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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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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 성경에 용이 나오는데 용이 뭐냐? 이 용은 실상적 실물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용을 그릴 때 머리에 뿔이 달리고 입에 뭘 물고 있는 것으로 그리지만 사실은 상상의 동물이다. 이런 용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사상과 정신적으로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하는 인간의 허욕심, 허영심, 영웅심 등 땅의 것으로 똘똘 뭉쳐진 것을 표현하는 거다. 사람들이 이 사상으로 사는 것이 용을 자랑하는 거다.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 운동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본문
4장.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이 아내와 동침을 하니 잉태가 됐다. 잉태가 되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죄 역시도 사람 속에서 잉태가 되면 밖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속에 들었던 것은 나오게 되어있다.
죄성, 안 좋은 생각, 미운 생각, 세상 염려 걱정 근심 이런 게 다 사람 속의 독이다. 이런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으면 이것은 천국 것이 아니라서 세상 쪽으로 나오게 되어있다. 자기 속에 천국성이 아닌 세상 소원 목적이 들어있으면 다른 사람과 연관이 될 때 내 속의 세상사상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가 된다.
사람이 선악과 먹은 사상과 소원 목적으로 하는 것은 그 무엇을 해도 다 죄다. 생명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뭘 배웠던 들었던 받아진 것은 그것이 내 속에 잉태가 되기 때문에 언젠간 그것이 낸 몸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내 속에 미움이 들어있으면 이걸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은 살인을 낳게 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것도 좋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을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요, 출생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자라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역사를 하시는 거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죄를 지은 인간이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죄인도 하나님의 역사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에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전제가 되는 거다. 이것은 구원을 얻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도 구원이 들어있는 존재라고 하는 희망을 주는 거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을 불택자라고 단정을 할 수는 없는 거다. 그 사람이 택자인지 불택자인지의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편에서는 일단 택자로 보면서 그 사람에게 복음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이 사람은 구원을 얻기로 예정이 된 사람으로 보면 된다.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하나님의 지으심을 보면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그 씨대로 난다. 사람에게서 남녀든 사람이 나오는 법이고, 사자에게서 사자새끼가 나오는 법이지 기린이 나온다든가 물소가 나온다든가 그런 법은 없다. 씨는 씨대로 나는 거다. 씨를 심으면 그 후손이 나온다. 이게 눈에 보이는 법칙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치를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했으니까 보이는 것을 가지고 안 보이는 것을 찾아야 한다.
진리에서 나온 자녀들은 진리로 들어간다. 반대로 비진리를 받으면 비진리로 커져 나온다. ‘비진리로 했는데 진리가 되더라’ 이런 법은 없다. 씨는 씨대로 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도 다 같이 예수를 믿지만 ‘아, 이 사람은 무슨 씨를 받았구나’ 이게 있는 거다. 세상적인 신비주의, 구복주의 이런 게 다 비진리인데, 비진리를 받으면 그 정신과 사상이 나오게 된다. 이건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씨다. 구원의 씨는 진리생명의 씨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님의 교훈밖에 없다.
‘예수=구원’인데, 이 예수님이 당신의 이름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다른 게 있을까? 그 이름이 예수고, 예수가 하는 일이 구원이다. 이름과 하는 일이 똑같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이 바로 당신의 일이다. 당신의 일이 바로 당신의 이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시는 것과, 삶과, 교훈과, 죽고 사는 게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름과 하는 일이 분리된 게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 이름의 뜻과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아무리 이름을 좋게 지었어도 이름의 뜻과는 달리 딴 짓을 한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아벨은 양 치는 자,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었다.
3절-5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아벨은 하나님 앞에 양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벨이 양을 드리면서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아벨의 마음을 말하는 거다.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대로 행동이 나오는 것이니 드리는 제물이 아벨의 마음을 말하는 거다. 그 마음이 증명이 되는 거다. ‘첫’ 하면 마음에 척 들어오는 게 최고의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첫 새끼’는 최고로 좋은 것, ‘그 기름’은 열매의 최고로 귀한 진액이 기름이니까 자기의 전심전력을 의미한다. 즉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데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이 누구의 제물은 받고, 누구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느냐?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왜 이렇게 된 거냐? 제물이 문제냐, 제물을 드리는 마음이 문제냐? 이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가인은 피가 없는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게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이걸 몰랐던 모양이다. 이걸 볼 때 지금의 우리도 예배의 태도가 아주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를 아무렇게나 여기면 자기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렇게나 여김을 받는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예배태도가 그 사람이 은혜를 받는 태도다. 그런데 가인은 그 태도가 안색으로 나타났다. 안색은 사람의 얼굴빛인데, 기분이 좋고 마음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얼굴이 확 핀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더더군다나 예배 시에 그래놓으면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이러면 안색이 좋지 못하게 나타나는데, 그 다음에 그 마음이 어디로 발산이 되느냐? 자기 집 식구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발산이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예배를 잘못 드렸다’ 이렇게 되는 거다. 성경에 보면 해가 질 때까지 화를 품지 말라고 했다. 주님과 관계가 좋지 못하면 속히 풀고 주님으로부터 만족을 얻어라. 길에 있을 때, 인생의 삶이 진행이 될 때 풀어라.
