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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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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84802 |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창조절 열둘째 주일(추수감사절), 2018년 11월18일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기도하라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인 멘토입니다.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던 디모데가 이제는 독립적으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지침을 편지에 담아서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냈습니다. 그중에 일부인 딤전 2:1-7절은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위 구절에 기도 형식이 간구, 기도, 도고, 감사, 이렇게 네 가지로 나옵니다. 기도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것, 특히 다른 이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라는 게 본문에서 핵심입니다. 여기만이 아니라 바울의 다른 편지에도 기도하라는 내용은 많습니다. 기도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경건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기도를 언제 드립니까?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와 하루를 다 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누울 때, 그리고 식사할 때 짤막하게나마 기도를 드리겠지요.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를 안고, 또는 아이가 잠들 때 기도할 겁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큰 병에 걸렸을 때나 사고를 당했을 때 기도를 드리겠지요.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드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특히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은 기도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은 기도 없이 작동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2) 바빠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3)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기복주의적인 기도 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도를 피합니다. 4) 기도는 주체성이 약한 사람들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기도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6)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가장 손쉬운 대답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세상살이에 쫓기면서 삽니다. 먹고 살기가 고달프거나 거꾸로 즐길 일이 많아서 바쁩니다. 흔한 말로 바쁘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쁜 척합니다. 주로 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있지만, 스마트 폰과 친밀하게 지내느라 바쁩니다. 끊임없이 카톡 하고 사생활을 나누거나 엿보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친구와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혼자의 시간을 못견뎌하는 걸 바쁘다는 말로 합리화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중요하지 않는 일로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에게 기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설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기도는 시 읽기와 비슷해서 실제로 경험하지 않으면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지 않아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시를 읽어도 부자가 된다거나 건강하게 된다거나 어려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영혼이 순전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영혼이 순전해진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긴 합니다. 자기 계발서를 주제로 하는 책을 읽고 성공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 있는 삶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일종의 자기 계발과 비슷한 차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용적인 관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영혼이 순전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도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감
기도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친밀한 사람과는 가까이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을 가깝게 느낀다면 당연히 기도를 하게 됩니다. 거꾸로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반드시 기도로만 나타나는 것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 전체가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일상의 기도라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매 순간을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마음으로 기쁘고 진정성 있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형식을 갖춰서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 그런지는 예배를 생각해봐도 답이 나옵니다.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지 않으면 삶 전체가 일상의 예배라는 사실을 결국은 놓치게 됩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항목이 들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저의 설명에 일단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기도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왕년에 ‘기도꾼’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기도와 거리가 멀게 삽니다. 그걸 떳떳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간혹 불안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기도 이벤트를 무조건 따라가자는 게 아닙니다. 심야기도회에 참석해야 하거나 하루에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은 무릎 꿇어야 한다거나 금식기도와 40일 작정기도, 릴레이 기도회를 열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방언 기도를 위한 집회가 곳곳에서 열리기도 합니다. 이런 이벤트성 기도회는 심리적인 차원에서 도움이 되겠지만 오히려 기도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다는, 또는 가까이 가고 싶다는 거룩한 갈망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런 거룩한 갈망이 있으신가요?
저는 요즘 기도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한 권은 팀 켈러의 『기도』이고 다른 한 권은 스탠리 그랜츠의 『기도』입니다. 수년 전 졸저 『주기도란 무엇인가』와 『매일 기도하라』를 쓸 때도 기도에 관한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은 두 권을 통해서도 많은 걸 배웠습니다. 기도 방법론을 배웠다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목사로서 기도의 삶을 더 풍성하게 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탠리 그랜츠는 기도에 두 방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말씀드리는 것의 네 가지 요소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재미있게 영어 이니셜로 ACTS(사도행전)라고 표현했습니다. A는 Adoration(찬양)을 가리키고, C는 Confession(자백)을, 그리고 T는 Thanksgiving(감사)를, 마지막으로 S는 Supplication(탄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전반적인 신앙적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배에도 해당됩니다. 이런 태도를 갖추지 않으면 기도와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에게는 찬양, 자백, 감사, 탄원이라는 영적인 태도가 풍성해집니다. 저는 목사라기보다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하라
