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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5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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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8.1.21 희망의교회 http://hopech.kr |
제자의 길
눅9:51-62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게 됩니다. 이 엄숙한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는 날 영광스러운 영원한 본향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입니까?
구원받은 성도에게 또 하나의 큰 축복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 영광스러운 제자의 삶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제자의 삶은 보통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나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이 특권과 영광에 감격합니다. 나 같은 죄인은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그곳,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과 은혜가 충만한 그 세계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절) 유대인들은 최소한 일 년에 세 차례씩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며, 축제가 있고 기쁨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에게 그곳은 적대와 배신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럽고 무거운 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결연히 올라가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마음과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도 기꺼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 따라가는 길이 좁고 험한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처럼 이 길을 결연히 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된 성도 여러분, 주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기로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지나야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갈릴리 지방과 유대 지방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 몇 사람을 사마리아 어느 마을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고을에 들어갔더니”(52절)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숙소와 식사를 미리 준비하도록 그들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그 일도 준비하게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들의 마을에 오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53절) 사마리아인들은 왜 예수님 일행을 거부했을까요?
그것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반목 때문이었습니다. 앗수르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스라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혼혈족이 되었는데,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이렇게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혼혈족이 되자, 남 왕국의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뿌리 깊은 반목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예수님께 대답한 말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해설을 달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여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지나야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인 순례자들이 자기들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먼 길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기들의 동네에 들어오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자 제자들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인데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실 정도였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3:17) 그런데 왜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사마리아인들을 심판하는 것을 생각했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은 최근 변화산에서 보았던 엘리야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의 병이 낫겠는지 묻기 위해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 사자를 만나 이방신에게 물으려고 한 아하시야 왕은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아하시야 왕은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잡으러 갔던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들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렸습니다(왕하1:9-12).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인들도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심판해야 한다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55-56절)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으며, 그 노중에서 받으신 배척과 홀대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절)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절) 예수님께서는 왜 이 사람을 거절하셨을까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았으며, 예수님의 인기와 영광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유익을 위해, 출세를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동기를 가지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최소한의 집이나 재산도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출세하려는 동기와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사실을 절실히 경험해왔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의 종들은 가장 능력있고 위대한 자들이며, 동시에 가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힘입어 일한다는 점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선순위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따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절)
성경은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아버지가 지금 당장 죽은 것은 아니었고, 아마 얼마 살지 못할 정도로 노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친이 죽은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대답은 사실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60절). 이 말씀은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는 인간의 도리를 저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안 믿는 사람들보다 가족과 이웃들에게 더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것과 이 일이 상충되거나 대립될 때, 성도는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먼저 가족과 작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런 태도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1-62절)
쟁기질 하는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을 반듯하게 갈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나 가족들의 기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상적인 인간의 도리와 의무를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며,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위하여 몸을 주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을 주께 하듯 마음과 다해 섬겨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이런 일들이 믿음 지키는 것과 대립될 때, 우리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단호히 돌아서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다면, 이 모든 일들을 초월하여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적인 일들과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아내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롯의 아내는 소돔의 죄악된 풍요와 쾌락에서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경험했던 일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시골에서 목회하시느라 평생 가난하게 사시며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 철이 들면서 저는 열심히 돈 벌어서 아버지 모시고 동생들 돌보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종으로 쓰시겠다니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한동안 뜨거운 감격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지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모든 꿈과 생각은 오직 목사가 되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아버지와 동생들이었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군복무를 마치고도 10년의 세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된다 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할 것이 뻔했습니다. 아버지 잘 모시고 동생들 돌보는 일은 불가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신학공부를 하던 시절은 혹독한 시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혹 지금 아버지께서 살아계신다면 뭐라도 해드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모세는 레위 자손에 대해 축복하고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신33:9)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주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안정된 생활과 정당한 인간의 도리마저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제자는 단호히 모든 것을 뿌리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늘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얼마든지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따라 세상 사람들보다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며, 부모를 비롯한 모든 사람을 주께 대하듯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주님 따르는 것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포기하거나 잠시 유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무엇도 주님 따르며 믿음을 지키고 복음 전파하는 것보다 앞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맡겨주신 본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이것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도 단호하게 뿌리치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를 경제적인 궁핍과 육신의 연약함과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길로 인도할 때도 너는 기꺼이 나를 따라오겠느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뜨거운 가슴으로 결연하게 “아멘, 주님! 내 생명을 다하여, 내 인생을 다 바쳐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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