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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7: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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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8.9.9 주일 설교 https://hopech.kr 희망의교회 |
진정한 믿음
눅17:1-10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거룩하고 능력 있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런데 우리는 삶속에서 시험과 환난을 당하며, 그럴 때마다 두려워하며 흔들립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를 힘들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믿음이 약하고 성숙되지 못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을 위임받아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쳤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절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더 큰 믿음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 큰 믿음일까요? 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살펴봅시다.
실족하게 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1-2절)
‘실족하게 하는 것’은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놓은 덫이나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놓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신앙에 장애물이 되어 예수님을 거부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족하게 하는 일은 너무나도 심각하고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 낫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는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 가난한 자, 죄인과 세리, 어린아이와 여자 등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약한 자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작은 자’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작은 자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러기 쉽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작은 형제 하나라도 함부로 하여 실족하게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며, 우리의 중요한 사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여 세우지 못하고 넘어지게 한다면,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주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연자 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심각하고 엄중한 교훈인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작은 자,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일까요? 대개 말과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입니다. 말을 함부로 할 때, 교만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사람을 대할 때,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며 남을 무시할 때 형제를 실족하게 하기 쉽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을 당한 후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를 떠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일로 상처를 받아 위축되거나 부정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충격을 받고 습관을 고친 적이 있습니다. 본래 저는 말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임에서는 늘 대화를 주도하다시피 했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논쟁을 잠재우곤 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거나 찬양연습을 할 때도 늘 사람들을 웃기며 즐겁게 하느라 말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모두들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잘못 듣거나 오해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두세 번 겪은 후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말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제 말에 상처를 받는 성도가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조심을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괜찮은데,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누군가 그 일로 시험에 들거나 상처받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 넘어진 형제는 없습니까? 만일 내가 형제를 실족하게 했다면, 그것은 그 형제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연약한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후, 스스로도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실족하지 않는 방법은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3-4절)
우리는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받거나 넘어지기 쉽습니다. 내색은 잘 하지 않지만, 목사인 저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참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실족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조심할까요? 어떻게 실족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용서함으로써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교훈하셨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먼저 경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교훈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이것은 교회가 범죄한 형제를 경고하고 권면하여 회개하게 함으로써 회복시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경우에도 이 말씀을 참고하면 됩니다. 나에게 잘못하거나 죄를 범한 형제가 있거든 마음을 닫아버리거나 감정을 품지 말고, 조용히 그 형제를 찾아가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가 잘못했다고 하거든 즉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도 그 형제가 또 나에게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잘못했다고 뉘우치고 회개하면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은 끝까지,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남이 잘못했을 때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 번이나 일곱 번만이 아니라 무한히, 끝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에게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무한하신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잘못을 끝까지, 무한히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더 큰 믿음을 주시라고 청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5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여기 나오는 뽕나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뽕나무가 아닙니다. 이 나무는 돌무화과 나무인데, 높이가 10-15m까지 자라며, 가지는 40m까지 퍼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뿌리가 넓고 깊게 뻗어 있어서, 이 나무를 파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은 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이런 일들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질을 강조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고 하신 것은 믿음의 분량보다는 진정한 믿음의 질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명력 있는 믿음입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크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라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믿음이란 신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진정한 믿음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인생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의 영웅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생각과 계산과 판단과 뜻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오직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할 때,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경우에도 안심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랍고 은혜로운 일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시며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종의 자세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7-10절)
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만일 제자들이 생명력 있는 참된 믿음으로 연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고, 자신을 실족하게 하는 자를 무한정 용서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러한 제자들을 보고 칭찬할 것인데, 그 때 제자들은 자기만족에 빠지고 교만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전한 순종에 대한 보상과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기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무익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하루 종일 밭을 갈거나 양을 치며 그에게 맡겨진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주인이 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상을 차려 대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종은 주인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상을 차려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그에게 명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종도 자기는 그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한 것뿐이기에 어떤 대가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을 가진 제자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겸손한 믿음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께서 교훈하신 말씀을 온전히 순종합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끝까지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실족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렇게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 해서 교만하지 않으며, 대가와 보상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무익한 종이며, 맡겨주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합니다. ‘무익한 종’이라는 말은 쓸모없고 불필요한 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순종과 수고에 대해 전혀 보상과 사례를 기대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이 담긴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나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고, 독생자의 보혈로 구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구원을 우리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순종하며 헌신한다 해도,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힘을 다해 충성하고 봉사한다 해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교만해지며, 어떻게 대가와 보상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께 충성을 다했으며, 죽기까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바울은 그렇게 죽도록 충성했지만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교회를 그토록 핍박했던 자기를 사도로 불러 사명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것을 감사하며 감격했습니다.
어떤 믿음이 참된 믿음일까요? 참된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놀라우신 일들을 경험하게 합니다. 내 생각과 계산과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시든지 기쁘게 받아들이며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역사를 경험했다 해도 결코 교만해지지 말고 겸손하며, 형제를 끝까지 용서하는 성도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힘을 다해 충성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했다 해도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조금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을 다하고,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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