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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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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26절-35절.
26절-27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성령으로부터 시므온이 어떤 지시를 받았느냐?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그 말이요. 시므온에게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지시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으로 들어가고 성령이 시므온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는구나. 그러면 시므온이 어떻게 사니까 그런 복된 보장을 받느냐 그 말이요? 예, 25절 한 번 읽어봐요.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 어떻게 사니까 그런 복된 보장을 받느냐?
지금도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을 찾고자 하는 자, 또는 이룰구원으로 살고자 소원하는 자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서 역사하심을 우리는 믿고 또 그런 경험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또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 성령의 지시. 그러니까 무엇을 못 보는 것이, 시므온의 경우 무엇을 못 보는 것이 이스라엘인 자기에게는 슬픔인가 그 말이요. 무엇을 못 보는 것이? 예, 그리스도를 못 보고 죽는 것이 슬프다.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았다면 또는 두 번 만나보았다면 세 번 만나보았다면. 이게 무슨 말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인격적으로 자기 속에서 감화 감동성이 일어나면서 속에서 뜨거움이 일어나고 결심이 생기고 각오가 생기는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겁니다.
지식적으로 만나는 거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거와는 달라요.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자기 속에서 전 인격 면에서 감화 감동이 들어가는 겁니다. 남이 들을 때는 그냥 귀문으로 설치는 거지만 자기에게 있어서는 속에서 자기 일생이 뒤집어진 그 인격으로 변화된다 그 말이요. 그런 그리스도를 한 번만 만나면 되느냐? 아니요. 깨달음에 있어서는 연거푸 만나야 된다. 아니면 항상 그 감격에 살든지.
예, 요한복음 8장 51절에 보면 ‘주님의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한다. 살아서 주님을 만나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본질로서 계속 성장입니다. 이것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더라. 자기 속에서 사는 것으로서 계속 성장하고 있다.
27절에 또 보니까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또 어디로 들어갔어요? 모두 지금 감동으로 이게 일관하고 있어요. 어디로 들어갔어요?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구나. 때마침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아기 예수를 안고 오는 부모를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이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만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찾는 자로 주를 만나게 하시는데 성전 안에서 만나게 하시는구나. 성전 안에서. 밖이 아니고. 성전 밖의 사상이 아니고 성전 안의 사상에서 만나게 하시는구나. 그걸 알아야 돼요. 인도자들은 그 사상도 알아야 된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안 지켜도 되는데, 물론 어린아이기 때문에. 그러나 부모가 지켰거든. 이게 무슨 관계냐? 우리에게 주시는 것? 뭘 깨닫게 하는 거냐? 성장하기 전에는 말씀대로 인도를 받는 거다. 그걸 알아야 돼요. 우리는 또 여기서도 고귀한 자를 만나려면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고, 자녀를 고귀하게 키우려면 교육적인 사상이 성전 안의 교육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는 교육이다. 교육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래야 돼요.
예수님의 교육이 제자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든지 예수님의 그 마음 속 그 사상은 성전 밖의 사상을 가지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는 겁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성전 안으로 쉽게 말해서 성령의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사상의 교육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예배당 안에서 말은 성전이라 하면서도 성전 안의 교육이냐? 그러면 교회 밖으로 나가서는 성전 안의 교육이냐? 그건 아니다. 아닌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근데 우리는 예배당 안의 교육도 성전 안의 교육이요 예배당 밖에 나가서 해도 성전 안의 교육이요 대화를 해도 성전 안의 교육으로 들어가야 되고. 예, 모든 생활 이해타산 평가성이 성전 안의 교육으로 성질로 성격으로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그걸 알아야 된다. 밥 먹는 것도 성전 안에서 밥 먹는 것, 세상살이에도 성전 안의 소원 목적으로 세상살이를 하고 생계생활을 하고. 주님 앞을 떠나는 것은 그건 아니다.
28절-31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예, 종을 죄에서 놓아주신다는 말이 아니고 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나 저제나 얼마나 목매달듯이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즉 이스라엘의 위로자를 보았으니 이제는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말이지요.
