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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숲-노르웨이 숲-빌라도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46 추천 수 0 2018.12.13 23: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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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9:19-2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04-11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스무 숲-노르웨이 숲-빌라도

요19:19-22

  

이웅현 군이 대체군복무를 하면서 첫 월급을 타고 제게 도서상품권을 카카오선물로 보내 주었드랬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는데, 다시 또 보내오는 바람에 부득불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게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스무숲]이 생각났고, 스무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노르웨이 숲]이라는 상점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가끔 그 근방을 지날 때면 ‘저이는 무슨 연유로 가게 상호를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했을까? 하루끼의 소설에 심취해서일까, 노르웨이의 어떤 숲을 다녀와서일까 아니면 스무숲의 내력을 알고서 그 대칭으로 노르웨이 숲이라 한 것일까’...여러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먼저 [스무숲]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김삿갓이라 칭하는, 김병연의 시 하나를 읽겠습니다.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스무나무 아래 낯설은 나그네에게

四十家中五十食 사십가중오십식--이 망할 놈의 집안선 쉰 밥을 주는구나.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개유칠십사--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不如歸家三十食 불여귀가삼십식--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서른 밥을 먹으리라.

 김삿갓(김병연)

  

이 시에 등장하는 [이십수]라는 나무가 바로 [스무 나무]혹은 [시므 나무]입니다. 스무나무는 느릅나무 과입니다. 이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대서, 지금의 먹자골목을 예전에 스무숲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식이 안 좋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보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빌라도라는 이름은 매주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런 사도신경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역사가 계속되는 한,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아주 나쁜 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라도에게 그런 오명이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예수를 심판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과연 빌라도가 이렇게 사도신경에까지 올라 대대로 죽일 놈이라고 지탄받고 저주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빌라도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오늘 하늘 뜻 시간을 통해 시도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가 이스라엘에 파견한 총독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옛날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했을 때 조선총독부를 두어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입니다. 로마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많은 땅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엄격하게 다스렸지만 식민지 통치에 있어 종교적으로는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종교였던 유대교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 거리가 등장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대제사장, 바리새파 등등)과 로마의 관계가 어떠했느냐? 하는 점이죠. 로마의 총독들은 식민지 국가의 민족지도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들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여 밀약관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직 목표는 원활한 세금징수와 노동력 제공입니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고 평온한 임기를 보내는 것도 로마의 식민지 총독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런 빌라도가 지금 골치 아픈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처형하라고, 예수를 살려두면 민심이 이반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자를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지금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는 장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다 나오는 장면이고, 예수의 죄목으로 십자가 위에 달린 죄패 “유대인의 왕”에 대한 기사 역시 4복음서에 다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의 빌라도 재판 사이에 있는 빌라도의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정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비해 요한복음이 좀 더 질문의 층이 다양하고 심층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문구를 다른 복음서에서는 누가 썼는지 불분명한데, 요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예수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가 선택한 ‘유대인의 왕’은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십시오”하였으나, 빌라도는“나는 쓸 것을 썼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What I have written, I have written)입니다. 카톨릭 성경에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총독인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왜 이렇게 토를 달지, 총독인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고 해석할 수 있고, 심문 과정에서 예수를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그 아우라와 품격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정말 예수가‘유대인의 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그래서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이라면.... 빌라도가 한“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답변은 그래서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를 읽으면서 스무숲 생각도 났고, 하루키도 생각이 났고, 존 레논 생각도 났습니다. 하루키가 생각이 난 이유는 비틀즈의 Norweig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번역해놓고 그것이 틀리지 않느냐는 지적에 정답이 없으므로 나의 번역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는 배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쿨 함. 그래도 그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라고 밝히는 그의 솔직함 때문이었습니다. 존 레논이 생각나는 이유는 원래는 knowing s/he would 였는데, 검열당국의 성화에 못 이겨 비록 가사를 Norweigan Wood로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계속 불명확하게 Norweigan Wood를 읊조리면서 knowing s/he would로 부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아죠. 우리가 처한 압제와 구속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의 도래를 유대인들은 대망하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는 그런 메시아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내란죄, 국가보안법에 저촉을 받는 큰 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조롱하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써서 붙입니다. 네 주제에 우리의 왕이라니. 어림없는 소리고 웃기는 소리다, 라는 경멸의 메시지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전하는 빌라도가 직접 써서 붙인 ‘유대인의 왕’은 좀 느낌이 다릅니다. 빌라도는 ‘어쩌면 이 자가 정말 유대인의 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죄패에 쓰라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굳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서 “나는 쓸 것을 썼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어쩌면 유일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던 최초의 인물은 스승이 잡히고 뿔뿔이 흩어졌던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라 빌라도 아니었을까. 진짜 메시아는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하게 우리 곁에 머물다 가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빌라도 혼자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진심을 담아 정말로 예수가 메시아였다, 라는 의미에서 ‘유대인의 왕’이라 썼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빌라도를 소환하여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당신이 썼던 ‘유대인의 왕’은 무슨 의미였고, 당신이 만났던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냐고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대인의 왕(메시아),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면서 그의 십자가 위에 죄패로 붙인 유대인의 왕(메시아), 빌라도가 예수를 대면한 후 쓴 유대인의 왕(메시아), 어쩌면 빌라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왕(메시아)이라는 서사를 교란시키면서 유대인의 왕(메시아)에 대한 서사를 다시 써 내려갔던 인물은 아닐까. 저자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면서 절규하지만 자기 목숨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아라고 말입니다. 이 비밀을 누설하는 바람에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등장하여 그 후로 20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원성과 아우성을 받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렇듯 빌라도가 말한 ‘유대인의 왕’은 우리의 (신앙, 혹은 신학의)경계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그 경계에 대한 교란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전달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예수가 존재했던 방식과 그의 행위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고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주의가 지배했던 세상은, 로마의 평화가 제국을 지배했던 세상은 온갖 경계로 가득했던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도그마가 만든 경계였고, 제국의 질서가 만든 경계였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흐른 21세기,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촌의 상황도 그리 이전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 정상인/장애인, 남자/여자, 백인/흑인, 내국인/난민, 이성애자/동성애자, 제국의 시민/ 그 밖의 인간>이라는 이항 대립의 원칙으로 구성됩니다. 빌라도가 물었던, 그리고 직접 예수의 십자가위 죄패로 썼던‘유대인의 왕’은 그 나누어진 경계를 교란시키고 흔들고, 결국에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표가 아닐는지.

