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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많음이라

누가복음 신윤식 목사............... 조회 수 172 추천 수 0 2018.09.29 23: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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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7:36-50 
설교자 : 신윤식 목사 
참고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누가복음(34강) 사랑이 많음이라
2012.11.04 13:53 


<본문>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설교>

 
바리새인의 호의


본문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5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고, 6장에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의논하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들의 눈에 예수님은 유대교에 있어서 이단자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본문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청했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사람을 초청할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본문의 바리새인은 기존의 바리새인들과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여기고 초청하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39절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라는 말과 40절의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라는 말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했고, 또한 선생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또한 유대 사회에서는 선생으로 여김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을 초청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 때문에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알고 있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만을 가진 본문의 바리새인과 같은 수준에서 모이고 있기 때문에 교회로서 꼭 나타나야 하는 것이 나타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죄 지은 여인의 사랑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그 자리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을 죄를 지은 여자로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동네에서 창녀로 살았던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인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신 것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여인의 이러한 행동은 일반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앞에 나와서 울며 그 눈물을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춘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대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귀한 향유를 발에 부어 버리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한마디의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47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여인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0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여인의 믿음은 곧 사랑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가 세상의 상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과 휴머니즘에 의한 것을 믿음과 사랑으로 착각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이란 단어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시 인간의 선행이나 동정, 연민과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나타나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들어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과 바리새인의 차이


예수님은 여인과 바리새인의 행동을 비교하십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실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지만 여인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은 것이고,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입 맞추지 않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지만 여인은 향유를 발에 부은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여인의 행동의 차이의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고 여인은 자기의 죄를 깊이 그리고 크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한 바리새인은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하는 행동을 보면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죄인인 여인이 다가와서 하는 행동을 물리치고 멀리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선생인 예수님과 역시 선생으로 추앙받은 자신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죄인인 여인과 같은 사람은 감히 다가올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이 더 높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인 여인이 자신이 벌린 예수님과의 식사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치성에 붙들린 채 예수님을 초청했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가 더 부각되는 것에 마음을 두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께 나올 때부터 자신의 가치성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종과 같은 낮아진 모습을 취하게 된 것이고 향유도 붓게 된 것입니다.

 
아마 여인이 향유를 팔아서 좋은 일에 사용했다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신의 이미지가 조금은 나아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죄가 큰 자일수록 그에게 예수님은 더욱 존귀한 분으로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더 사랑 하는가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을 때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시고 바리새인은 많이 탕감 받은 자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곧 죄 지은 여인이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리새인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여인보다 바리새인의 죄가 적다는 뜻이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가볍게 여겼지만 여인은 크게 여겼다는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나는 과연 바리새인으로 예수님께 나오는가 아니면 여인으로 나오는가?’입니다. 나는 나의 죄를 여인처럼 크게 여기는지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가볍게 여기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인처럼 자신의 죄를 크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진심으로 내게 필요한 분으로 바라보며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의 죄를 크게 여기고 예수님의 용서의 가치를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죄를 멀리 하고 죄와 거리를 두고자 합니다. 이것이 문제 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죄와 거리를 두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죄 속에 있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죄 지은 여인을 용납하지 않고 멀리하고자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그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초청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죄 역시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를 크게 여기는가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크게 바라보며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께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서 교회에 나오는 수준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와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나와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로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용서를 받았음에서도 불구하고 차별적인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성에 붙들렸던 마음이 예수님의 용서의 가치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가치와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기준으로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지만 그것 때문에 여인이 유대 사회에서 다른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으로 취급 받으며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평안히 가라고 하셨지만 그 여인의 삶은 여전히 평안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인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용서요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평안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 용서입니다. 이 사랑의 세계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참여할 수 없는 먼 세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인처럼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예수께 나올 때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를 평안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평안이 있는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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