그 한 번 생각을 해 봐요. 사람의 신앙사상을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이 말을 또 다른 말로 우리에게 비춰서 한다면 내가 한 이치도 못 깨닫고 내가 이렇게 죽을 수가 있겠는가? 한 이치라도 내가 깨닫고 죽어야지. 하나님 앞에 뭔가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내가 죽어야지. 세상을 떠나야지. 그런 어떤. 그 마음을 가진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또 함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않게 되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생활은 성전 안의 생활입니다. 성전 밖 생활이 아니라 성전 안 생활이요. 생활이라는 그 말의 의미는 진리권 생명권 아가페 애정권 사랑권 안의 사상이라 그 말이요. 그 사상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그건 전부 다 성전 안의 생활이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룰구원의 이치를 만나고 죽어야지요. 이룰구원이 없는 밖의 생활은 아무리 예수 믿고 충성봉사 했어도 자기의 이룰구원 즉 위로를 못 받고 죽는구나. 그렇게 살다가 가서야 되겠냐 그 말이요. 이룰구원을 이루고 산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만나서 산다 그 말이지요. 성령과 함께 하는 생활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30절로 31절을 보면 예비는 준비를 의미합니다. 예비는 준비를 의미해요. 인간으로 오셔서 만민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준비. 말하자면 ‘이 구원자가 어릴 때부터 어떤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는가? 준비를 하는가’ 보라는 말입니다. ‘그 자람성이 준비이니 그 준비과정이 어떤가 이걸 너희들이 한 번 봐라’ 그 말이요.
32절-33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라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해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방세상은 선악과 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이것을 자기의 기준적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기준적 지식이 뭐냐? 보통 보면 선악과 먹고 저주 받고 타락된 그 지식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 그 지식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는 세상에 대한 소원 목적성이 들어있는 기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기도를 하는 지식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구나. 그게 들어있단 말이요. 자기의 아는 지식에서 그 기도가 나온다 그 말이요. 예수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 지식이 빨리 바꿔져야 된다. 그 지식으로 살면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영원히 절대 정확한 지식을 못 가지게 됩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그 신앙지식이 일반지식 위에 성경을 둘러 붙인 것이 아니고 성경 속에서 나온 하나님의 뜻 그 지식을 자기가 가지고 살면 하나님 앞에 정확한 것이 틀림이 없다.
지혜지식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나 능력적인 면에서나 일반지식에는 전부는 혼돈이요 혼성이요 혼합이요 혼잡입니다. 그 신앙생활 하는 면에도 굉장히 혼란 혼돈을 겪게 되지요. 빛이 없는 어두운 세계요. 안 보인다 그 말이요. 구별이 안 된다 그 말이요. 빛을 비추면 모든 면에서 정체나 정형이나 정질 정색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모양 형태 색깔. 또 진리의 빛이라면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신앙사상이 동서남북으로 어디로 향해져 있는 건지 이것도 발견이 된다 그 말이요. 빛으로 향해져 있는지 어둠으로 향해져 있는 건지 이걸 알게 된다 그 말이요. 그걸 아는 그 자가 자기를 향해서 더 밝게 비추면 더 좋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진실한 요것으로 돼 나온단 말이요. 절대 정확한 것을 알 수 있어서 이것을 버려야 할 것인지 가져야 할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빛이 들어가면 치료가 되는 거요. 그런데 자기 것을 버려야 할 텐데 자기 것은 썩고 사망적이고 불에 타지고 근심 걱정될 일이고 뭐 세상 것으로서 잔뜩 이렇게 들어가 있는 건데 그걸 그 생각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 생각을 내려놓으려고 하지는 않고 있는 것을 다 갖다버리라는 것으로 착각을 한단 말이요. 그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없는 자에게 다 팔아버리고 갖다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말을 부자청년은 물질을 예수이름을 가지고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거든? 예수 따르면 이게 쓸 수 있는 건데 예수는 안 따르고 그것부터 버려야 하는 것으로 자꾸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을 한단 말이요. 오늘날 그런 기독자들이 많다. 부자냐? 그러면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내어주고 그러면 예수는 보여야지? 그 생각을 못 내려놔요. 그 생각을.
