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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아파트 문은 누가 여는 것인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경향신문 2018.10.14
‘문을 열었습니다.’ 아파트에 들어설 때마다 듣는 소리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 여닫는 장치가 일괄적으로 교체됐는데 며칠 애를 먹었다. 열쇠 그림을 누르고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른 다음 다시 열쇠 그림. 그러면 저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처음에는 바뀐 누름판에 적응하느라 안내말이 달라진 걸 의식하지 못했다. 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문이 열렸습니다’라고 했는데.
‘열었다’와 ‘열렸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주어가 달라진다. 전자는 기계가 문을 연 것이고 후자는 인간이 문을 연 것이다. 문을 여는 주체가 인간에서 기계로 역전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 ‘문이 열렸습니다’라는 기계음을 들으면서 문을 들어설 때는 내가 기계를 제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이란 호칭이 생략됐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문을 열었습니다’란 소리를 들으면서부터는 내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는 자괴감이 든다. 기계를 다루는 인간에서 기계의 지시를 받는 인간으로 전락했다는 자의식이 고개를 든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돌아보면, 유소년기 이래 나의 개인사는 도구와 기계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선택당한 것이다. 기계에, 더 정확하게는 광고(기업)의 유혹과 사회(시장)의 압력에 내가 계속 져온 것이다.
도구와 기계의 종류가 광범위하므로 필기구에 한정해보자. 어린 시절 마당에다 돌과 막대기로 그림을 그렸으니 나는 구석기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붓글씨를 배우면서 금속활자 이전 시기의 도구를 경험했다. 중학교 때 샤프펜슬이 나왔다. 형이 선물한 빠이롯드 만년필 못지않게 샤프펜슬도 매력적인 필기구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마침내 기계와 만났다. 1980년대 초 크로바 타자기를 들고 다녔는데 약간 과장하자면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타자기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사회에 나오던 1980년대 중반 감광지를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가 출현했는데 이 또한 수명이 길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내 가방에는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요즘에는 노트북보다 스마트폰을 매만지는 시간이 더 많다. 막대기에서 붓과 연필, 만년필을 지나 스마트폰까지 왔다. 물론 돌과 막대기, 손글씨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디지털 기기의 위력은 가위 눈부실 지경이다.
필기구 말고도 나의 성장기와 함께한 기계는 얼마든지 있다. 여섯 살 어느 봄날, 고장 난 오르골을 들여다보며 얼마나 신기해했던가. 바늘 없는 축음기에 진짜 바늘을 꽂고 귀를 기울였을 때 들려오던 소리는 또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손목시계도 있다. 날숨에도 날아갈 것 같던 가느다란 태엽과 얇고 작은 톱니바퀴들. 시계의 안쪽은 또 다른 우주였다. 라디오는 또 어떻고. 누구나 그랬겠지만 라디오 안에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광석 라디오를 만들기도 했고 방패연에 이어 고무 동력 글라이더를 조립해 날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온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저 두 시대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범위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어린 나는 기계를 분해했다. 그 내부가, 작동원리가 궁금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열린 이래 기계와 절연됐다. 기계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달리 말하면 수리가 불가능해졌다. 디지털로 무장한 기계는 사용자의 접근을 거부한다. 소비자는 부품을 교체하거나 제품을 교환하거나 아예 새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자립, 자율, 자존의 삶에 도전한 소로에게 의자 세 개는 의미심장한 도구이자 메타포였다. 자신의 고독을 위해서는 의자 한 개가, 우정을 위해서는 의자 두 개가, 친교를 위해서는 의자 세 개가 필요했다. 소로는 고독, 우정, 친교가 온전한 삶과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본 것이다. 셰리 터클 미국 MIT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제 우리에게는 의자가 하나 더 있어야 한다. 기계와 마주 앉기 위한 의자.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기술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는 기술이 민주주의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정치가 기술을 관리하지 못한다. 현실정치는 기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소비자인 우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신기술에 환호할 따름이다. 지난 세기 초반 기술철학의 지평을 열어젖힌 루이스 멈퍼드가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할 때다. 멈퍼드는 <예술과 기술>에서 이렇게 캐물었다. “왜 우리 내면의 삶은 이렇게 궁핍하고 공허하게 됐을까요? (…) 왜 우리는 기술에 있어서 신이 됐으면서도 도덕에 있어서는 악마가 됐고, 과학적 초인이면서도 미적인 바보가 됐을까요?”
‘문을 열었습니다’라는 기계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하는 것이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가 먼저 기술의 주인은 누구인가, 무엇이 좋은 기술인가라고 물으면서 기술을 민주주의 안쪽으로 초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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