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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6:6-1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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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16장 6절-17장 16절.
16장 6절: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종이 아무리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이 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여주인 사래다. 그런데 세상은 이 주권자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한다.
그런데 하갈이 아기를 가지도록 한 아브람은 이런 일이 있을 때 그만큼 괴로운 거다. 그러면 여기서 아브람의 마음이 더 괴로울까, 하갈의 마음이 더 괴로울까, 사래의 마음이 더 괴로울까? 자기의 마음에 하갈이 들어있는 만큼 자기가 괴로운 거다. 사래의 학대로 인해 하갈이 도망을 갔는데, 암만해도 종이 도망을 가야지 주인이 도망을 가겠느냐? 만일 사래가 도망을 간다면 아브람이 하갈과 함께 알콩달콩 잘 살아지겠느냐? 서로가 괴로운 거다.
7절: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람의 집을 떠나 방황하는 하갈을 만났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하갈을 만난 거다. 그러면 하갈의 출생지가 어디냐? 애굽이다. 그러니 도망을 갈 때 어디로 가겠느냐? 애굽이다. 우리는 이걸 원칙으로 알아야 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잘 했든 잘못했든, 특히 죄를 짓고 잘못해서 도망을 간다면 갈 곳이 어디냐? 세상이냐, 천국이냐? 세상이다. 그러면 믿는 자기가 잘 했든 잘못했든 하나님의 집에서, 믿는 자의 집에서 내쫓긴다면 갈 곳이 어디냐? 하나님 품이다. 가령 신부가 신랑 집에서 쫓겨났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친정집으로 간다. 이치를 말하는 거다.
아브람의 집은 믿음의 가정인데, 애굽사람이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이 자가 쫓겨나면, 자기가 어려워지면 어디로 가겠느냐? 애굽으로 간다. 애굽의 성질로 내려간다. 딴 길이 없다. 이게 원칙이다. 우리는 항상 원칙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의 생각의 출생지, 출발지가 어디냐? 거듭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 생각이 출생지, 출발지로 도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렇다. 원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
‘세상 축복, 축복’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 이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을지라도, 계속 예수를 믿을지라도, 또는 교회를 안 다닐지라도 여전히 그 사상이다. 그런데 이룰구원의 정신 사상이 없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우리가 볼 때는 교회에 다니나 안 다니나 같은 그 사상인데도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열심히 나오던 사람이 교회에 안 나오면 지옥에 가는 것처럼 말을 한다.
8절-9절: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갈이 표면적으로 누구의 집에서 나왔느냐? 아브람의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주인을 피해서 어디로 가는 거냐?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그런데 애굽으로 간다는 말은 안 하고 ‘여주인을 피해서 도망을 갑니다’ 라고 했다.
마치 사래가 잘못해서 하갈 자기가 도망을 가는 것처럼 말을 했지만 하갈 자기가 도망을 가게 된 원인이 뭐냐? 안주인에게 아기가 없다고 무시를 했기 때문이다. 여주인 사래 덕에 자기가 아브람 집에 있게 된 것이고, 또한 여주인 덕에 자기가 아기를 가진 것이니 여주인을 무시하지 말아야 했는데 자기의 실책으로 도망을 가게 된 거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렇게 말을 했는데도 하갈이 여주인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애굽으로 가다가 죽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나중에 세상적으로 큰 복을 받게 될 이스마엘을 낳지도 못하고 죽는 거다. 여주인에게 도로 돌아가서 복종을 해야 그나마도 아브람의 덕으로 세상 물질축복으로 일생을 살 수 있는 거다.
물론 ‘네 몸으로 통해 낳은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아브람에게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한 사래나 그 말을 듣고 하갈에게 들어간 아브람이 잘못한 것도 있는 거지만 미래적으로 보면 하갈이 더 잘못했다. 그래서 하갈에게 ‘네가 잘못했다’ 하는 뜻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도로 돌아가서 복종하라’ 라는 말을 한 거다.
하갈이 다시 돌아가서 종노릇을 하며 사는 아브람의 집은 하나님의 축복이 깃드는 곳이다. 그래서 아브람의 집에는 인간으로 태어난 하갈의 살 길이 있는 거다. 그런 집에서 쫓겨나와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은 큰 실수를 한 거다. 이걸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말을 하면 하갈도 죽음의 선 너머의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에도 순간의 실수가 큰 화를 만들었구나. 그러니까 이 하갈이 여주인의 집에 있으면서 아브람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아브람의 신앙을 배워서 생각도 고치고, 마음을 돌렸다면 하나님의 큰 축복 안에 드는 건데 이걸 몰라서 큰 실수를 한 거다. 우리는 이런 점을 이룰구원 면에서 관계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10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에게 네 자손으로 숫자적으로 번성케 해 준다고 한다.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 아들은 이삭의 사상을 가진 아들이 아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인본주의 사상으로 잉태가 되었다.
