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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2-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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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72절-75절.
72절-73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어떤 때에 믿음의 조상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더냐?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환경이 어려울 때에 진리를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더라. 그 다음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진리 붙잡고 다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긍휼히 여김을 받더라.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가 있었느냐 그 말이요? 말씀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올라오려고 애씀을 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때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아니면 모르겠느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니면 이도 저도 모르겠습니까?
그 뭐 우리는 옛날 같지 않아서 하루 세 끼 밥은 다 먹어요. 한 끼 먹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한 그런 게 있기 마련인데 지금은 그런 게 없잖아요?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요? 자기가 살기 싫어서 목매다는 사람은 있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자, 그러면 어떤 일에 있어서 ‘아, 이건 하나님의 긍휼이시구나. 하나님의 은혜이시구나’ 이런 거 느껴 본 사람 없습니까? 없어요? 없으면 없는 겁니다. 앞으로 그거 알고나 말을 하던 안 하던 하세요. 그러면 자기가 바로 믿어보려고 애쓰면서 나올 때에 일 년을 가만 생각해 보면 다른 때보다도 훨씬 자기의 건강이라든지 ‘모든 면에서 그래도 편안한 가운데에 일 년 동안을 살았구나’ 그거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자기 잘난 것으로 돼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집니까? 그런 거 생각하기가 참 어렵지요? 조금만 생각하면 될 걸 눈앞에 코앞에 있는 것만 가지고 그러면 참 둔감해진다.
예, 앞으로 또 모르지. 우리교회 교인들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뭐 온 교회가 들썩하도록 나는 사고라든지 뭐 ‘누가 아프다. 병원에 갔다네. 누가 아프다고 실려 갔다네.’ 또 ‘누가 경찰서 들어갔다네’ 이런 거는 아직까지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한 증거다. 그래, 이제 개개인마다는 아직은 모르겠는데 그래도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말씀을 상고하고 새김질도 하고 그렇게 산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위안도 스스로 해 봅니다.
자기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가만히 생각을 해봐요. 그럼 감사할 것이 분명히 많다. 하나님의 은혜가 수시로 또는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수시로 임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도 모르고 인간끼리 싸우고. 한 번 그래 봐요. 그러면 가정이 이 어찌되겠나? 가정적으로 슬프고 고통스럽고 편안하고 하는 이게 별 것 아니에요. 문제는 자기 속에서 생각을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하게 되면 이게 날마다 스트레스 받아요. 이 세상은 아예 죄악 된 세상이고 선악과 따먹은 세상이라. 부정적으로 사고방식을 갖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는 선악과 따먹고 들어간 거요.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 죄가 침투 되었다 그 말이요.
그리고 자기의 환경에서 ‘편안하게 있다’ 무조건 그렇게 생각을 말고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이럴 때는 무엇을 해야 되겠구나. 이런 때는 무엇을 해야 되겠구나’ 이게 늘 수시로 들어있단 말이요. 시간을 잘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병은 없어. 무조건 편안하게 무조건 안 움직이려고 그러고 만날 보고 듣고 마시고 그런 쪽으로 나가 봐요. 그 어떻게 이길 수가 있나?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싸워나가는 거다.
유OO, 너 어젯밤 몇 시까지 공부했어? 너 텔레비전 봤냐? 너 핸드폰으로 연락 하냐? 남학생들에게? 안 하지? 진짜지? 자, 손 내. 목사님하고 하나님 앞에 어디 손가락 내 봐. 걸었다? 자꾸 졸음이 오면 졸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러고, 졸지 않도록 사전에 미연에 방지하도록 해야 하고. 그게 지혜로운 거지요. 그리고 졸음을 빨리 이길 수 있도록 또 먹는 것에 영양을 충분히 공급해주고. 그렇게 해야 돼요. 그게 지혜로운 거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가 다 임했습니다. 못 깨달아서 그렇지.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 않았다면 말하자면 여기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 말이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 그 약속은 유효한 것입니다.