6절-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선이 뭐냐? 여기서 아벨의 예배와 가인의 예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아벨은 하나님 앞에 선이다. 왜 하나님이 그걸 선으로 여기시는 거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게 선이다. 그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찾는 것이 선한 생각, 선한 마음이다. 그런데 아벨은 이게 없었던 것 같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교회가 누구의 선을 찾기 때문에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신 걸까? 교회가 온통 인간 자기가 좋아하는 것,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소원 목적하며 나가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의 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은 성품적인 거다. 하늘의 것, 영원히 가는 것, 변질이 없는 거다.
여러분들이 부부가 되기 전에 상대를 처음 만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지고 상대를 택했느냐,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선택을 한 거냐? 재산, 재물, 직업, 나이, 학벌 이런 거는 전부가 임시성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이런 걸 중심으로 보시지 않는다. 부부간에 서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마음으로 만났다면 이게 처음사랑이 되겠는데, 이렇게 만났다면 서로가 나이를 먹더라도 그 마음은 변치를 않는다.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자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주님은 진리생명으로도 찾아오시고, 교훈적으로도 찾아오신다. 이 찾아오심 속에는 우리가 그 분을 맞아들이면 그 분으로 인격과 속성이 자체화 되는 게 들어있다. 이것이 주님과의 대면이다.
술람미 여자에게 신랑이 찾아왔으면 술람미가 얼른 문을 열어주면 좋겠는데 변명이 많다. ‘드러누워 있어서, 귀찮아서’ 이러다 보니 신랑이 기다리다가 가버렸다. 술람미 여자가 일어나니 신랑을 찾아보니 있나? 그래서 신랑을 찾느라고 돌아다닌다. 우리도 주님을 바로 모르면 주님을 이렇게 취급을 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무시를 당하고 주님은 떠나 버린다.
또 보면 술람이 여자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신랑이 그 문을 그냥 확 따고 들어가든지 부수고 들어가든지 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말해주는 거다. 우리 주님은 억압 강압이 아니라 성도가 자원적으로 마음을 열기까지 기다리는 분이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 교훈적으로 찾아오시는 것도 알아야 하고, 사건적으로 찾아오시는 것도 알아야 하고, 환경적으로 찾아오시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에 눈치가 빨라야 한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죄가 문에 엎드러져 있다. 죄의 소원은 너에게 있다. 죄가 들어오려고 문에 딱 엎드려 있다. 누구만 지나가면 잡으려고? 가인만 지나가면. 그러면 가인과 죄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죄가 가인의 마음을 좋아한다는 거다. 죄가 가인에게 ‘나와 같이 살자’ 라고 한다는 거다. 그리고 죄의 소원이 누구에게 있다? 가인에게 있다. 그러니까 죄와 가인이 한 몸, 한 통속이다. 이 말은 곧 가인이 동생을 죽인 것이 선이 아니라 악행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죄가 가인의 소리를 듣고 가인에게 다스림을 받을까? 이건 가인의 마음을 말하는 거다. 즉 ‘내가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게 아니라 ‘너는 네 속에서 죄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악한 사람들은, 비진리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죄 된 마음대로 그 죄를 자기가 좌우지 하는 거다. 죄를 다스리는 거다. 죄를 안 짓도록 다스리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죄 된 마음이니까 이 죄된 마음을 따라 어찌하든 다른 사람도 죄를 짓게 하려는 마음이 나가는 거다. 이게 가인의 입장에서는 죄를 다스리는 거다.
