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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2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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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00256 |
예수의 평화!
요 14:23-29,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9년 5월26일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고별설교
사람은 너나 할 거 없이 평생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이런 걱정과 두려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사는 형편이나 사회적인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혼하거나 하지 않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가족이 있으나 혼자 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맡은 교회가 커도 걱정이고, 작아도 걱정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자기연민에서 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노숙자 신세를 개의치 않는다면 근심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걸 용납하지 못하기에 죽을 때까지 근심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간혹 늘 만족스럽고 행복하여 근심이라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는 완전히 도사가 되었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일 겁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근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요 14:27b)는 말씀을 결론처럼 기록했고, 시작 부분인 요 14:1절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썼습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하기 시작한 지가 제법 되었을 때입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공무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런 제도가 실행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인 숫자가 크게 줄 겁니다. ‘여호와의 증인’ 교인 중에서 적지 않은 숫자의 젊은 남자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군복무를 거부해서 감옥살이했습니다. 이제는 군대체복무 제도가 도입될 예정입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소위 고별설교에 해당합니다. 일종의 유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고아처럼 지낼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혜사(중보자) 성령을 보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26절). 성령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평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27절이 다음과 같이 그 말씀을 전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라는 말씀에서 평안은 에이레네라는 헬라어 번역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샬롬으로 나옵니다. 평안보다는 평화라고 번역하는 게 원어의 의미를 살리는 데 더 적합합니다. 평화 안에 평안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구원과 같은 차원입니다. 평화, 즉 샬롬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도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제기구나 국내 단체도 많습니다. 심지어 정당 이름에도 종종 평화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자신이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다를까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요?
세상의 평화
세상의 평화는 싸움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게 세상에서는 최선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동물의 왕국이 될지 모릅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의 하나는 노사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노동의 대가를 더 많이 받으려는 노동자들과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운영진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흐릅니다. 양측이 협상을 통해서 타협점을 찾으면 평화가 유지되고 찾지 못하면 평화가 깨집니다.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나라가 수준이 높은 나라겠지요.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싸움은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으나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일정한 선에서 타협할 겁니다. 그걸 평화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똑같습니다. 교양의 수준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 부부는 종종 싸웁니다. 서로 힘겨루기하는 겁니다. 한쪽에서 져주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힘에 밀리기도 합니다. 크게 싸우지만 않으면 평화로운 부부, 평화로운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강의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대화 방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서로 이해하면서 가능한 표시 나지 않게 싸우지 않는 걸 우리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내면은 어떤지 보십시오. 내면세계가 평화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화, 분노, 적개심에 사로잡혀 삽니다. 그게 남을 향하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합니다. 불안한 내면을 다스리는 방법을 강의하고 배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거나 취미 생활을 하라고, 또는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기도하라거나 성경을 읽으라고 하겠지요. 자기 내면세계에 안정감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노사관계, 국제관계, 부부와 가정,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억제함으로써 평화를 얻으려는 세상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런 공부와 실천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남이 볼 때나 자신이 볼 때 세련되게 사는 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얻지 못한다는 걸 여러분도 경험적으로 알 겁니다. 이 세상은 평화를 진척시키지 못했습니다. 겉모양만 약간 달라졌을 뿐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많은 걸 이루었지만 우리의 내면세계는 풍성해지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게 살려고 돈도 벌고 공부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무리 늘어나도 평화는 거기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는커녕 오히려 싸움을 부추기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서로 약 올리는 방식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겁니다. 정치인들은 상대방을 무조건 트집 잡고 물어뜯습니다.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프로 격투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은 남을 흉내 내지 않으면 불행한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실질적인 평화에서 소외되고 있습니다. 거짓 평화에 머뭅니다. 이런 것을 못 견디는 사람들은 세상에 관심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서 자연과 벗하며 삽니다. 그것도 답은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평화가 보장되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이 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에 떨어집니다. 체념이나 냉소주의로 삶을 풍요롭게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게 본문이 말하는 세상의 평화입니다.
예수의 평화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고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예수의 평화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이 따릅니다.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하면, 교회에 충성 봉사하면 평화를 선물로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과 사랑이 충만한 존재라면 왜 일방적으로라도 세상에 평화를 선물로 주지 않으실까요?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이런 질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에 그들이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 가지 사실만은 그들에게 분명했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그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붙들고 그들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그 엄혹한 시절을 뚫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근거가 있을까요?