72절 한 번 읽어봐요.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이 지금 누가 하는 소리요? 조상이 하는 소리요 후손이 하는 소리요? 후손이 하는 소리지.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그 신앙을 가진 자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하나님의 언약이 그 신앙을 가진 후손에게 유효한 것으로서 여기 들어가 있는 거란 말이요.
누구 자손이 되고 싶어요? 롯의 자손? 아니면 아브라함의 자손? 어느 정신을 이어받고 싶습니까? 아브라함이요 롯이요? 롯의 식구 중에 여자 분들은 롯의 처 어떻게 이어받고 싶으신 분? 저 사해바다 가면 롯의 처 있을 거요. 거기서 소금 한 줌 집어먹으면 롯의 처 정신이 아마 들어올 것 같아.
이 롯의 행위를 신앙 사상적으로 가만히 보라고요. 보면 오늘날 세상에 속한 목사들의 정신이 환하게 나온다. 목사님들이 큰 데 가려고 그래요 작은 데 가려고 그래요? 큰 데 가서 왕 노릇 하려고 그래요. 그게 하나님 말씀 붙잡고 말씀 따라서 사는 겁니까? 그 롯의 사상이 세상에 속한 목사님들의 속에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대로 들어있어요. 예. 소돔 고모라성이 좋아서 그 쪽으로 갔잖아요. 세상이 좋아서 그 쪽을 보고 갔어요. 그 쪽을 보고 가서 그 성읍에 앉아서 성주노릇 왕 노릇 하려고 그랬지요? 근데 그들이 들어먹었어요?
그 신앙의 이치가 거기 들어가서 깨닫게 해주면 되지? 다른 사람의 말도 아니고 본인 자신이 그렇게 말한다? 벌써 본인 자신 속에 잘못된 사상이 들어있다는 걸 증명을 하는 거요. 아, 그 사람 예수 안 믿는다. 그래, 결혼을 해가지고 믿도록 하지? 이게 누구 사상이요? 롯의 사상과 다름이 없다. 그걸 알아라. 환경적으로 다르게 보이니 그렇지 질적으로 보면 사상이 똑같은 이치로서 그게 들어있어요. 기독교 신문에 나오는 목사님들 그 사상이요. 이치가 틀리면 이건 안 돼요. 하나님→ 인간→ 물질. 근데 하나님은 자기 발밑에 있고 물질이 위에 있어. 종교적 세상 물질세상 부자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 완전히 순서가 어그러져 버렸어. 이 타락이요. 이게. 사상 비뚤어지고 순서가 어그러진 것을 이걸 볼 줄 알아야지.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신앙사상을 가진 그 후손에게는 유효한 건데 그러나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는 유효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질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신앙도 확실히 약속이 들어있는 신앙사상이 있다 그 말이요. 알겠어요? 약속이 들어있는 그 신앙사상을 자기가 가져야지.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지. 약속이 없는 신앙사상을 가지고 있다가 왜 벼락을 맞아.
74절: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누가? 우리가. 누구의 손에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는다. ‘원수의 손’ 하면 역사지요? 역사를 이루고. 손은 역사. 우리의 이룰구원과 반대되는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마귀적인 세력이요 비진리적인 운동의 세력입니다. 진리라고 외치나 그게 비진리라 그 말이요. 왜 비진리냐? 성경 가지고 세상을 자랑을 하니 비진리지. 성경은 천국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는데 왜 세상이요. 그게 천국에 속한 거고 다 그런 건데. 그게 진리요.
그런데 세상에 속한 거, ‘성전을 지어라’ 목표를 세워놓고, 성경에 있잖아요? 성전을 지어라. 그 다음에 이제 헌금하기 시작해서 예배당 건물을 지으면 그건 진리요 비진리요? 성전을 지으라는 그 성경구절을 거기다가 넣어놓고 헌금 작정하게 해서 예배당을 짓게 하는 이것이 진리요 비진리요? 그게 왜 비진리요? 왜 그게 비진리냐고요? 성경은 ‘성전을 지어라’ 하는 것은 불에 타질 성전이요 안 타질 성전이요? 불에 타지지 않을 성전. 하나님의 설계로 된 성전. 예배당은 하나님의 설계가 아니요. 그건 인간설계고.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대로 인간 자기가 하나님의 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 이걸 지어라. 이걸 짓다보면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건물은 비가 새면 입혀야 되고 무너지면 다시 지어야 되고. 이건 성경구절 안 붙어도 이건 자동화 들어가는 거요. 자동화.