그럼 불쌍하고 가난한 자가 안 믿는 세상에만 있습니까 믿는 세상에 많이 있습니까? 믿는 세상에 쓰이려 그러면 자기가 따르면서 또 버리고 버리면서 따르고. 말하자면 쓰임쓰임이 그렇게 들어가야 되거든. 그러니까 부자에게는 버리는 것도 구원이지요? 예수님이 ‘버리라’ 하는 것은 그 부자를 위해서 하는 거지요? 맞잖아요? 버려지는 것도 구원이요 따르는 것도 구원이요. 그 순서적으로 보았을 때에 젊은 청년에게는 그렇더라 그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언행심사가 전부는 빛입니다. 예, 언행심사가 전부는 빛이에요. 구원이 아닌 게 없고 그 언행심사가 생명이 아닌 게 없고. 그런데 우리에게는 백 프로 그러냐? 그렇지도 않지요. 정신적 사상적 영적 면에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지느냐? 영과 육이 분리되느냐? 영원성과 임시성이 분리되느냐?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나누어지느냐? 시간적으로 분리되고 질적으로 분리되고 근원적 근본적으로 분리가 되느냐? 신앙의 사람은 분리가 다 돼야 되겠는데.
옛사람 새사람 영과 육의 생각들이 분리가 되느냐? 먼저 자기부터 분리되느냐 아니면 남부터 분리가 되느냐? 남부터. 자기는 안 되고 남부터 분리가 되면 자기는 자기를 못 쳐다보는 사람이 돼버려요. 자기는 자기를 쳐다볼 줄 알아야 돼요. 맞잖아요? 거울 앞에 자기가 서면 그건 자기가 아니고 딴 사람이지요? 안 그래요? 거울 앞에 자기가 서니까 그건 자기가 아닌 딴 사람이지? 자기가 서는 겁니까? 자기가 서 있습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먼저 자기가 보이는 거요. 먼저. 그 참 옳은 신앙이다.
스승목사님 만난 후에 ‘이 참 옳다. 이 옳은 것을 나만 가질 수 있느냐? 딴 사람에게도 전해줘야지.’ 말 맞지요? 말 맞잖아요? 누가 들어도 그건 신앙이야.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야 이놈아, 너부터 먼저 서라.’ 사실 그게 나부터 바로 서고 그 다음 이렇게 들어가는 건데, 이치적으로 예를 든다면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러 들어간다고 어떻게 물속에 들어갈 수 있나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도 죽는 거지만 네가 더 어리석다.
그래, 나중에 깨닫고 보니 하나님께서 ‘까불지 마라’ 하고 내 갈비뼈를 쳐버렸어. 그러니까 내 갈비뼈를 치는 여기에 버스가 동원됐지 운전사가 동원됐지, ‘오라이’ 하는 아가씨도 동원이 됐지 나와 전혀 또 상관이 없는 어떤 아기가 길을 인도를 쭉 가면 될 텐데 버스 앞으로 툭 튀어나왔단 말이요. 그놈도 동원이 됐어.
그런 사람들이 말하자면 ‘아, 김목사님 바로 세우려고 우리를 동원을 했구나’ 그걸 알까요? 몰라요. 깨닫는 내 쪽에서 그걸 아는 거지요. 그러면 그걸 모르게 되면 운전사 찾아가서 ‘나쁜 놈아’ 이렇게 하면서 ‘내 갈비뼈 부러졌으니 손해배상 내놔라’ 뭐 이런 식으로 또 들어갈 거란 말이요? 또 몰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부러질 수밖에 없는 그 갈비뼈가, 허허허. 그냥 부러지면 돈도 없는데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해석이 묘하게 들어가네. 허허. 그런 사고로 만들어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병원에 있다가 나오니까 또 그 뭐 돈 얼마 나오데? 하여튼 연관 안 되는 게 없어.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참 감사하다. 깨닫게 해주느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더 감사하구나.
근데 하나님의 역사에 깨닫지 못하고 얻어터질 대로 터지고 못 깨달으면 이런 처절한 것이 없는 거다. 이제. 그 처절성을 회복시키려면 깨닫는 거다.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서면 이건 처절한 지경에 빠졌던 자기가 엄청나게 올라가는 거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다. ‘네가 하나님 앞에 영광자로 만들어졌구나’ 그렇게 들어간단 말이요.
그런데 자기 속에 숨어있는 거짓 자기가 분별이 안 되면 무슨 짓을 하게 될까? 진리 팔고 사람 팔고 구원 팔고 스승 팔고 예수이름 팔아서 자기 사업 확장을 하려고 한다. 돈 받고 진리 팔아먹을 때에는 가롯유다가 다른 제자 몰래 연락들을 하더라. 그게 있어요. 소문내고 하지 않아요. 남몰래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아시고 ‘네가 할 일 빨리 해라. 빨리 해라. 네가 할 일 빨리 해라.’ 그 참. 사람이 영적 신앙 사상적 이치를 모르면 마귀 짓을 하고 다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의 세계서는 더 그렇다.