하갈의 사성성은 세상 타락성적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사래가 자기에게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할 때 ‘난 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후 십여 년을 기다려도 아들의 소식이 없어서 하갈에게 들어갔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예수를 믿으면서도 타락성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이건 전쟁을 의미한다. ‘사람들 중에 들나귀가 되리니.’ 코가 꿰인 나귀는 주인에게 순종을 잘 하는데 들나귀는 들판에서 제 멋대로 다니니 마냥 버릇도 없고 생겨먹은 대로 사니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바로 잡히겠는데 그게 없이 세상정신과 사상으로 제 멋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들, 애들이 애를 먹이면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 올라오면서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면 저 놈을 그냥...’ 이런 게 없느냐? 그러면서 마음 한 쪽 구석에서는 그런 자기를 말리는 뭔가가 쑥 올라오지 않느냐?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라고 하는 것은 ‘손’은 사역을 의미하는데, 하는 짓이 자기 속이 생겨먹은 대로 사람을 막 친다는 거다. 즉 전쟁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면 속사람이 말씀에 코가 꿰어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자기 성질대로 막 나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에게서 이런 마음이 올라올 때 ‘이러면 안 되지’ 라고 한다면 이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코가 꿰인 거다. 이건 좋은 거다.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이스마엘이 모든 사람을 치니까 모든 사람이 또 이스마엘을 친다는 거다.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동방’이라고 하는 걸 보니 좋은 뜻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산다’고 하는 걸 보면 이스마엘 자손들은 아브람의 다른 자손들과 같이 살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국은 이 두 부류의 자손들끼리도 전쟁이 있다는 걸 말한다. 지금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도 진리본질의 신앙정신과 세상정신이 막 싸우고 있다.
13절: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의인도 감찰을 하시고 죄인도 감찰을 하신다. 의인에게는 ‘어떻게 하면 높여줄까?’ 해서 감찰을 하시고, 죄인에게는 ‘함부로 날뛰는 저 놈을 손을 한 번 봐야 되겠다’ 해서 감찰을 하신다.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로부터 이스마엘과 그 후손에 대한 예언을 들으면서 자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비록 하갈과 같은 육덩이 신앙인이라 해서 하나님을 전혀 못 깨닫는 게 아니다. 육덩이 신앙이라도 하나님의 감찰하심이 있을 수 있는 거다.
아도니 베섹이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가락을 잘랐더니 나도 잘림을 받는구나’ 라고 했는데, 이는 자기가 했던 대로 자기가 당한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예수 믿은 후에 자기가 어떤 좋지 일을 당했을 때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을 생각해 보니 ‘나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짓을 했구나’ 하고 깨달아진 적이 없느냐?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일 놈이구나’ 라고 한 적이 없느냐? 이건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으로 나오는 소리다.
14절-15절: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이스마엘’ 이란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이다.
16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 여자가 86세에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17장.
1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이스마엘이 난 후 14, 5년만이다.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이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께서 하갈의 사건을 모르고 이 말씀을 하시는 걸까, 아니면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실까? ‘전능’의 뜻은 모르심이 없고, 무엇이든지 못하심이 없다는 것인데,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브람과 하갈의 사건을 염두에 두시고 ‘나는 다 안다’ 하는 뜻이다. 즉 ‘너는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사래 앞에서가 아니라 내 앞에서 완전하라’ 이 뜻이다. 아브람이 이 소리를 들을 때 자기가 과거에 아들을 얻고자 인본주의로 쓴 것이, 세상주의를 쓴 것이 생각이 날까, 안 날까?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나라고 ‘전능한’이라는 표현을 한 거다.
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세워.’ 이걸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말을 하면 영원한 결합을 의미하는 거다.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번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즉 이스마엘에게 번성케 해 주시겠다고 한 숫자적 번성과는 다른 의미인 질적인 면의 번성을 말한다. 이스마엘에게 하신 말씀은 숫자적 의미의 번성이고,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은 양육자로서의 질적인 면의 번성을 말하는 거다.
숫자적 번성이 좋으냐, 질적인 번성이 좋으냐?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스마엘에게 주어졌던 번성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질적인 후손의 언약을 세웠듯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질적인 면의 신앙적 약속이 주어진 거다. 이것은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의 번성과는 다른 차원이다.
