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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라!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2 추천 수 0 2018.09.19 18: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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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22-3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01-18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먼저 하라!
눅12:22-34

 

오늘 우리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하늘의 새와 들의 꽃처럼 살아라’하시는 말씀의 저의와,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 마음에 앉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 말씀을 들을 때 대충 아는 것처럼 합니다. 그러나 새나 들의 꽃처럼 걱정하지 말고 살라는 말씀이 좋기는 하지만 현실에는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뒷부분에 가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그만 눈길을 떼버리죠.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갑니다. 구약성서는 이런 피조 세계의 생기 넘치는 찬사들로 가득합니다. 피조 세계 안에서는 서로의 필요가 서로를 돌보게 합니다. 먼저 시104년 10-20을 보세요. 생명 세계를 먹이고 지탱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새, 땅에 짐승, 바다에 물고기를 만드신 후에 큰 기쁨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는 겁니다(창1:12).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이렇게 만든 창조세계가 지속적으로 번영하고 창성하게 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창1:28-29에 나오죠? 그렇게 창조된 세계를 인간들이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셨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조 세계는 인간에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이 세계의 번영이 달려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으니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했던 것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해야 했던 책임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앞에서 말한 ‘하나님께 의존하여 서로 어울려 생명을 이어가는’나라가 ‘그의 나라’ 이고 ‘그 일을 인간에게 맡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들이 의존하여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축복과 격려의 말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2)’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서 38:39-39:8에 나오는 대로, 자연 세계가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의 원리를 본 것이 아니라, 사자와 까마귀를 먹이고 새끼 사슴의 탄생의 돕고 광야에서 살도록 들나귀를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나라’는 나의 이웃과 우주 만물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와 우주를 보는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아이 때부터 매일 성서를 듣고 암송하며 생활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창조 신앙의 원칙을 삶의 원칙으로 세우고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며 성서를 암송하며 성장했을 예수님은 자연과 자연 안에서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당연히 앞에서 말한 구약성서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신약성서는 마6:25-34에서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22-34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하늘의 새와 들의 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댕강 잘라서 읽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사실 이 문맥은 앞의 구약성서의 ‘인간과 자연, 우주와 피조세계’에 대한 이해의 연장선에 있는 겁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내용을 한 번 읽어 볼까요? 그리고 이 본문과 짝이 되는 누가복음서도 한 번 읽읍시다.

 

‘하늘의 새와 들의 꽃’에 대한 이야기는 마태와 누구에만 나오고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뒷부분은 마태복음에는 없는데, 이 부분을 제외하곤 거의 두 복음서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요. 또한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늘’과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이 없는데, 이로 보아 누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는 원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의 ‘새’라고 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까마귀’라고 합니다. 까마귀는 우리만이 아니라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도 부정한 날짐승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왜 누가복음은 새를 까마귀로 했을까요? 그것은 이 비유를 인간에 대한 배려를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까마귀까지 먹여 살리지 않느냐’라는 배려의 표현입니다.

 