주님의 백성은 빛 된 치리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죄와 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 탈출해야 되고.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으면서 편안하기를 바라느냐? 아니요. 시련 연단을 각오를 해야 돼. 예, 사람을 살리려고 수영을 배운다면 수영 할 때 팔 무척 아파요. 물 그 별 것 아닌 것 같지요? 아니요. 요렇게 해서 앞으로 나가려면 어깨에 굉장히 힘이 들어가고. 물이라는 게 그렇게 참 마찰이 심해요. 별 것 아닌 거 같지요?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으면서 시련 연단을 받아야 된다. 그게 참 값진 거다.
진리생명의 말씀을 안 먹으면서 시련 연단을 받으면 이게 못 깨달아요. 계속 계속 시련 연단이고 자기 입장에는 죽을 지경이요. 시련 연단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서 생각이 되느냐? 그렇지 않아요. 좀 그래도 좋게 생각한다면 속으로는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께서 뭘 깨닫게 해주시려고 이런 사건을 주셨지.’ 이건 말은 맞아요. 근데 그 안의 내용 면에서 이게 내가 어떤 면에서 바로 서야 될는지? 이런 이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몰라요. 모른 채 그냥 고스란히 자꾸 당하는 거요. 그러는 사이에 한 평생이 넘어가는구나. 그러니까 그 시련 연단이 어떤 면을 깨닫게 하려는 그건데 이게 못 깨닫는다면 이게 참 문제다. 그 못 깨닫는 것이 더 처절하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깨달음이 없거들랑 거기서 나와야 되는 거요. 은혜 안 되고 깨달음이 없으면 나와야 돼. 나와서 어디를 가든지 일단은 거기서 나와야 돼. 그 다음에 빛이 있는 곳을 찾아야 된다. 어두운 세계로 들어가지 마라. 네가 죽는다. 시련 연단을 잘 받고 올라오면 영능의 실력자 되고 하나님 성품에 영광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부모가 주의 부모가 그 말들을 귀히 여기더라’는 말은 미래적인 것이라서 좋게 여기고 마음에 간직했다 그 말이지요? 이미 1장에서 1절이요? 천사로부터 엘리사벳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입니다. 1장이지요. 엘리사벳으로부터 들은 얘기들이다. 부모도 그런 지식을 갖고 있으면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어떤 자식으로 자라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빛의 역할이 될 것이며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될 일인지 아닌지 우리 부모들은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식을 어떻게 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지 그 말이요.
34절: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의 기준이라 그 말이요. 이스라엘의 기준. 기준 되는 지식. 그 다음에는 이제 활용을 할 수 있는 거요. 기준 되는 지식만 가지고 있고 활용을 못한다면 이건 그만한 가치가 없다. 자기가 연관관계성적인 면에서 커지질 않아요.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도 신앙지식 면에서 많은 메시지들이 있지만 이 메시지 중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기준이 나와요. 이 기준. 지식의 기준 지혜의 기준 도덕성의 기준에서 진실 사랑의 기준 거룩의 기준. 기준이 다 나가는 거요. 기준이 나와야 돼. 예, 그 다음에 이제 자기 개인적으로 그걸 알고 인격화 된다면 기준적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그렇게 되는 거요. 이제. 그건 죄는 아니요. 주 안에서는 죄 정함이 없어요. 주 밖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일을 해도 그건 하나님 앞에 죄요. 죄.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없다. 너의 이룰구원이 없구나. 일반적 사업이 패하고 흥하고가 아니고, 또 종교적 사업이 패하고 흥하고가 아니고 사람 자체를 두고 흥하고 패하고 말을 하는 거라 그 말이요.
예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 완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두고 ‘부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부자냐’고 그 기준이 되는 거요? 물질적 부자 사업적 부자 세상적 부자. 그 아니지요?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사람에게 기준적인 사람. 이게 최고요. 최고 참 가치가 있다. 이 기준적인 사람이 하는 일은 자기처럼 교육이 들어가더라. 그 교육의 방편 면에 있어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이제 관계성이 당겨졌다가 밀었다가 칭찬을 했다가 책망을 했다가 이런 게 이제 들어가는 거지요? 예, 올리기 위함이요.
