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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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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중곤 목사 |
참고 : | 들풀쉼터교회 |
성경 : 갈6:14
제목 : 십자가만 자랑
찬송 : 29(29), 80(101), 151(138), 352(390)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十字架; cross)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배의 대상이고 공경하는 우상 입니까?
‘우상’(偶像; idols)은 예배 대상으로 삼기 위해 금이나 은, 나무, 돌 등으로 새겨 만든 사람이나 그 밖의 것들의 형상, 또는 하나님을 대치하거나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다른 존재에게 바치는 행위를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롬1:23절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고, 엡5:5절에는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골3:5절에는‘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로 규정하고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하였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총회는 제42회(1957년) 총회에서‘십자가를 강단에 부착하지 않기로 가결’하였고. 제74회(1989년) 총회에서는, ‘십자가 강단에 부착 건은 57년도 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부착할 수 없다’고하였으며. 제100회(2016년), ‘강단 십자가 부착의 건은 현행대로 하기로 하다’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예장통합 측은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는 '십자가 장치 및 형상을 만들어 붙이는 것을 금지한다'고 결의했지만 1980년에 '강단 내 십자가 설치를 권장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로회합동총회는 세 번의 결의를 거듭하면서 강단 내에 십자가를 부착하지 않기로 가결하였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십자가 형상이 미신을 만들어낼 우려 때문이고, 중세 사람들처럼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이 더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우상으로 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종교개혁의 전통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총신신대원 ‘서창원’ 교수는 ‘쯔빙글리나 칼빈, 존 녹스 등은 십자가 형상을 비롯해 모든 성상들을, 우상숭배로 이끈다고 하여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면서 ‘십자가와 그림들은 형상화하고 싶어 하는 종교적 욕구로 인한 것으로 금해야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창시하지 않으셨으며, 성경 어디에서도 십자가 형상을 섬겼다거나 섬기라는 내용이 명시된 부분이 없으므로,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3-5)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십자가는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형 틀로 베드로는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5:30)라는 구절을 이용 십자가는 일개 나무일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십자가 설치를 반대하지 않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일장신대 전 총장 ‘정장복’ 목사는 ‘루터는 교리 갱신을 외쳤으나 예배 갱신을 주장하지 않았고, 쯔빙글리는 성상을 파괴했으나 십자가를 부순 것이 아니며, 십자가는 상징이지 형상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은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그 십자가 형상을 숭배 대상으로 섬기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습니다.
구약시대 우상을 엄격하게 금하던 성막의 상징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병상, 휘장 왼편에 금 등대, 휘장 바로 앞 가운데는 분향단이 놓여 있었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증거궤’(출25:22)만 있었습니다. ‘증거궤’를 덮는 덮개를‘속죄소’라 불렀고(출25:17), 그 양쪽 끝에는 ‘금으로 만든 그룹들’이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속죄소’를 향하게(출25:10-22)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십계명을 어겼다고 ‘증거궤’를 철거하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막의 상징이던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을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므로’(막15:38) 성막시대가 끝나고 예수님 부활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시대의 교회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울사도는 엡2:14-16절에서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교회의 상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말이 신약성경에 처음 기록된 것은 마10:38절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에게‘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하신 말씀 중에 처음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마16:24절에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고, 눅14:27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the Great; 272–337) 시대부터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사형 틀이며‘부끄러움’이고 ‘저주받은 나무’로 여겼다. 십자가의 형상이 그리스도인 상징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스도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A.D.431년에 교회와 사무실 안에 십자가가 도입되었다. 반면에 뾰족탑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은 586년 경 부터였다.’(랄프 우드로우, 노아와 방주, 로마카톨릭주의의 정체, 91쪽)고 전해집니다.
십자가는 고대 카르타고(혹은 페르시아), 애굽, 앗수르에서 고문하고 사형을 집행할 때 사용한 형틀 입니다. 십자가의 처형 방법은 너무 가혹하고 치욕적이어서 로마 사람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십자가는 여러 형태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직 막대의 윗부분에 가로막대가 있는 일반적인 십자가로‘라틴 십자가’(† Latin Cross, crux immissa), 두 개의 막대기를 X자로 교차한 성 ‘안드레 십자가’(crux decussata,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순교당한 십자가로 추정), T(타우)자 모양의 ‘성 안토니 십자가’(crux commissa, 수도사 안토니우스가 사용한 지팡이 형태에서 유래된 것으로, 헬라어 철자 ‘타우’를 닮았다 하여 타우형 십자가로도 불림), 그리고 두 개의 막대기가 한가운데 교차하는 ‘헬라 십자가’(+ Greek Cross)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윗부분에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37)는 기록으로 볼 때, ‘라틴 형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죽을죄를 범하므로 죽여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신21:22-23)으로 간주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갈3:13)는 말씀같이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죽으셨으며, 십자가에서 극한 고통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고난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대속과 구원, 부활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롬6:6, 갈2:20).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상징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전파된 이래, 십자가를 사형도구로 삼는 일은 폐지되었고,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류를 구원한 희생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 민21:4-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사람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민21:1-3)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고 할 때,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민21:5-6).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자기들이 원망과 불평의 죄악을 범했음을 인정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뱀들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민21:7).