요즘 이게 뭐 은행에서 대출을 잘 해 준데요. 어디다가 잘 해 주느냐? 이 예배당 건물 짓는데 대출을 잘 해 준데요. 그럼 대출한 돈 갚으려면 이 돈이 어디서 나와야 돼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거지? 목사가 성경구절 갖다가 했으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져야지. 돈 보따리가. 그래야 성경구절의 ‘성전을 지어라’ 그게 맞는 말이지. 하나님이 돈도 안 주면서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이게 되느냔 말이요. 물론 ‘지어라. 지어놓고 보면 내가 주마’ 그럴 수도 있겠지. 이 말은 믿지 말아요. 그 말은. 식당으로 불러내서 ‘너 맛있는 거 잔뜩 먹어라. 돈은 내가 내마. 나 화장실 갔다가 조금 있다 올게’ 했는데 없어졌어. 그 어떻게 믿어요. 믿음으로? 그 참, 그런데는 참 믿음이 엄청나게 강해. 난 그런데는 그렇게 하는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상황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쓰는 거지.
그러면 요런 경우는 사람이 이제 곧 죽어갈 수밖에 없는 수술을 빨리 해야 하는 병이 들었다. 그런 경우는 돈이 없으면 병원에 못 데리고 가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런 경우는 수술이 급한데 그런 경우는 집어넣어놓고 보는 겁니까? 그것도 잘 생각을 해야 돼요. 그럼 어디 가다가 차비가 없다. 가기는 가야 되는데 어떻게 타고 봐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옛날에는 기차가 문을 인간이 손님이 열 수도 있어요. 지금은 기계로 다 닫고 열고 그러지요? 그 때는 열기도 하고 밖에 내다보고 이렇게 했는데. 그럼 밭에 농부가 손도 흔들어주고 이랬는데 이거는 딱딱 막아버렸어. 이제는. 그래, 옛날 기차는 다 문을 열 수 있어요. 매달려 갈 수도 있고 그랬어요. 떨어지면 죽는 거요. 근데 사람 내리는데 턱 걸터 앉아있으면 이제 기차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뭐요? 승무원이요? 역무원인가? 하여튼 올라오시라고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사고 난다고.
거기 걸터앉아 있으면 앞 칸에서 오줌 싸고 똥 싸고 하는 냄새 다 올라와요. 오줌 싸고 있으면 물방울이 탁탁 튀면서. 옛날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무슨 말 하려다 그리로 갔어? 말을 잊어버렸어. 지금 미아가 돼버렸어. 말을 잊어버렸는데 영 생각이 안 나는데. 그래, 지금 무슨 말 하려고 하는가 하니 그래, 연령적으로 보면 고등학교 시절이 되겠지. 연령적으로는. 워낙 가난하니까 아이스케키 통 메고, 여수에 살아본 사람은 알겠지. 여수에서 배타고 옆으로 한참 가요. 화양리라고. 그 큰 아이스케키 통에 백 개가 들어가니까 얼음 넣고 소금 넣고 이러면 뒤에서 막 물이 줄줄 새는 거지요. 배에서 팔고 내려서 화양리는 시골이라 보리타작 때에 정종 병이나 마늘하고 막 바꾸는 거요. 아이스케키 하나 팔면서. 팔아가지고 어디까지 올라오느냐 하면 여수 산 사람은 알 거야. 여수 기차 들어오기 전에 만성리 오기 전에 무슨 역인지 모르겠어. 생각이 잘 안 나네. 다음에 지도보고 내가 가르쳐줄게.