그 어린 아기들 가만히 보면 어린 아기는 자라는 거지요. 저기서 엄마가 옵니다. 시장에서 엄마가 옵니다. 집 지키다가 어린 아기가 엄마를 보고, 딴 여자를 본 게 아니에요. 엄마를 향해서 냅다 달려요. 그러다가 엎어지는 수가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까? 엄마를 향해서 달리다가 넘어졌단 말이요. 그럼 그 성격이 나쁜 넘어짐이요? 그건 아니지요. 엄마가 오셔서 더 사랑을 합니까? ‘얼마나 아프냐? 집에 가서 약 바르자’ 엄마가 그렇게 나와야지 ‘이놈의 새끼, 왜 먼데 쳐다보다가’ 자꾸 이런 식으로 들어가면, ‘바보같이 넘어지긴 왜 넘어져’ 이래놓으면 그게 뭔가가 교육적인 면에 서운하지 않아요? 뭔가? 그러면 그 아이의 마음이 비뚤어져 버린다. 엄마의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나가서야 되겠나?
어떤 엄마는 ‘좀 주의를 하지’ 이런 것도 있고, 또 어떤 엄마는 너무 사랑이 많아가지고 그냥 그 아기를 엎고 오고. 여러 가지 형태 있어. 거기에 따라서 그 아이의 속에서 자라고 느끼는 그것이 달라지더라. 또 어떤 엄마는 가까이 와서 붙들어 세우는 게 아니고 ‘일어나거라.’ 그 아이는 또 엄마가 일으켜 주기만을 바라는 거지.
사실 애들 넘어지면 다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지요?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거나 뭐 못 일어나거나 그런 거는 아마 극히 드물 거요.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거라.’ 애기는 울면서 엄마를 쳐다보고 자꾸 일으켜 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심리로서 울고 있어요. ‘이놈의 새끼, 안 일어나?’ 허허허. 안 일어나면 이제 엄마가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애기가 어떡해요? 거기서 계속 울고 있을 거요? 어쩔 거요? 자기 목만 아프고. 그래서 어린아이가 날 때부터 목이 쉬는 애는 별로 없을 거요. 근데 가만 보면 많이 운 아기는 목이 막 쉬어있어. 목이 막 쉬어있으면 이게 부모가 늘 때린 거냐? 아니면 애 성격 자체가 이게 고집스러워서 그런 거냐? 하여튼 부모님들은 잘 지혜롭게 교육을 시켜요. 어쨌든 우리교회서는 어린 애기들이 목이 쉬어가지고 막걸리 먹은 사람들처럼 그러면 안 돼요. 소리 꽥꽥 질러대고 그러면 안 돼. 특히 어릴 때는 사랑으로 길러야 되고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이 젖줄을 통해서 아기에게 많이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격 성질 성분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품을 입은 자는 흥하고’ 이렇게 돼있단 말이요. 어떤 사람이 흥한 사람이냐? ‘흥하고 입지 못한 자는 패하고.’ 이 무슨 말이냐? 전부는 정죄되고 심판이라 그 말이요.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많은 사람의.’ 이게 장사꾼을 향해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사람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요. 인격과 성품의 성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말이요.
이 타락된 세상과 종교계에서는 참 사람이 없고 사람기준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사람 망한 것을 잘 모르더라. 세상 속화된 교회도 사람인격이 망하고 흥하는 것을 잘 모르더라. 주보를 보면 그렇고 설교를 들으면 그렇고 기도를 들으면 그렇고. 자기 인격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더라. 이것이 거짓된 말세교회의 하나의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본질인 주님의 인격을 모르면 사람 흥하고 패하는 것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인도를 하려면 그 점을 잘 알아야 돼요. 그래야 인도를 할 수가 있어요. 건질 수도 있고 인도 할 수도 있고 가다가 곁길로 가는 것을 또 돌이키게 할 수도 있고.
어린애들이 바깥에서 나쁜 친구들이 부릅니다. 부모가 어머니가 봤을 때에 ‘가지 마라’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눈치껏 보고 ‘맛있는 거 있다. 요거 먹어라’ 그러면 그 사이에 이제 친구들은 갈 거 아니요? 여러 가지 방편이 있는 거지.
