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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5: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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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15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상을 받는다면 어떤 상급이 제일 크고 좋을까?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라고 했다. 즉 하나님 당신 외에 더 큰 상급은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뭘 두고 기도를 하느냐? 하나님 말고 하늘나라의 금은보화를 달라고 하느냐? 보석으로 된 천국의 성벽을 하나 떼어달라고 하느냐? 하늘나라의 예루살렘을 달라고 하느냐? 예수 믿는 자로서 뭐가 제일 큰 욕심이겠느냐? 뭘 달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은 거겠느냐? ‘하나님 당신을 주옵소서’ 이 이상 더 큰 게 없다. 하나님 한 분이면 다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했는데, 아브람이 이 말을 듣고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아브람 마음 속에 늘 ‘하나님께서 아들을 하나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뭘 줄까?’ 라고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뭘 달라고 하겠느냐? 세단 차냐? 아파트냐?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사건 환경으로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길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이걸 알았을 때 뭘 달라고 하겠느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셨다. 그러면 ‘네 몸에서 날 자’ 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뜻이 뭘까?
아브람이 아내의 권고로 하갈에게 들어갔는데, 만일 아브라함이 소원적으로 하갈에게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가령 그렇게 해서 하갈의 몸에서 이삭이 나왔다면 어떻게 될까? 아브라함의 씨라도 뭐가 안 될까? 교육이 안 된다. 왜냐? 하갈은 애굽에서 온 여종이기 때문에 하갈에게서는 자식에게 하나님 교육이 안 된다.
이스마엘이 하갈의 몸에서 나왔는데, 교육적으로 보면 이스마엘은 하갈로부터 애굽성의 교육만 받게 되지 아브람의 신앙으로 교육이 되지를 않는다. 그 증거로 나중에 하갈이 이스마엘에게 애굽여자를 얻어 주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온 세상성적 사상이다. 세상이 교회의 제도를 타고 교회 안에 들어온 거다.
표면적으로 보면 애굽의 여자들이 이스라엘 여자들보다 미녀가 많다. 이게 우연한 게 아니다.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자들이 하나님보다는 세상이라고 하는 여자를 더 예쁘게 본다.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사람을 볼 때도 어딘지 모르게 예수를 믿지 않는 여자들은 외모적으로 더 예쁘게 꾸미고 다니니까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이 안 믿는 여자들을 택한다. 이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본질의 신앙이라야 본질의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듣고도 하갈 쪽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온전한 신앙심이 없는 거다. 이게 인본주의다. 아내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보면 사래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그 죄를 남편에게 덮어씌우는 것 같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은 생명적 계대를 말하는 건데,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의 사상 자체가 생명적이 아님에도 제도를 타고 된 목사가 많다. 이게 인본주의 신앙이다.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된 사람은 생명적 계대의 신앙을 모른다.
제도를 타고 목사가 된 사람도 성경을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말을 한다. 도덕성적으로 얼마든지 얘기한다. 그런데 정신 사상은 하나님의 의도에 들어있지를 않다. 하나님의 의도성에 든 사람은 사람의 심령을 잡고 흔들지만 세상에 속한 가르침은 몸으로 왜 일을 안 하느냐는 식으로 흔든다. 의미가 다르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러러 보는 의미성을 알아야 한다. 아브람의 후손이 어떤 후손이냐? 하늘을 우러러 보는 신앙사상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라고 하는 것의 영적인 뜻은 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늘에 떠 있는 것이니, 땅이 아닌 성품적 위치적 존귀적으로 하늘의 차원의 신앙정신을 말하는 거다. 본 절의 말씀을 보고 차원 높은 신앙을 생각해야 할 텐데 숫자적 개념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후손이 많다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면 깨달음이 빈약한 거다.
아브람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다고 하신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 역시 모래알이 많듯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은 신앙의 후손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 숫자적 개념보다 바닷가의 모래는 바닷물이 사람들에게 침범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듯이 성도들 속에 세상사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후손을 말하는 거다. 이렇게 볼 때는 신앙사상이 된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자연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은 그대로 내려가지만 사람만큼은 마음 속의 정신이 후대로 내려간다. 교훈은 위로부터 내려가는 거다.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람이 생명과를 먹으면 가치판단 평가가 하나님처럼 나오는 거고, 선악과를 먹으면 인간의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선택을 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네 몸에서 날 자’ 라고 하는 것은 교훈을 통한 이룰구원의 사상이 들어있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아브람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신다. 이것은 아브람을 주관하고 있는 신앙성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 있다는 걸 말한다.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서 메시아가 나오는 거다. 사람의 인격과 소원과 목적성의 모든 바탕이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있어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친구처럼 대하시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의 후손은 그 사상이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상이냐? 아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눈에 예쁘게 보였고 잘 보였기 때문에 그런 약속을 하시는 거지 속화되고 타락된 사람에게 아브람에게 하신 것과 같은 약속이 나올 리가 없는 거다.
사람은 몸보다 중요한 것이 정신 사상이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면인데,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의 정신 사상으로 되어있지 못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도 없는 거다.
‘마지막 시대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는 것은 육적인 신앙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신앙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빗나간 거다. 교회 안에서는 이걸 봐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숫자 많은 거, 건물 큰 거, 이런 게 척도가 되어있다. 이런 게 척도라면 계:의 큰 성 바벨론 음녀교회를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음녀라는 것은 정신세계의 얘기다. 그런데 음녀교회는 여전히 충성봉사를 가지고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렇게 나갈 거다.
8절에서 아브람이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라고 한 것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는 믿는데 상당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9절-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했다. 아브람이 새는 너무 작으니까 쪼개지 않았던 모양이다.