그래, 화양리에서 역까지 걸어오는데 삼십 리요. 그러니 둘러메고, 어깨 껍데기 다 벗어지지요? 이게 시내로 가려면 철로 길로 철로 길로 타고 집으로 가야 돼. 어떻게 갈 수 있어? 문제는. 이제 도둑기차를 탔단 말이요. 내 얘기는. 이제. 짐 싣는 비료 싣는 칸이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갔어요. 내려가지고 도망을 쳐야 돼. 허허허. 그런데 들켰어. 그 옛날에는 표 검사할 때에 콱 찍는 거 있었지요. 그것 가지고 머리를 때리는데 얼마나 아팠는지 잊어버리지도 않아. 도둑기차 타고 얻어맞은 거 내가 왜 이 소리하지? 뭔 말을 하려고 한 건데.
그 아이스깨끼 판 거 그거 돈 얼마나 돼요? 차비로 하면? 일단은 타놓고 들켰으면 이제 얻어맞아야지. 설마한들 죽이기야 하겠어요? 일단 타놓고 봤어요. 옛날에는 그런 게 많이 있었어요. 타놓고 돈 없으면 기차가 살살 가면 얼른 뛰어내렸어. 옛날에는 그런 게 많았어요. 지금은 어떻게 들어가면서 검사 안 하고 나가면서도 검사 안 하데? 기차 타고 다녀도 안 하더라고요. 신앙도 약속이 들어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74절: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우리로 구원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하는 가르침이 어떤 가르침이라 그랬어요? 아까 얘기했는데? 우리로 구원이 이뤄지지 못하도록 하는 가르침? 오늘날 이게 교회서들 있는 겁니다. 어떤 가르침이요?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이게 육의 신앙이요 이게 인본주의 신앙이요 육의 신앙입니다. 그게. 그런 설교를 그런 가르침을 들으면 구원이 이뤄지지 못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 한 이치도 못 깨닫는다. 너는 절대로 성경 모른다. 수 년 수십 년을 믿어도 너는 성경 모른다.
성경역사만 가르치는 게 성경이요? 아니요. 그거 알아야 된다. 구원을 알게 하는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일반소원 목적을 가진 그런 지식이 아니고, 교회에서도 그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쓰면 안 돼요. 생각해봐요. 일반지식으로 성경을 쓰면 성경구절을 쓰면 이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되어졌는데 그러면 깨달으려면 성령님의 감화 감동이 들어있는 이치라야 되겠는데 일반지식으로 갖고 와서 쓰니 그게 어떻게 성령의 감화 감동이 되는 거요. 그건 안 되는 거요. 목적은 세상으로 가고 있는데.
넓은 길은 사망길이다. 많은 사람이 간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기가 예수 믿는 그 정신 사상이 이게 넓은 길로 가는 정신 사상인지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정신 사상인지 이걸 분별을 해야지 분별 안 하면 이게 뭐냐 그 말이요. 자기가 길을 가면서 그냥 먼 산보고 그냥 가는 겁니까 ‘이리로 가면 어디로 간다. 이리로 가면 어디로 간다’ 알고 갑니까? 집 갈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발이 가는 데로 가버립니까? 그렇게 가지 말라고 이정표가 있잖아요. 이정표. 길에. 이정표를 보고 ‘아이고, 내가 잘못 가고 있구나.’
오늘날 고속도로 지방도로 이게 번호가 다 있어요. 몇 번 도로 몇 번 도로 이거 알아야 돼.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지도보고 도로번호를 알아야. 그래야 제대로 찾아가져요. 세상길도 그런데 하물며 예수 믿는 이게 신앙사상에도 길이 있는 건데, 세상길 넓은 길 사망 길 모든 것은 다 죽어가는 길 심판 길. 근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그걸 몰라요. 몰라. 참 바보멍텅구리다. 이거.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믿으면 안 돼요.