바울사도는 이 사건을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9-10)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고, 여호와께서는 놋 뱀을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시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 수 있었습니다(민 21:4-9). 그런데 이 놋 뱀이 후에 우상숭배의 한 상징물로 바뀌자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구리 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왕하18:3-4).
예수님은 요3:14-15절에서‘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말씀하심으로,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살아난 것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고 구원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설치는 미신의 우려가 있고, 종교개혁의 전통이 아니라고 반대하는 총회는,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8년 9월 9일 평양의 서문 밖 교회에서 회집된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그로부터 20년 후, 제42회(1957년) 총회에서는 ‘십자가를 강단에 부착하지 않기로 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교회에 부착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떼어낸 교회의 강단 높은 곳에는 성막에서도 볼 수없는 근엄해 보이는 의자에 목사와 장로들이 앉는 것과 십자가가 새겨진 강단을 호화롭게 설치하고, 목사들이 십자가가 새겨진 가운을 입거나, 박사가운을 걸치고 설교를 하는 것은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에 맞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지신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채수련 목사님은 ‘십자가만 자랑하리’(작곡 조만행) 라는 찬양 곡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1. 주 앞에서 조용히 두 눈감고 내 모습 보니 / 내 안에 자랑할 것 아무 것도 없네 / 고난의 터널을 지난 후에야 그 사랑 알게 되었네. / 주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생인걸 / 나의 약함을 십자가에 못박고 / 주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리라.
2. 주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드릴 때 / 내 안에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네 / 고난의 터널을 지난 후에야 그 사랑 알게 되었네 / 주 예수로 옷 입지 아니하면 추한 나의 모습인걸 / 나의 추함을 십자가에 못박고 / 예수 이름만 찬양하며 살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약함과 추함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겠다는 찬양 입니다.
바울사도는 갈2:20절에‘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에 얽매여 살았던 우리의 옛 사람은 죽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인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자랑하고 믿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우리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우리 또한 세상의 유혹과 탐욕과 죄에 대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삶의 전부가 되고‘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빌3:8)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명예와 가문과 권력과 학위를 자랑합니다. 또 어떤 이는 인생경험을 자랑하고 지식과 지혜를, 외국어 실력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잘 난 척 하고 자기 자랑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는 이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닌 허탄한 것들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요일2:16)이기 때문에, 잠27:1절에‘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고후10:17) 하는 무리 모두가 되어야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한 바울사도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7.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빌3:7-9)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자랑하는 예수님지신 십자가는 전에는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자신의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기 때문이요,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한 피 흘리신 사랑이요, 우리를 구원한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있으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랑으로 우리가 증거하고 전파해야할 복음으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이유입니다.
바울사도는 갈5:24절에‘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말하고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였으며,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1.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절망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그 후 죄의 값은 사망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 이 후 모든 사람은 이 불순종의 죄 값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이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 전에는 짐승의 피를 속죄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우리를 위한 고난과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5;8)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3;16)이라는 말씀의 증거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지신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랑의 증거입니다.
3. 부활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심으로’(골2:15)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우리에게도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안상홍 증인회' 와 같은 이단과 장로회 합동 총회는 교회 내에 십자가를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 총이나 칼처럼 십자가는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죄수를 죽이는 참형의 형틀로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가 달려야할 그 십자가에 대신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달리신 그 십자가는 참형의 형틀이 아닌 사랑과 구속의 은혜로 가득한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로, 우리를 감격하게하고 자랑할 수밖에 없는 주님 지신 사랑과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 십자가를 철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이 그렇게 배척하고 싫어하는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감사하며, 교회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이 말하는 참형의 형틀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울 사도처럼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울사도처럼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 이전 보다 더욱 예수님 지신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구원함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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