11절에서는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하고 했는데, 작은 새를 쪼개지 않았더니 솔개가 날아와서 아브라함이 밤에 잠도 못 자고 쫓고 있었다. 이게 뭘까? 지극히 작은 거라도 쪼개지 않으면,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말씀으로 구별 분별을 하지 않으면 사단 마귀가 덤빈다는 거다.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는 말씀이라고 했는데,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점 하나가 안으로 붙거나 밖으로 붙는 데 따라 그 뜻이 확 확 달라진다. 이걸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쪼개라. 안 쪼개면 큰 실수다. 안 쪼개고자 하는 사상이 점점 커지면 어떻게 되겠느냐?
12절에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라고 했다. 잠이 들었을 때 두려운 게 있느냐? 어떤 면에서 ‘깊이 잠든 중’이냐? 신앙 면의 잠을 말한다. 이 말씀을 신앙적인 면으로 보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우리는 깊이 잠들더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왜 이렇게 하시는 건지 본 절 앞뒤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라고 했는데, 이런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일부러 만드는 거냐? 우리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없어야 할 일 같으나 이룰구원 면으로는 우리들에게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일들이 많다.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한다는 것도 우리의 구원에 꼭 필요한 거다.
14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섬기는 나라를.’ 누가 어느 나라를 섬긴다는 거냐? 이스라엘이 애굽을 섬기는 걸 말한다.
‘내가 징치할찌며.’ 하나님께서 왜 애굽을 징치하는 거냐? 단순하게 보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고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만 보지 말고 그 앞으로 가서 보면 요셉이 애굽에서 살 때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미리 말해줘서 그 덕으로 애굽사람들이 흉년 중에도 편히 먹고 마시며 산 역사가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요셉의 덕으로 애굽사람들이 편히 살았다. 따라서 애굽사람들은 요셉은 죽고 없다고 해도 그 후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핍박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있는 동안에 위해줘야 했다.
만일 우리나라에 계속 흉년이 든다면 몇 년 동안이나 생존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도 같이 몰살을 당할까,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들 덕으로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흉년을 넘기게 될까? 그런데 이런 흉년이 오지 않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살기 때문이다.
애굽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가 올 때까지 요셉이 애굽을 구한 일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내려가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잘 해줘야 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얘기가 슬슬 사라져 버린 거다. 아울러 애굽 왕으로서는 애굽 땅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독특성이 뻗어나가는 게 싫고, 자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애굽사람들의 뇌리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빨리 지워버리고 싶었을 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핍박하게 된 거다.
요셉 이후로 400여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고자 하시는 건데, 해방을 시키고자 하시는 건데 그 방편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을 하게 하신 거다. 그러면 핍박을 주는 바로의 입장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일에 한 몫을 도와야 되겠다’ 하고 이스라엘에게 핍박을 주는 거냐? 그건 아니다.
만일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하지 않고 위해준다면 이룰구원 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룰구원이 더 잘 될까, 아니면 애굽의 물이 더 진하게 들까? 애굽의 물이 더 진하게 든다. 이게 보이느냐?
모세나 십계 영화를 보면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런 사역적인 노예만 보지 말고 육신적 정신적으로 평안할 때 죄와 세상에 노예가 되는 면도 알아야 한다.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지 말라고 하면서 대우를 잘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더 좋아지겠느냐, 애굽에 더 푹 빠지겠느냐? 애굽에 더 푹 빠진다. 하나님의 모든 주권 섭리가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에 있는 건데 애굽이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푹 빠져서 계속 그대로 살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살았던 것이 그랬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차지해서 평안히 살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훈련장이다. 훈련을 받는데 침대에 누워서 받느냐?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따르는 게 훈련이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신앙훈련을 위해서는 정신적 노동과 함께 반대편도 있어야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것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룰구원을 위한 목적인데, 이 목적을 놓고 보면 성도가 기도로 ‘세상 것을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할 게 없는 거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의 훈련장소이기 때문에 내가 믿음이 좋으면 사건을 이길 수는 있어도 사건 자체가 없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섭리대로 움직이는 거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이룰구원을 위해 주권적 섭리적으로 사건 환경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자기에게 고통스런 사건 환경이 없게 해 달라고 하고 있다. 이게 기독교 타락이다. 그런다고 해서 없는 사건이 오는 것도 아니고, 주려고 했던 사건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믿음에 필요한대로 적절하게 주시는 거다.
학교의 시험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만 있는 거냐, 잘하는 학생에게도 있는 거냐? 둘 다에게 있다. 그런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전제가 되어있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고 안 믿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사건이 오게 되어있는 거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미련한 것으로 사건 환경을 떠받으며 ‘아이고 죽겠네’ 하는 거고, 말씀에 영리한 사람은 그걸 피하면서 통과하면서 나가는 거다.
올림픽을 할 때 장애물을 뛰어넘는 경주가 있는데, 뛰어가다가 장애물에 걸려서 한 번 넘어지면 마음이 어떻게 될까? 다음의 장애물을 앞에 두고 마음에 부담이 온다. 이렇게 되면 다음의 장애물을 못 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장애물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달린 사람은 마음에 용기가 넘쳐서 그 다음의 장애물을 쉽게 뛰어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게 어제의 연결이 오늘이요, 오늘의 연결이 또 내일로 가는 거다.
해가 떴다가 지는 것은 오늘의 이룰구원은 오늘 다 이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다. 다음 날 또 해가 뜨는 것은 우리로 눈을 뜨게 해서 새로운 날에 그 날의 구원을 이루라는 신호다. 만일 창세 때 뜬 해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대로 떠 있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건만 보지 말아라. ‘왜 하라고 하느냐? 왜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앞의 것과 연결이 되어있다. 이것을 연결해서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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