누가는 이 비유를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뒤에 배열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즉 ‘하늘의 새와 들의 꽃’의 비유는 바로 앞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대척점으로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의 본문을 근거하고, 구약성서의 피조세계와 인간의 책무를 염두에 두어 그 뜻을 갈릴리 사람들의 형편에서 읽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참 좋다’하시던 그 축복과 격려의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온 사람들은 삶의 고단함에 깔려서 신음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이 고되고 힘든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위로는 ‘걱정 마, 잘 될 거야’하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그 말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늘 위로를 바라니까요. 예수님은 갈릴리 농민들에게 삶의 무거운 짐이 ‘네 자신의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만 믿어. 나를 따라와 그러면 앞으로 잘 될 거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잘못을 지적하거나 앞으로 이렇게 하면 잘 될 거라는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를 잃지 않게 위로해 주고 자기 존재를 긍정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들의 꽃과 공중의 새를 가리키며 ‘걱정 마. 잘 될 거야’했던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창조 세계의 축복이 갈려 있고, 그걸 바탕으로 갈릴리 농민들에게 가장 좋은 위로와 삶의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계십니다. 이런 용기를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튼튼하게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창조세계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러한 위로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새 들의 꽃’입니다. 하늘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에게서 위로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주 심심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주 세심하게 가슴에 새겨야 하는 문맥입니다. 아마도 들꽃과 새와 하나님에게서 삶의 위로를 발견하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명예와, 부와, 지위와 거리를 둔 사람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물질보다는 자연에 눈을 돌리고, 명예 보다는 창조세계의 비밀스러움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인류 역사 속에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즉 가난과 외로움,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들로 나가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무와 풀의 냄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농부는 흙에서, 어부는 물과 고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지켜왔습니다. 인위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자연과 마주하면서 자신이 그 일부임을 깨닫고, 자신이 속한 전체와 그 전체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각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자연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티끌 같은 존재로 다 같이 평등합니다. 그러니까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삶의 근원적인 평등을 인식하는 겁니다. 이런 인식을 통해 열등감, 열패감, 궁핍의 처량함을 던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래야 비로소 사람이 의젓하게 되는 거죠. 이래서 예수님이 현재의 비참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피조세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냥 새가 아니라 ‘까마귀’라고 합니다. 사실 들의 꽃도 그냥 꽃이 아니라 ‘엉겅퀴’를 가리킵니다. 이런 것들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오늘 있기는 해도 내일은 필요가 없는 하찮은 것들입니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짐승이고 꽃입니다. 이는 갈릴리 농민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이 까마귀와 엉겅퀴 같다고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처량하고 슬프기 그지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저 봐라! 저 못난 것들도 내가 먹이고 입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비록 비참한 처지라고는 하나 어찌 저들만 못할까!”이러시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까마귀와 엉겅퀴가 부정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통념과 대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다섯 번의 부정형이 나옵니다. ‘씨를 부리지도 않고, 고두지도 않고, 모아들이지도 않고,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않고’합니다. ~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저렇게 잘 살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하시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의 창조신앙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창조신앙은 인간을 피조 세계의 전체의 일부로 인식하고, 세계를 창조자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조신앙은 인간 삶의 의미와 존엄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퇴락한 인간의 존재감을 회복시키시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물질의 증대를 통한 허접한 우월감도 지적하고 계신 거죠. 예수님이 선포한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동물, 식물, 인간의 생명을 포괄합니다. 평등한 세계로서의 나라 말입니다. 우리가 새와 꽃의 비유를 읽으면서 당황스러운 것은 말씀의 뒤에 ‘그러니 너희는...’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란 말인가? 이 말씀이 이쁘게 포장해서 받아들일 텐데, 이 문장 때문에 앞의 말씀들이 혼란스러운 경험을, 목사에게서 설명을 듣기는 듣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는(16-20), 물질을 쌓아둘 창고를 짓겠다는 부자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에게서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빼앗아 가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죠? 재물을 쌓아둠으로써 삶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겁니다. 바로 한 인간의 이런 생존인식 때문에, 하나님의 의(아름다운 상호생존의 피조세계)를 인간들이 감당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요렇게 살려하기 때문에 부자의 허망도 있고, 가난한 자의 무력감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행한 인간들의 삶에 표준을 다시 제시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가리키는 겁니다.

 

또 눅12:6을 보세요. 거기서는 인간의 생명이 참새의 목숨보다 못하게 취급당하는 세상을 나무라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 같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까닭에 깨져 버린 ‘하나님 나라’ 와 ‘하나님의 공평(의)’에 대해서 말하고 계시는 겁니다. 창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상호관계와 책임감의 부재로 ‘불의’가 흥왕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붕괴되었다는 겁니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의 까마귀를 보고 들의 엉겅퀴를 보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 창조세계에 대한 눈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경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관계 지으며 생존하고 번성했지 약육강식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래 그랬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그 ‘하나님 나라’를 유지하고 번성케 하는 책무를 맡기셨는데 그 책무를 다하지 않음으로 ‘불의’가 판친다는 겁니다. 불의는 누구는 창고를 더 짓는 어리석음을, 누구는 그로 인해 헐벗고 죽을 수도 없는 고통을 당하는 그런 삶들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까마귀를 보고 들의 엉겅퀴를 보라’는 말씀은, 태초의 창조세계에서처럼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돌봄으로 생존하고 번성하는 창조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괴도록 인간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책무를 감당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하늘의 까마귀를 보고 들의 꽃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어울려, 까마귀도 살고, 볼품없는 꽃도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리되도록 하는 게 인간의 책무이며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그걸 먼저 구하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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