3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말씀은 넙죽이 절을 했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내던짐의 표현이다. ‘기도를 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 하느냐,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해야 하느냐, 서서 기도를 해야 하느냐, 눈을 뜨고 기도를 해야 하느냐?’ 이걸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림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려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고 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의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4절: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2절에서는 ‘너와 나 사이에 언약을 세우니 너로 심히 번성케 하겠다’ 라고 했고, 본 절에서는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을 이끄는 아비가 될지라’ 이 말인데, 여러 민족 속에는 각양의 많은 사람이 살면서 서로가 의사일치가 되지않기 때문에 항상 왁자지껄한 거다.
5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이 이제 ‘아브라함’이 되었다. ‘고귀한 아비’에서 이제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한다. 소음도 많고 동요도 많은 여러 민족 열국의 아비가 된다고 한다.
‘열국의 아비’란 ‘정돈이 안 된 아주 소란스런 열국의 아비’ 라는 뜻인데, 어느 쪽이 좋으냐? 누구든지 고귀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소란스런 열국의 아비가 되고 싶겠느냐? 이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뭘까? 열국의 아비가 되려면 아무나 되는 거냐, 아니면 열국을 이끌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하는 신앙이 주어져야 가능한 거냐? 이런 면을 생각을 해 봐라. 여러분들 같으면 하나님께서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라고 하면 ‘난 정신없어서 싫어요’ 라고 하지 않겠느냐?
6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이스라엘 왕의 계통을 보면 별별스런 왕이 많다. 성격도 성질도 각각이고, 우상을 섬기기도 했는데, 이스마엘을 이런 왕들과 비교를 해 보고, 또한 이스라엘 후손들과도 비교해 봐라. 그리고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게 있느냐? 별반 다른 게 없다.
7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스라엘의 흐름 속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 위에 어떤 역사를 해 나가시는지 알아야 한다. 이 언약은 창15장에서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면서 맺은 언약인데, 하나님께서 고기조각들 사이로 지나감으로 언약이 맺어진다는 게 무슨 뜻이냐? 당시에 언약을 할 때 짐승을 쪼개서 당사자가 그 사이로 지나갔는데, 이는 언약을 어기면 짐승이 쪼개진 것처럼 죽는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기조각들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감으로 맺어진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아브람이 작은 새는 쪼개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쪼개기지 않은 새 사이로 지나가실 수 없는 거다. 즉 쪼개지를 않으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해당이 되지 않는 거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구별 분별을 하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나가야 만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속에 들어가는 거다.
8절: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가나안 일경을 준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준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기업을 준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속에 보이지 않는 게 들어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만물을 볼 때 보이는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에게 언약된 것, 즉 영적인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9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구별 분별을 해서 하나님 쪽을 택하고, 이것을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한다. 그러니까 책임강조다. 명심을 하라는 거다. ‘다른 정신은 잊더라도 이 정신만큼은 잊지 말아라’ 이게 들어있다.
믿는 우리는 들은 말씀이 있으면 ‘이 말씀을 내 속의 심비에 새겨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나의 심비에 새겨진 당신의 뜻을 말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게 전도로 나오는 거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나에게도 주시려거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비밀인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게 하시고, 내가 이 비밀을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게 옳은 기도다.
‘나를 전도자로 세워서 전도를 잘 하게 해서 우리교회를 꽉 차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런 기도는 못 쓴다. 믿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게 중요한 거지 ‘하나님, 날 좀 써 주옵소서’ 이건 허풍쟁이 기도다.
10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아브라함이 늙어서 할례를 받았다. 이삭은 난 지 팔일 만에 받았다.
11절: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이것은 몸에 하는 표징이다. 이방인들도 표피를 베기도 하는데, 이건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한 할례와는 그 뜻이 다르다. 지금은 신체 건강상 할례를 하기도 한다.
12절: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할례는 팔일 만에 하는 게 제일 적합한 거다. 신경이 덜 완성된 때, 민감하지 못한 때 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디나의 사건에서 원수를 갚기 위해 할례를 하게 한 일이 있다. 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할례가 아니라 원수를 죽이려고 하게 한 거다. 악한 수법이다.
‘악한 수법이지만 할례니까 하면 좋은 게 아니냐?’ 라고 한다면 문제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게 걸린다.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이지만 원수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하게 한 것이니 나쁜 거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얼마든지 사기를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님 앞에 악한 거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도 했는데, 정신 사상을 말하는 거다.
13절: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살에 했으니 없어지지 않는 거다. 이게 다 비유다.
14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아무 유익도 없는 것을 신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하라고 하시는 거냐, 아니면 어떤 중한 의미가 있는 거냐?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라고 하셨겠느냐? 성도의 정결을 위해 하라고 하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영육 간에 좋게, 이룰구원 면에 좋게 하기 위해 하시는 말씀이다. 요즘은 군대에서 표피를 벤다고 하는데, 이는 건강을 위해 위생상 하는 거다.
