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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더라도 집에 책 쌓아놓아야 하는 이유
한겨레신문 2018.11.17.
책과 아이의 미래
간혹 ‘책이라는 것은 나에게 허영의 대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몇 권 사서 집에 들어갔는데, 책상 위에, 소파 옆에, 심지어 화장실까지 얼마 전에 샀으나 아직 들춰보지도 못한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입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그런 것인지, 저만 그런 것은 아니더군요.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글을 통해, 쌓여가는 책에 대해 주체를 못하고 배우자에게 타박을 듣는 사연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만의 현상도 아닌 모양입니다. 최근 국제적으로 ‘츤도쿠’라는 단어가 화제가 되었는데요, 스시나 사무라이처럼 일본어에서 기원해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한자로 표기하면 ‘積ん?’이고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읽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우리말의 ‘장서가’ 또는 영어의 ‘비블리오마니아’와 같이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있지만, 노골적으로 ‘읽지 않는’의 의미까지 부여한 단어는 이것이 유일해서 세계적으로 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책 집착은 허영심 때문?
도대체 사람들은 왜 책에 집착할까요? 하나의 이유는 멋있어 보여서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잘 포착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허영기 가득한 캐롤라인 빙글리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독서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제가 집을 지었는데 거기에 훌륭한 서재가 없다면, 오! 얼마나 끔찍할지”라고 말하는 모습을 이용합니다. 실제 캐롤라인은 책 읽기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거든요.
마케팅에서도 책과 멋짐을 활용하는 것은 대유행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긴자 한복판의 고급 백화점 긴자 식스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쓰타야라는 서점이 있습니다. 카페와 다양한 문구 매장을 포함해서 인테리어는 화려하고 멋집니다. 쓰타야는 ‘감성과 취향을 판매하는 곳’을 표방하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소장하고 있는 책으로 (읽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감성과 취향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신세계는 강남 코엑스 지하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별마당이라는 도서관을 열었는데, 여기도 멋진 내부 장식과 공간 구성으로 책을 읽는 사람과 사진 찍는 사람으로 항상 북적입니다. 이제 책은 정보 전달 매체이면서 동시에 멋짐을 드러내는 장식품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도서관 위쪽 손이 닿지 않는 서가는 영어로 쓰인 두꺼운 책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실은 책이 아니라 책 모양의 플라스틱 빈 깡통입니다. 노골적으로 장식품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에 책을 얼마나 두고 있을까요? 2011~2015년 사이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1개국 성인 16만명을 대상으로 수행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의 질문 중 하나가 ‘당신이 16세였을 때, 집에 책이 몇 권 있었나요? 신문, 잡지, 교과서/참고서는 제외한 책을 대상으로 답해주세요’였습니다. 최근 조애나 시코라 등 국립오스트레일리아대학(ANU)과 미국 네바다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이것을 분석하였습니다. (‘공부하는 문화: 청소년기 책의 노출은 언어능력, 수리능력 및 기술문제 해결능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소셜 사이언스 리서치>, 2018) 우선 (그림1)에서 가구당 책 보유 규모를 볼 수 있는데요. 에스토니아가 가구당 평균 218권으로 최고였고, 그 외에 노르웨이, 스웨덴, 체코가 200권 이상이었습니다. 반면 터키가 27권으로 가장 낮았고 한국은 아쉽게도 91권으로 책을 적게 갖고 있는 여섯째 국가였습니다. 전체 평균은 115권입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청소년기 책에 노출되는 것은 인지능력 발전에 전반적 영향을 미치는데요. 그 효과는 언어능력, 수리능력 및 기술문제 해결능력에 걸치게 됩니다. (그림2-A)에서 보듯이 65권 정도까지는 가파르게 인지능력이 상승합니다. 그리고 대략 350권이 넘어서면 그 이후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책이 아주 많을 필요는 없지만 책이 거의 없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청소년기 집에 책이 많은 가정은 대체로 부모가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 높기 때문에 책이 많은 집 아이들이 성인이 된 뒤에 인지능력이 좋다는 것은, 사실 ‘고학력 부모가 교육을 많이 시켜서’ 또는 ‘부유한 부모가 교육비를 많이 써서’ 등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이 그림은 이러한 효과를 다 제거한 이후 책 보유 규모의 효과를 측정한 것입니다.
한국 가구당 책 91권 보유
31개 나라 가운데 6번째로 적어 청소년기 책에 많이 노출될수록
인지능력 향상…소득 상승 효과도 집에 책 비치 어려운 가정 위해
공공도서관·독서프로그램 확대를
유사한 연구가 더 있는데요.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의 경제학자 조르조 브루넬로 등은 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책 보유량과 소득에 관한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책은 영원하다: 어린 시절 생활조건, 교육 및 평생소득’, <이코노믹 저널>, 2016) 이들은 2010년 유럽연합이 조사한 건강, 노화 및 은퇴 조사(SHARE)를 이용하여, 1920~1950년 사이에 유럽에서 태어난 남성 노인 6천명을 대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소득이 높아지는 효과는 여러 연구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관찰되는데, 이들의 연구에서도 학교교육을 받은 기간이 1년 늘어날 때 평생소득이 9% 늘어나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효과는 균일하지 않아서, 청소년기에 집에 책이 전혀 없었던 그룹(10권 이하)의 경우 소득 상승 효과는 5%에 불과했지만, 그보다 책이 많은 가정에서 자라는 그룹(11~200권)의 경우에는 이 효과가 21%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이들은 교육 기간을 강제로 늘리는 의무교육 확대 정책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으니, 세심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두 연구를 보면 집에 책을 쌓아두는 것은 허영 이상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설령 ‘츤도쿠’가 부모의 허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책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인지능력이 개선되고 성인이 된 뒤의 소득이 높아진다면 꽤 괜찮은 투자가 아닐까요?
공공도서관의 중요성
하나만 더 생각해보죠. 경제적 어려움이나 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집에 책을 비치하기 어려운 가정도 많이 있을 텐데요. 이들을 위한 제도는 무엇보다 공공도서관이 아닐까요? 지난 7월 미국 롱아일랜드대학의 경제학자 파노스 무르두쿠타스는 <포브스>에 ‘아마존이 있기 때문에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 공공도서관을 없애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사서와 도서관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로부터도 미국의 공공도서관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공적 자원이고 이를 통해 특히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큰 혜택을 보는데, 이 무슨 망발이냐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포브스>는 부랴부랴 관련 칼럼을 삭제하고 사과의 글을 올렸지만,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공공도서관이 미국인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소개한 국제성인역량조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족은 평균적으로도 책 보유량이 적은 편이지만, 5권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답변한 비율이 무려 23%에 이르러서 가정에서 책에 거의 노출되지 않는 비율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보완적으로 공공도서관을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등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지역적으로 꽤 편차가 큰 것 같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의하면, (그림3)에서 보듯 우리나라를 규모에 따라 대도시, 중소도시, 읍면으로 나누면 책과 관련한 모든 지표에서 읍면이 좋지 않은데, 특히나 공공도서관 이용률이나 공공도서관이 중심이 되는 독서프로그램 참가율은 특히 열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대한 지원을 할 때 조금 더 긴 시각에서 공공도서관의 확대와 개선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news.v.daum.net/v/20181117155602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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