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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렘2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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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익환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2월 2일
설교 이익환 목사
예레미야 3 왕의 길 (王道)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5]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22:1-5)
우리 중에는 산 날보다 앞으로살아갈 날들이 더 많이 남은 사람이 있다. 반면 앞으로 살 날보다 이미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 한다. 어떤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영예로운 삶을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라면 그것만큼 비참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오늘의 삶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남유다 두 왕의 죽음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해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요시아왕이 죽고난 뒤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왕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시아 왕이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었던 자였다. 그가 여덟살에 왕위에 올라 스물여섯살 되던 해 성전수리 중 율법책을 발견하는 일이 있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시야는 자신과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옷을 찢으며 회개한다. 회개한 이후 그는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왕하 22: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이후 그는 개혁에 착수한다. 바알 제사장들을 폐하고 유다 모든 성읍에서 각종 산당을 헐어 버린다. 성전에 있던 우상들도 내다 버리고 남창의 집도 헐어버린다. 자녀를 몰록에게 바치는 제사도 금지시킨다. 그리고 언약책에 기록되대로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부활시킨다. 이런 요시야에 대해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런 그가 죽음을 맞이 한다. 므깃도에서 애굽의 왕 느고의 군대를 막다가 전사한 것이다. 대하 35:24-25,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모든 유다 백성들이 요시야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큰 슬픔에 빠진다.
요시아가 죽은 이후 유다 백성들은 요시야의 세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다. 그런데 석달 만에 애굽왕이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왕으로 삼는다. 요시아 왕과 비교하여 오늘 우리가 살펴볼 또 다른 왕이다.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내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렘 22:2-4,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유다 왕은 세상의 왕과 부르심 자체가 달랐다. 군림하기 위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기 위해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 왕이 따라야 할 지침 중에 하나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 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이스라엘 왕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왕이 따라야 할 가장 우선되는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야김에게 왕이 따라야 할 핵심적인 사항을 세가지로 정리해서 알려주신다. 첫째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둘째,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야김 왕이 이 세가지 사항을 조목조목 어겼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을 하나씩 살펴보자.
왕하 23: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애굽의 느고왕은 남유다에게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한다. 이에 여호야김은 백성들에게 은금을 징수한다. 징수한다는 히브리 원어는 ‘나가쓰’다. ‘강요하다. 지나친 압력과 폭정을 행사하다’는 뜻이 있다. 은 한달란트는 지금으로 하면 6000만원에 해당한다. 은 백 달란트면 60억원에 해당하는 액수다. 금 한 달란트까지 하면 약 70억 정도다. 여호야김은 이 많은 은과 금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세금을 어떻게 피해가는지 안다. 그들은 정부와 협상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조종한다. 그들은 자신들 밑에 있는 사람들의 봉급을 낮춘다. 그리고 왕은 하층민들이 당하는 현실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실제 세금은 사회 대다수의 하층민들에 의해 거둬지게 되는 것이다. 여호야김 왕은 백성들이 많은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는 동안 자신의 궁전을 화려하게 짓는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사실에 대해 가차없이 질타한다. 렘 22:13-14,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예루살렘 남쪽에 라맛라헬에 가면 궁전터가 있다. 고고학자 아하로니는 그것이 여호야김 왕의 여름 궁전이라고 밝혔다. 왕이 별장을 지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라가 위기에 있고 백성들은 많은 세금을 감당하느라 고통받고 있는데 그가 자신을 위해 화려한 궁전을 무리하게 지었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일을 시키고 그들에게 품삯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품삯을 받아야 하루 먹고 사는데, 그것을 받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는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라’는 왕의 사명을 감당하기는 커녕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상위 10%가 국가 총자산의 60%가량을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가진 자들이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게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약자를 압박해서 탈취하는 강자에 대해 왕은 그가 부여받은 권력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왕이 가야할 길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여호야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아와 비교하며 그를 질타한다. 렘 22:15-16,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요시야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고 평가했다. 그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했다고 했다. 예레미야는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거기서 역대 왕에 대한 평가가 갈리게 된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여호야김을 책망한다. 렘 22: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여호야김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게 하라는 왕의 핵심사명을 어긴다. 예레미야 26장을 보면 그는 예루살렘의 심판을 예언한 우리야 선지자를 잡아 칼로 죽인다.
한편 예레미야 36장을 보면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렘 36:21-24,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22] 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4]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하나님 말씀 앞에 떨었던 요시야 왕과 너무도 비교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여호야김의 최후에 대해 예레미야는 예언한다. 렘 22:18-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렘 36:30절에서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고 기록한다. 여호야김은 결국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최후를 맞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다. 왕과 그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그 존재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인 것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우리들 역시 왕의 역할로 초대받은 자들이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류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는 왕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된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게 되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의 길은 똑같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동일한 것이었다. 창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것은 다름 아니다. 다수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옳은 것,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군림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왕의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가 가신 길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고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왕의 길을 가려면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를 우리도 선택해야 한다. 나 자신의 생각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평생을 산다. 우리가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산다면 우리가 삶을 마감하는 순간 사람들은 우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살든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지금 죽어도 영예로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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