15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사래’란 ‘왕비, 공주’ 라는 뜻이고, ‘사라’란 ‘열국의 어미’ 라는 뜻이다. 그러면 공주가 좋으냐, 열국의 어미가 좋으냐? 공주는 잠을 오래 잔다고 하는데, 어미는 가족들의 이것저것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잠을 오래 못 잔다. 그러니까 ‘열국의 어미’ 라는 의미는 굉장히 정신을 많이 써야 한다는 말이 된다.
믿는 우리로 들으라고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데, ‘열국’이라고 할 때 이 열국 속에는 별의 별 성격과 성질을 가진 백성이 들어있다. 그러니 이런 열국의 어미가 되면 골치 썩는 일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래서 열국이 어미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들으면 하나님 앞에 종이 된 생활의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집에서 공주소리나 듣고, 고귀한 아비의 소리나 들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람이 안 바꿔진 거다.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말을 그냥 들으면 사래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많은 백성이 생긴다는 말 같지만 그게 아니다.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이 벌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것이 두 부부가 전원에서 짐승이나 키우면서 편히 사는 것으로만 보지 말아라. 별별 사람을 다 겪어야 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별별 사람을 겪을 때 주님으로 닮아나가는 게 있는 거다. 말하자면 마음이 풍부한 상태가 된다.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이러려면 얼마나 영리하고 지혜로워야 하겠느냐?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교육적 책임이, 양육적 책임이 엄청나게 크구나’ 이런 느낌이 든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건데, 언제부터인지 ‘목사가 되면 편하겠다. 하나님의 종으로 대우를 받겠다’ 라고 한다거나, ‘사모님이 되면 여왕처럼 대우를 받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성경은 그게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의 바탕이 바꿔져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고, 얼마나 순종성이 되어야 하고, 마음의 생각이 얼마나 지혜롭고 넓어야 하겠느냐? 이런 사람으로 안 되면 열국의 어미가 안 되는 거다.
우리가 많이 보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그 나라를 다스리려면 얼마나 시끄러운 일들이 많으냐? 하나님의 집의 종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 겪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겪으면서 원수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 원수가 있겠느냐? 만일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다면 성도의 구원에 방해를 하는 마귀일 텐데, 이 원수에게 ‘교인들을 붙잡고 간섭하지 말고 너나 똑바로 하라’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마귀는 이걸 못 깨닫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마음은 마귀의 마음일 거다. 그래서 마귀가 유황불못 속에 들어가는데 거짓 종들도 같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면 이 말을 마귀와 거짓 종들에게만 하는 거냐? 마귀를 유황불못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지옥형벌을 말하는데, 예수 믿는 나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이 취급을 받는다는 거다. 살아가면서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불 속에 집어던진다는 것은 필요 없다는 의미도 되는 건데, 그러면 마귀를 불 속에 집어넣는다면 이 영물인 마귀가 뜨거운 것을 느낄까?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누가 약이 오를까? 마귀가 불 속에서 ‘아이고, 뜨거워라’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막 욕을 해야 하나님 입장에서 ‘그러면 그렇지. 실컷 당해봐라’ 할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있다면 형벌을 하는 하나님께서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그리고 설령 뜨거운 것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 불 속에서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달을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다 우리의 이룰구원에 깨달음을 주기 위한 표현들이니 마귀를 불 속에 집어넣든, 다른 무엇을 집어넣든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게 좋다.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그런 걸 나에게 아무리 많이 보여줘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다. 나와 상관이 있으니까 성경에 써 놓은 거다. 그걸 현재로 끌어다 놓고 거기에서 나의 이룰구원 면으로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불못은 하나님 당신이 마귀나 거짓 종들에게 형벌을 주려고 만들어 놓은 장소다. 이 불못을 이룰구원 면으로 보면 시간적 장소도 될 수 있고, 사상적 지역적 장소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서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생각하면 ‘아, 그게 나에게 불못이었구나’ 하는 게 있을 거다. 그러면서 그걸 지금의 나에게로 끌고 와서 ‘그 때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었지? 그 때 내가 회개를 했든가, 아니면 계속 원망을 했었든가?’ 하는 걸 생각하며 ‘내가 다시는 그러지 않아야지’ 하며 자기를 바로 고쳐나가야 한다. 성경에 영원한 불못을 써놓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룰구원 면에서 ‘다시는 안 그래야지’ 이런 깨달음을 가지라는 거다. 이를 위해 그런 성경말씀이 있는 거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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