여자들을, 이러한 훌륭한 예수의 혈통에 걸림이 된다고 생각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간과해온 때문 아닐는지요.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마태복음 저자의 숨은 뜻을 모르고 속아왔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마태의 저자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명문가의 전통에 예수를 위치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타자 중의 타자, 호모사케르(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존재) 중의 호모사케르, 민중 중에서도 가장 미천한 자의 후손으로 예수를 배치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는지. 고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 철저한 율법주의 속에 이방인, 완고한 엄숙주의와 순결주의 속에서 불륜에 휩싸인 여성들을 통해 예수의 족보가 이어졌고, 그 불순함과 비극과 불결함과 불륜의 결정판이 예수였다, 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 때문에 당대의 절망과 실의와 낙담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고 친근하고 희망적으로 예수가 먹힐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물론 마태복음은 그것을 전면에 내걸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당시 마태복음을 읽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렇게 읽었으리라 보고, 그래서 마태가 전한 글이 복음이 되었던 것이 아닐 런지요.

 

하지만, 이 해석이 오늘 제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주제는 아닙니다. 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다윗의 연결점을 찾아야 할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저는 예수와 다윗을, “...민중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그런 거대서사의 완성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투쟁하고 고투하는 왕의 이미지가 아닌,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이 아닌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정치가로서의 다윗은 뱀같이 지혜롭고 독수리같이 날카로 왔던 현실 정치인이었습니다.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에의 의지가 충만했던 현실정치가 다윗에 대해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치가로서의 다윗에 대해 저는 별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무척이나 매력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그는 혜성과도 같이 등장한 이슬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양치기 출신인 그는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 용기와 지혜와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사무엘상 6;12 에 보면 다윗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솜씨도 출중했죠. 수금을 치는 솜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왕이 있는 궁에 들어가 사울의 궁중 악사가 되었겠습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당대 최고의 딴따라가 다윗이었던 셈이죠. 더군다나 그는 말까지 잘합니다.(삼하 6:18). 그뿐 만이 아니라, 시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풍류에 능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정열적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에서 저는 호모 루덴스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계층의 사람과도 막힘없이 어울렸던 예수의 삶을 회고할 때 저는 예수가 근엄하고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열일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죽 놀고먹었으면 그의 별명이‘먹보에 술꾼’(마11:19, 눅 7;34) 이었겠습니까. 그 별명이야 말로 예수가 지니는 호모 루덴스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 주변에는 여성과 어린이, 세리와 창녀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있었더라도 호모 파베르(노동하는 인간)적인 인간이었다면 그처럼 예수 주변에 사회적 약자들이 모였을까. 기계적인 위로와 치유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자신들의 아픈 마음과 경직된 상황을 녹이는 매력이 예수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유독 예수가 어린이를 환대하는 장면이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마9:14, 막 10:14, 눅 18:1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 왜 어린이일까요? 내가 보기에는 어린이야 말로 진정 100% 전심과 전력을 다해 놀 줄 아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이야 말로 철저하게 놀이의 주체이고 놀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줄 아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적에 노느라고 밥 때도 건너뛰기도 했던 기억, 로봇 태권 V를 보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 내가 공주가 되기도 하고 왕자가 되기도 했던 기억을 여러분들 간직하고 있지 않나요. 그 시간과 공간이 초월의 영역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제 경우 어린 시절 놀던 때처럼 완벽한 초월의 경험은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낯선 용어 서 너 개를 안내했습니다. 낯 설 지만 모두 인간의 존재적 형편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앞에서 호모사케르(있으나 없는 것과 같은 하찮은 존재), 호모파페르(노동하는 인간)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호모 루덴스(Homo Ludens)즉 ‘놀이하는 인간’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할 용어들입니다. ‘호모 루덴스 1938’는 네델란드의 문화인류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책 제목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놀이’에 두고 다양한 지식을 동원하여 인류의 문화를 놀이적 관점에서 고찰한 책으로, 하위징아는 놀이에 따르고, 놀이에 승복하며,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책이 나왔느냐 하면, 당시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실증적인 과학과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하던 시대입니다. 인간도 과학적 대상으로서, 실증적인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고민한 호이징가가 당대의 지성사적 흐름을 거슬러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래서 나타나는 사람이 레비스트로스고 그가 쓴 책이 ‘슬픈 열대 1955’입니다. 이게 구조주의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깨 인간과 그의 삶을 놀이로 봐야지 과학이나 실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게 구조주의인 것이죠. 구조주의적으로 인간을 바라본다고 함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정체성, 그것을 인간性이라고 합시다. 그 인간성이라는 것의 이데아는 없다는 거죠. 그 인간적인 것이 있다면 play of difference(차이들이 놀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는 인간에 대한 물음의 폭을 넓히는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모 루텐스’가 출판된 해가 1938년이라고 했습니다.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의 나치는 빠르게 독일을 극우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시켰습니다. 1938년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이고, 1939년 독일은 드디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킵니다. 하위징아는 나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반체제 지식인으로 몰려 옥고를 치루고 고생을 하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에 죽고 맙니다. 나치체제 속에서는 오직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만이 통용됩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목표를 향하고 일사 분란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않는 사람은 반동분자라 낙인이 찍혀 제거되고 처단됩니다. 그 나치를 대표하는 인간상이 호모 파베르(Homo Faber, 노동하는 인간)입니다. ‘호모 루덴스’는 ‘호모 파베르’와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하는 인간상입니다.