  

저는 빌라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그 사람이, 군중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받는 저자가 진정한 메시아라는 비밀을 알았고, 그리고 예수와 만났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자유와 해방이 임했던 경이적이고 매혹적인 한 순간이었다, 라고, 그 찰나의 변화가 사실은 내 모든 선택의 순간과 삶의 고비마다 다짐과 결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 간증하지 않았을까, 라는 순진하고 나이브한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사건이, 그 실패한 메시아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장에 급한 불만 끄면 위기를 모면할 것이라고 빌라도는 생각했겠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 불은 꺼지지 않고 불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또 다른 메시아 사건의 원인이 되었고 그곳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재가 되었습니다. 예수에 의해 감행되었던 실험은 유일회적인 실패한 기억으로 화석이 된 채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계속 역사에서 재생 반복되면서 더 큰 음모와 반란, 그리고 변혁의 시나리오가 되어 지금까지 유전되면서 우리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빌라도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출발한다고 봐야겠죠. 그것에 대한 해석은 <노르웨의 숲>을 독해하는 방식처럼 지난하겠지만,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사건의 의미와 그것의 현재화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둘러싼 치열한 고민과 기도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저는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NORWEGIAN WOOD (The Bird Has Flown)

                        -The Beatles-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난 한 여자가 있었지 혹은 그녀가 나를 가질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보여줬지.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n't a chair.

그년 내게 머물 라고 말하고 어느 곳이든 앉으라고 했지

그래서 난 주위를 봤으나 어느 곳에도 의자는 없었지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난 양탄자에 앉아 시계를 뻘쭘 보다 와인을 마셨지

두 시간 얘기를 하고나자 그녀가 말하길

이제 잘래?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아침에 일한다고 내게 말 하더군 그러면서 웃는 거야

나는 일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그리고 욕실로 자려고 기어들어 갔지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깨어나니까 난 혼자더라구

새는 날아가고 불을 지피고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


좋지 않아? 노르웨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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