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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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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누가복음 (33강) 이 세대의 사람
<본문>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설교>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교회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여서 만나는 성도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또 자녀들이 행동하는 것이나 남편이나 아내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어느 것 하나도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음을 느끼실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 여러분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을 향해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같은 속마음을 감추고 대하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된 이유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요한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인간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당시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것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위대하게 보인 세례 요한이었다면 나약하게 헤롯에 붙들려 옥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요한의 마음에 꼭 들게 행동하셔야 했다면 천군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세상 개혁을 위한 일을 했어야 할 것이고, 세례 요한의 경우도 요한의 말 한마디에 헤롯이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죄의 용서를 빌도록 했어야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그 누구의 생각과 마음에 들도록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는 무시하며 반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태를 장터 아이들의 놀이 비유를 통해서 꼬집고 계십니다.
장터 아이들의 놀이
32절을 보면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예수님 당시에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면서 이런 놀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쪽 편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의 아이들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추고, 다시 다른 편이 장례식처럼 곡을 하면 또 다른 편의 아이들이 슬피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서로 상대편이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음으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 세대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사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에 들도록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장터의 놀이하는 아이들처럼 함께 하지 않으려고 하며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차피 이런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모인 곳이니 오죽하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이 생계를 위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함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평으로 삼아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교회에서도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결국 교회조차도 세상의 방식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 교회가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지 인간 그 누구도 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고 타박하기 일쑤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비난
33,34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은 매우 금욕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과는 아주 다르게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고, 낙타 가죽옷을 입고 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삶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들처럼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것을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매도한 것입니다.
이들은 옳고 그름을 가지고 요한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의 삶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욕을 하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에 대해서는 먹지 않는 것을 꼬투리 삼아 비난 한 것이고 예수님은 먹은 것을 꼬투리 삼아 비난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까 먹지 말아야 합니까? 이것이 이 세대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요구와 기대를 이루어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장터 아이들의 비유와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 사람의 특성은 뚜렷한 이유와 근거도 없이 다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방관하고 먹으면 먹는다고 비난하고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이 죄인인 사람의 마음에 흡족한 것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셨을 때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셨을 때 그 말씀에 놀란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에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예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옳은 이유
그런데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35절에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까? 이들이 자부하고 있었던 의를 의로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 실천에 힘썼던 자신들의 의가 인정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높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그들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이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좇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 방식을 스스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결과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로 옳다함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옳다고 인정해줘야 옳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말한 대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의를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혜가 옳았다는 것은 하나님 자녀가 있음으로 해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하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판단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합니다. 문구 하나를 내 세워서 트집을 잡고 결국 서로가 배척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교파는 거의 이런 방식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자는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을 자신들보다 잘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때문에 세례를 요한이 베풀고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요한이 중심이 되고 자신들은 겉으로 밀려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이러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세대의 사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도 십자가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도 나를 높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여러분이 지혜의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증거물은 교회도 세상도 내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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