 

‘호모 파페르’는 산업혁명이후 전개된 근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찍이 푸코는 ‘광기의 탄생’, ‘임상의학의 탄생’, ‘감시와 처벌’ 등에서 근대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체제가 어떤 식으로 노동에 장애가 되는 불필요한 인간들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류하고 배제하는지를 다룬바 있습니다. 자본주의 등장 이후 노동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속에서 ‘호모 루덴스’적인 인간은 노동이라는 신성함에 찬물을 끼얹는 불순한 존재이고, 그들의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일 따름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걸려있는 문구가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였다고 하네요. ‘호모 파베르’적인 인간상을 미화하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유대인을 동원하는 나치에 맞서 하위징아가‘호모 루덴스’를 이야기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분명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서로가 대척점에 서있는 인간상임은 분명합니다.

 

인간을 호모루덴스로 규정한 하위징아의 발언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후에 영향을 끼쳐‘춤추는 신’에 대한 서사를 낳는데 일조합니다. 하버드에 있었던 '샘 킨'(Sam Keen) 교수가 쓴 ‘To a Dancing God 1970’ 입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이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춤을 추기는커녕 온 몸에 깁스를 한 것처럼 경직되어 있고 엄숙하기만 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해 온 독자들에게 샘 킨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춤도 함께 추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현대의 영성가 헨리 나우엔이 타계한 후인 2001년도에 티모시 존스가 헨리 나우엔의 글을 편집해서 ‘춤추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을 냅니다.

 

하위징아에 의하면 진지함과 엄숙함의 건너편에 놀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굳이 아폴론적인 것 대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니체처럼 엄격히 구분 짓지 않더라도, 하위징아의 문제의식은 근대적 이성주의를 바라보는 니체류의 그것과 일면 겹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 돌이켜보니 하나 같이 진지하고 근엄하고 엄숙했던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랬고, 서기관들이 그랬고,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각하고 진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예수와 예수의 적대자들 사이의 차이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일 수 있고, 가벼운 놀이정신對 진지한 엄숙주의 간의 대결 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놀이하는 인간이기를 망각한, 시종일관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한 역사는 그 끝이 야만과 광기와 혐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고, 나치가 그랬으며,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또한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 개신교 만큼 엄숙하고 열일하고 근엄한 집단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한국개신교 만큼 타자에 대한 혐오와 광기로 가득한 집단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한 해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노는 일,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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