비방을 받는 표적은 헐뜯기는 표적. 왜 헐뜯기는 표적이냐? 이 바리새교인들이 좀 그랬지요? 유대 종교인들이랑? ‘당신만 옳으냐? 나도 옳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당신이 틀렸다’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당신이 틀렸다’ 말을 하는데 그 말이요. 그러니까 ‘당신만 제일이냐’ 그 말이요.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또 보면 일반인들뿐만 아니고 이 교회 종교인들도 예수가 틀렸다고 하던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틀렸다고 하던데?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은 하늘나라 천국복음을 전했는데 목사인 자기는 성경가지고 세상을 전하고 있다는 그 말이요. 그 말의 의미가. 말속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돼요. 표면적으로 액면적으로 말은 안 했어도 말 속에 그 은밀하게 숨어있는 말을 찾아야 돼. 그걸 들을 줄 알아야 돼. 참 현명한 사람이다.
그 다음에 또 보면 진리는 영원히 인격적으로 옳음인데 육의 사람은 그것이 안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안 받아들여져. 그 희한하지요?
35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문제 1번. 이 말은 일반적인 남의 허물을 폭로한다는 말이다? 맞아요 틀려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지금?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반적인 남의 허물을 폭로한다는 말이다? 맞아요 틀려요? 빨리 하고 점심 먹어야지. 틀리지요? 예를 들면 백 점짜리 정답에 의해서 자기의 점수가 드러나듯이 그냥 드러나 버리잖아요. 주님의 진리에 의해서 자기의 마음 틀린 것이 자꾸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그 말이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두 번째. 남의 허물만 자꾸 지적을 해야 한다? 맞아요 틀려요? 그 다음 세 번째. 무조건 고치라고 하면 된다? 맞아요 틀려요? 왜 틀려요? 근데 이게 참 공부하는 학생들 가만 보면 틀린 문제는 자기가 알아야 되고 틀린 문제를 옳은 답으로 이렇게 써야 되겠는데 옳은 답을 알려고 하지를 않고 틀렸구나만 안단 말이요. 이러면 옳은 것을 모르면 그 문제 또 나오면 또 틀릴 거 아니요? 고쳐야지. 맞잖아요? 근데 인격에 관한 문제라서 이게 영 잘 안 고치려고 하거든. 이게 병이야. 지금. 그 다음에 고치려고 한다면 정답을 가르쳐주고 고치라 이렇게 돼야 해요. 학교 시험 치면 선생이 다 가르쳐주고 시험을 치는 거지요? 평소에 다 가르쳐주고. 예수님도 그래요. 하나님도.
그 다음 네 번째. 정확하고 옳고 바른 척도만 알게 되면 된다? 맞아요 틀려요? 맞는 거지요? 누구든지 자기의 나쁜 마음 또는 비밀 된 허물을 드러내려 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걸 드러내려면 죽음도 각오해야 된다. 맞아 죽을 것도 각오해라.
그런데 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는 그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영원히 옳고 바르고 거룩하고 행복한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주기 위함이고. 맞는 말입니까? 그 다음에 두 번째. 잘못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람 자신이 죄 아래 사망 아래 있게 되고 고통이 되고 병이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멸망을 받기 때문이다. 그 말도 맞습니까?
예, 하나님 기준으로 맞추어진 사람으로 되는 것이 즉 하나님의 성품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천국복음이고 이 땅에서 해야 하는 하늘나라의 일이고 곧 구원운동인 것이라 그 말이요. 예수님이 그 일하러 왔다 그 말이요. 예수님이 아니면 그 일할 분은 아무도 없단 말이요. 절의 중들은 산꼭대기 올라가서 자꾸 두들기고만 있을 거고. 뭐 있어야지. 가르쳐 준다면 또 뭐 자꾸 이게 두들기면서 자꾸 성경구절 외우고 있을 거 아니요? 뭐가 돼요? 교육이? 성경구절 외우면서 천주교인들은 이게 불교인처럼 염주를 이렇게 하면서 뭐라고 그러더라고. 그 자기만 외웠지 돼야지. 이게 사람에게 교육의 정신이 돼야지. 이건 안 되는 거지요.
말세 된 거짓된 교회가 사람에 대한 구원운동이 아니고 물질에 대한 관한 육의 운동 세상운동 세상살이에 관한 운동 신비주의 운동 세상부자 되는 복복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이건 다른 복음이다. 하나님 기준에서 사람의 마음 정신이 비뚤어진 것을 전혀 모른 채 예수 믿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그 지식을 하나님 앞에 바로 하면 되겠는데 그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참 희귀하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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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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