여기서 세 번째 항목인 감사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네 번째 항목으로 나옵니다. 그랜츠는 감사를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표현하는 행동’(살전 5:18)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에 능력으로 경험되어야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와 구원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서로 직결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기에 구원자입니다. 창조의 능력으로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선한 분이고 긍휼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고 계시기에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은 총체적으로 선합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서 죽음까지도 선하다고 믿고, 블랙홀도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이 하신 일과 하시는 일을 감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입니다. 날짜가 나라마다 다릅니다. 미국은 넷째 주간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고, 영국은 8월 1일 라마스 날(Lammas Day)을, 캐나다는 10월 둘째 월요일을, 그리고 독일 교회는 성 미카엘의 날(9월 29일) 다음 주일을 감사절로 지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미국 전통에 따라서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어느 민족이나 추수를 끝내고 특별한 의식을 지키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추석이 바로 그날입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도 대개는 농사와 연관됩니다. 유월절은 씨 뿌리는 절기이고, 오순절은 여름작물을 거둬들이는 절기이고, 초막절은 가을작물을 거둬들이는 절기입니다. 고대인들은 농사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풍년이 들면 한 해를 편안히 살아갈 수 있고, 흉년이면 온갖 고생을 다 겪어야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먹을거리를 마트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농사를 생각하겠지만 몸으로는 그걸 느끼지 못합니다. 밥이 없으면 라면을 먹으면 되고, 라면이 없으면 치킨을 먹으면 됩니다. 모든 것은 돈이 해결합니다. 흉년이 드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연봉이 줄어드는 건 참지 못합니다. 자동차와 컴퓨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쌀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면 쌀을 수입하면 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김장철의 배추와 무와 고추가 부족하면 중국이나 호주 등에서 수입하면 됩니다. 농사는 점점 더 천덕꾸러기로 전락합니다. 농사꾼들의 나이는 대부분 70세가 넘었습니다. FTA 이후로 정부는 자국 농민들을 직접 지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작은 땅덩이에서 농사를 짓는 우리가 중국, 호주, 미국, 캐나다처럼 넓은 땅에서 농사짓는 이들과의 경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앞으로 과학이 첨단으로 발전하여 사람이 영양제 한 알만으로 일주일이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때가 온다면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인간 생체도 큰 변화를 겪게 될 겁니다. 위와 장이 없어지거나 맹장처럼 작은 형태로 줄어들겠지요. 음식을 씹을 필요가 없으니 이와 혀도 필요 없게 됩니다. 이런 때가 오기 힘들겠지만,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아주 먼 후일에 일어날 이야기이니 지금은 일단 접어둬도 됩니다.
자연주의 영성 너머
추수감사절은 단순히 곡식을 거둬들인 것에 대한 감사 의식만이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생존에 대한 감사입니다. 인간이 생존하려면 우선 곡식이 필요하지만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공기와 물이 필요합니다. 바람이 불어야 하고, 안개가 끼어야 합니다. 태양과 달이 없으면 안 됩니다.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도 다 자기 역할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일까요? 세상의 자연주의자들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졌다고 하겠으나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저는 자연주의자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동시에 그런 생각 너머를 희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저는 처음으로 햅쌀로 밥을 해먹었습니다. 제 아래 누이에게서 들은 말로 정말 밥을 맛있게 하려면 전기밥솥이 아니라 가스 불에 얹어놓는 냄비로 지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정도로 밥 짓는 기술이 없어서 그냥 압력밥솥에 합니다. 햅쌀로 밥을 하니 우선 뜸 들이는 냄새가 기가 막혔습니다. 그 냄새만으로 온몸에 생기가 도는 듯했습니다. 뚜껑을 열자 김이 올라오면서 밥 표면이 반짝거렸습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자 감칠맛이 입안 전체를 채웠습니다. 그 순간에는 더 이상 만난 것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빛으로, 생명의 신비로 경험하는 것이 바로 자연주의자들의 영성입니다. 시인들에게서 그런 영성을 자주 봅니다. 이시영 시인의 ‘오리알 두개’라는 시를 들어보십시오. ‘갈숲이 자라는 곳에 오리알 두개/ 오리는 어디 갔나/ 갈숲이 대신 품어주는 곳에 따스한 오리알 두개’ 시인들에게는 세상과 자연과 사물이 모두 빛으로 경험됩니다.
저는 이런 이들의 세계관과 삶을 귀하게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신비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연의 신비만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신비로 계시하는 하나님이 저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만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흉년이 들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가 건강하기 때문에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를 소리 높여 찬송하고 감사하지만, 또 한편으로 세상의 묵시적 파멸도 내다봅니다. 하늘이 종이처럼 말리고 바닷물도 말라버리고 태양도 빛을 잃는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성경의 묵시사상 기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끝장내고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이런 표현들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심층적으로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희망의 끈을 잡으려는 절규입니다. 이런 희망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아직도 태양이 빛을 내고 있다는 사실과 곡식이 영글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 높여 감사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한 단락에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운명과 실존 전체를 가장 깊은 차원에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기독교인들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경건생활입니다. 따라서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실질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 2%, 아니 20% 이상 부족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기도생활을 하는 분들은 거기에 더 천착하십시오. 기도를 안 하거나 못하는 분들은 이제부터라도 소박하게나마 기도의 습관을 길러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 중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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