깡패대장이 졸병들을 다스릴 때 ‘너희들,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만 하라’ 라고 하느냐, ‘도둑질을 하던 뺏던 많이 가지고 오너라’ 라고 하느냐? 많이 가지고 오라고 한다.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으면 이 나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도 나쁜 짓을 하게 하게 하는데 이게 자기 입장에서 죄를 다스리는 거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고했다는 것은 어떤 말을 했다는 거다. 무슨 말을 했을까? 둘이 들에 있을 때 형이 동생을 죽였는데, 이에 앞서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너 언제 어느 산으로 가느냐?’ 이런 게 아닐까? ‘너 산에 갈 때 내가 농사짓는 밭 옆으로 와라. 그러면 고구마를 캐서 주겠다’ 이 말을 했을까? 아니면 ‘우리 언제 들에서 만나자’ 라고 했을까? 어쨌든 감쪽같이 동생을 죽일 수 있는 어떤 꾀가 들어있는 달착지근한 말을 했을 거다.
그 후에 어머니 아버지도 볼 수 없는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쳐서 죽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듯이,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듯이 악인이 의인을 죽였다.
9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묻는 거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 따먹은 뒤에도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셨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아무리 깊이 숨더라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다. 마음 속에서 하는 이 말을 어떻게 감추겠느냐? 못 감춘다. 감춰진 자기의 그 마음이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말하는 게 영 그렇다. ‘방금 전까지도 여기 있었는데 양을 끌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형제인데도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해 말을 하는 것 같다.
10절-11절: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땅이 입을 벌렸다는 것은 무덤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즉 ‘네가 아우의 피를 흘렸구나, 죽였구나’ 라는 뜻이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살인을 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저주가 계속 따른다.
12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밭을 갈아도 생산이 없다. ‘아이고, 여기는 농사가 안 되는구나’ 해서 저리로 가서 농사를 지어도 그곳 역시도 생산이 없다.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농사를 지어도 생산이 없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유리다. 떠도는 거다. 생산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살겠는데 생산이 없으니 거기에 있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니 막 돌아다니는 거다. 이건 저주가 그 사람을 따라다니는 거다.
열매를 얻으려고 밭을 갈아도 생산이 없으면 유리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생산이 없으면 유리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 교회에서 말씀에 은혜를 못 받으면 이 사람은 뜨내기 교인이 돼버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이걸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 보면 지금의 교회의 교훈이 생명의 씨앗이 없다면 이런 교훈은 계속 받아도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이니 이럴 때는 그곳에 붙어있을 필요가 없는 거다.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게 심적 작용인데, 쉽게 말해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목을 매달아 죽었는데 이것은 자기 마음이 심히 괴로워서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수는 많이 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나서 그 말씀을 붙잡고 회개를 했다. 믿는 우리에게는 베드로처럼 자기의 죄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14절: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니까 가인은 만나는 사람까지 두려워진다. ‘나를 만나는 자가’ 하는 이것은 그 전에는 이런 마음이 없었는데 동생을 죽이고 난 후에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거다. 그러니까 ‘가인이 동생을 죽였다네’ 하는 소문이 다 나갔구나. 소문이 참 빠르다. ‘그 당시에 사람이 많이 있었네. 없었네.’ 또는 ‘누가 가인을 죽이려고 한 거냐?’ 이런 걸 가지고 따지기보다 ‘좋은 소문이던 나쁜 소문이던 소문은 빨리 퍼지는구나’ 이걸 알아야 한다.
1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다.’ 그렇다면 가인이 동생을 하나 죽였는데, 누가 이 가인을 죽인다면 이 사람은 일곱 명을 죽인다는 거냐?
그러나 저러나 가인에게 표를 줬다고 했는데, 이 표가 뭘까? 하나님께서 가인의 이마에 십자가를 찍어준 걸까? 아니면 이마에 뱀을 새겼을까? 가인을 쳐다보면 가인의 인상이 무서운 호랑이 상이 되는 표일까? 인격에 관한 건가, 성품에 관한 건가? 아니면 얼굴이 도둑처럼 생긴 걸까? 무서운 흉터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가인이 자기 이마에 있는 표를 보면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그런 건가? 어찌 되었던 가인으로서는 ‘이 표를 가지면 다른 사람이 나를 죽이지 않을 거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다.
무슨 흉터나 칼자국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천상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뭘 느끼게 하는 것일 텐데,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는 사람마다 가인을 죽여라. 죽이는 자는 현상금을 준다’ 라는 표를 주었다면 가인을 보는 사람마다 서로 가인을 죽이려고 할 것인데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이지 않는 표를 줬다고 하니까 이것도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 놓고 회개는 하지 않고 자꾸 자기의 고통스러운 것만 말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지 않게 하는 표를 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보호를 해준다는 말이니, 이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인으로 끝나게 하려는, 사망을 멈추게 하고 더 확대가 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이 일 후에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셋이 나오는데,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라고 한 것을 보면 이렇게 보는 것도 무난할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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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이상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을 창조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진리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분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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