일반적인 교회에서 일반적인 지식의 그 기준은 아무리 성경구절을 써도 사람을 구원해 내지를 못합니다. 특수한 진리생명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다. 이 지식은 애굽사상에서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광야사상에서 알게 하는 겁니다. 광야로 나와야 안다. 말씀을 받는다. 시내산의 말씀을 받게 돼 있다. 교회 다니면서 세상소원 목적을 잔뜩 갖고 있으면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힘들다. 마치 애굽에 있는 사람과 같아서 말씀 못 받는다. 자기 속에 하나님을 향한 성품을 입어가는 그런 소원 목적으로.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소원 목적을 버려야 돼. 그러면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신앙사상은 광야사상이야.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깨달음이 주어지고.
광야생활에서 성장되게 하고 애굽의 소원적 생활에서는 그런 신앙은 성장되지를 않습니다. 결국은 재앙을 맞게 되는데 하나님의 형벌을 맞게 되는데 인도자들은 목사님들은 그 신앙사상을 알고 거기서 탈출을 시켜야 돼. 세상을 의지하고 등 기대고 있는 그 사상을 탈출을 시켜야 돼. 광야 쪽으로. 그래야 살 길이 열려. 이렇게 우리로 건져서 어떻게 살게 하느냐? 탈출을 시켜서 이렇게 건져서 어떻게 살게 하느냐?
75절: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자, 성경 75절에 어떻게? 죽을 때까지 죄지음이 없고 징계 안 받고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여기에 보니까 무엇과 무엇으로 두려움이 없이? 옳지. 성결과 의. 이건 뭐냐? 성결과 의라는 건 뭐냐? 성결교회 가면 성결이 있느냐? 아니에요. 붕어빵에 붕어 있어요? 허허허. 요 성결과 의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거룩으로 된 옳은 성품을 말하는 거요. 여기에서.
그런데 지금 이 성결과 의를 일반세상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니 성결을 청렴결백으로 알고 있을 정도더라. 이게 지금 청렴결백이 아니란 말이요. 일반해석으로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으로 된 구별되고 구별된 하나님 앞에 옳은 성품. 예, 성경에서 말하는 성결은 하나님 말씀대로 세상욕심 없이 말씀의 정로로 걸어가는 것. 그 참 깨끗한 성도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욕심 없다고 그러면서 세상소원은 다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더러운 거다. 세상구정물이 잔뜩 들어있는 거다.
또 의의 사람이란 일반세상에서는 악한 사람은 벌주고 약한 사람 도와주고 선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말씀으로 자기를 인격화 시켜서 먼저 자신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입장에 말씀의 입장에 서고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 의의 사람이다. 다르지요?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줄 자가 누구냐 그 말이요? 이제? 누구겠어요?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줄 자? 그 앞 절에서 쭉 이렇게 보면 이 다윗의 신앙노선에서 나오는 그런 지도자. 그런 인도자. 그걸 우리가 알아야 돼. 그걸. 사람은 내버리고 그냥 무턱대고 하나님?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서 인도해서 가르치고 그렇단 말이요. 그러니까 교회라고 그럴 때는 우리 목사님들부터가 신앙사상으로 바로 딱 들어가야 돼. 그래야 교회를 바로 인도를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부터가 이게 안 들어있고 목사님들도 무턱대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옵소서. 복 주옵소서.’ 이게 뭐냐 그 말이요.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 말이요.
가정적으로 보았을 때도 집에서 부모가 바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만날 ‘하나님’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그러고 세상욕심 품고 ‘기도합시다’ 그러고. 그럼 이게 언제 자녀교육이 되고 언제 가정이 행복해지고 발전이 되고 언제 그래요? 언제?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게 어지러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바로 잡혀 나가요. 신앙사상도 바로 잡혀 나가고 가정적으로도 바로 잡혀 나가고. 이게 옳은 거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정말 그 가정 한심스러워. 이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충만하심이 우리 주님이 가신 그 길대로 발길을 밟아서 그 교훈으로 그렇게 살고자 하는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함께할 지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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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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