평화가 없다는 말은 근심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근심하는 이유는 자기 염려와 자기 연민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이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근심하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여기 난파선이 있다고 합시다.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서로 구명정에 올라타려고 싸웁니다. 수영 선수가 있다면 그는 그런 싸움에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구명복을 입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안전이 보장되었다는 사실만 분명하다면 우리는 싸움에 끼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반평화적인 행태도 따지고 보면 자기에 대한 불안에서 나옵니다. 단적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 막연하게 평화롭게 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인권과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불안이 너무 강렬해서 아무리 많은 행복한 조건을 갖고 있어도 영혼의 평화와 안식은 얻지 못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와 다른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자기에 대한 염려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예수 십자가 죽음이라는 차원입니다. 또 십자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고 싫증을 내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표피적으로만 알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은 전혀 새롭게 느낄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더는 내려갈 곳 없는 인생 나락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생 나락에 떨어졌으니 우리가 인생 나락에 떨어진다고 해도 불만이 없습니다. 이 순간부터 그는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자유를 얻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다음의 사실 역시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인생 나락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는 결국 거기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처럼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졸지에 당한 끔찍한 죽음이나 공자나 부처처럼 천수를 다 누린 죽음이나 죽음은 똑같이 인생 나락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고통 속에 죽는 사람과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과 같은 인생 나락에 떨어진다고 해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그 순간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겁니다. 이런 경험을 실제로 해보셨는지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예수와 하나 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예수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와 실제로 하나 되었는지, 예수를 실제로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1서 5:18 절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생명의 절정
다른 하나는 예수 부활이라는 차원입니다. 또 부활 이야기인가, 하고 지루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설교는 부활 한 가지를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웃과 친하게 지내고 희생적으로 살고 교회에 충성 봉사하며 기도하고 헌금하라는 말은 없어도 되지만 부활을 말하지 않으면 복음 설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세계를 가리키는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절정입니다. 이런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해는 가도 믿기 힘들다고, 믿기는 해도 실감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그 입구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는 세상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비유적으로 멋지게 설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C. S. 루이스입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2차원의 납작한 사람들이 정육면체를 상상한다면 여섯 개의 정사각형이 동시에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정사각형의 차별성을 없애거나, 여섯 개의 정사각형을 나란히 늘어놓아 그것들의 단일성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우주>에서 재인용). 루이스의 비유를 오늘 설교에 적용하면 예수의 부활은 정육면체입니다. 우리는 납작한 사람들이라서 그것을 실체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육면체를 흘깃이나마 본 사람들입니다. 자신들도 예수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변이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라는 말을 여전히 실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서 일상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즘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말은 생명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으니 그걸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운명에도 하나님 나라는 와 있습니다. 오래 투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줌의 햇살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난민 신청을 낸 외국인은 정식으로 난민 인정을 못 받고 체류 허가만 받아도 행복합니다. 그는 이제 마음 놓고 공장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즉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 조건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고 거기에 연민을 느낍니다. 예수 부활은 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현실이 된 사건입니다. 이를 알고 믿는 사람은 자기연민과 자기 근심에서 벗어납니다. 이는 마치 디즈니랜드에 들어간 어린이가 숙제 걱정을 완전히 잊는 거와 같습니다. 그 어린이의 영혼은 꿀을 따라서 꽃에 심취하는 벌처럼 오직 한 가지 사실에 초롱초롱합니다.
오늘 설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와 더불어 인생 나락에 이미 떨어졌을 뿐 아니라 생명의 절정을 약속으로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반복해서 인생 나락에 대해 걱정하게 만들고, 생명의 절정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싸움을 봉합할 뿐입니다. 봉합이 안 되면 전쟁과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싸움을 봉합하는 방법을 고안해내느라고 평생 죽을 고생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면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실제로 알고 믿는 사람은 그런 세상의 방법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생명의 절정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신앙의 기준이 근심의 양과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상황에서도 이에 대한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마 6:31 절에서는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마 11:28 절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처럼 근심과 두려움과 자기 연민에 묶여서 사는 분들은 없습니까? 다시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예수의 평화가, 즉 예수를 통한 평화가 여러분을 근심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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