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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8: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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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
(창세기 槪觀)
18장 1절-10절.
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17장에서 아브라함의 집에서 할례를 행한 후에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오정쯤에 왜 장막 문에 앉았느냐?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들고 사람으로 아브라함 앞에 나타났다. 날개를 달고 나타난 게 아니라 사람으로 알게 나타났다.
‘눈을 들어서 본즉.’ 이 눈은 영적 고상한 눈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영적 고상한 눈을 가졌다. 우리가 영적 고상한 눈을 가져야 사람을 알아보게 되는데,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지만 ‘영의 사람이냐, 육의 사람이냐?’ 하는 것에 대한 구별을 하게 된다. 지금 아브라함의 눈의 차원이 그렇다.
인생 나그네 길을 걷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라면 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인 구원이 분명히 있는 건데, 이런 인간이면서도 구원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참 허망한 인간이다. 돈이 많아서 아무리 부자로 살지라도 허수아비에 불과하구나. 사람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게 참으로 측은한 거다.
정치인이나 배우나 가수들을 보면 하는 얘기는 전부가 ‘어떻게 하면 세상사람들의 눈에 드러날까?’ 하는 것뿐이다. 그럴수록 돈은 더 많이 벌 수 있겠지만 이게 무슨 희망이 있느냐? 아무 희망도 없다. 나중에는 눈물과 근신뿐이다. 그런데도 이방 불신자들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배우나 가수를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창조의 목적관으로 보면 이런 삶은 참으로 불쌍하고 처절한 거다.
아브라함의 눈은 하나님의 종들을, 사자를 알아보는 고상한 눈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누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아 예수를 믿는구나’ 하는 것은 다 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닌다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나?’ 하는 면을 보면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본질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관으로 볼 때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고상함이 드러나게 된다.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맞은편에 서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눈에 띄게 서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뙤약볕에 저렇게 서 있으니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까?’ 이게 있는 거다. 사람이 피곤한 것이 힘든 일을 해도 피곤하지만 상대와 대화를 할 때 말만 들어도 피곤한 사람이 있다. 즉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아브라함이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달려 나가 영접을 했다. 몸을 땅에 굽혔다는 것은 그 앞에 가서 납작 엎드렸다는 말이라기보다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는 거다. 평소의 아브라함의 품행이 드러난다. ‘몸을 땅에 굽혀’ 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마음의 표현이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을 높이겠느냐? 그런데 세상은 어찌하든 자기를 높이려고 남을 까 내린다. 이건 안 될 일이다.
세상사람들은 친할수록 맞먹으려고 한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친하게 대해주면 손자가 할아버지의 수염도 잡아당기고 어깨 위로도 올라간다. 세상사람들은 이런 게 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경우는 친할수록 사람을 존경하고 올린다.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올렸다. 성품적으로 올렸다. 사람을 까 내리고 짓밟고 무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해서도 안 될 일이다.
3절: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그러니까 ‘나에게 은혜를 주기길 원하시거든 나를 피해서 지나가지 마옵소서’ 이 말이다. 참으로 고상한 말이다. 이건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나온 신행(神行)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심성을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의 말은 대접을 하는 자신이 손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자세로 내려가 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를 않다. 정 반대다. 아브라함은 은혜를 받는 입장에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길 원하시면 나로 이렇게 이렇게 하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병자들이 주님을 부르면서 ‘나를 고쳐 주옵소서. 나를 떠나가지 마옵소서’ 라고 한 말과 비슷하다.
‘나에게 은혜를 주시길 원하시거든 나로 이렇게 이렇게 하게 하옵소서’ 이 말이 얼마나 겸손하냐?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이게 아니라 ‘나에게 은혜를 주시길 원하시면 나로 이것도 하게 하옵시고 저것도 하게 하옵소서’ 하고 허락을 받는 자세다. 아브라함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고 하는 말을 들여다보면 이 아브라함은 물질대접의 복보다 더 큰 복을 알고 있구나.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네가 나를 대접해야지’ 이런 사고방식이다. 타락된 목사들도 그렇다.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아프신 부모님이 계신다면 자식으로서 ‘뭘 잡숫고 싶으십니까?’ 하고 허락을 받아서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을 사다 드리는 게 옳다. 그런데 이게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이게 좋다더라’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자식의 판단대로 사다 드리게 되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게 안 맞을 수가 있다. 지혜롭게 해야 한다.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만일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떠나서 지나가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못 입는다. 즉 생명적 후사의 복은 지나가 버리는 거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을 가지고 왔는데 아브라함은 그들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은 평소의 심성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령한 복을 사모하며 이런 자세로 사람을 대하고 매사를 살았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이룰구원의 정신으로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이룰구원의 재료감으로 삼고 살았던 거다.
이런 이룰구원의 눈, 성령에 감화된 눈을 가지고 있으면 아브라함에게 온 복과 같은 복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되고 받게 된다. 그런데 예수를 믿더라도 웬만하면 이런 복을 보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지나치든지 할 것 같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평소에도 영감의 감화가 있는 믿음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게 아닌 일반 불신적 심성은 못 쓴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생명계대의 후사를 주시려고 찾아왔는데, 만일 아브라함이 이걸 보는 눈치가 없다면, 즉 영적 감각성이 없다면 아브라함에게 이 복은 없는 거고,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이 가는 거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 됨됨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못 받는 사람이 있는 거다. 심성이 고우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만 심성이 나쁘면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올 리가 없는 거고, 설령 찾아왔더라도 자기가 털어버리게 된다.
목사님이 교인의 가정에 손님이 되어서 갔는데 그 집 아이들이 내놓은 음식을 뛰어넘고, 주위로 뛰어다니고 한다면 목사의 마음에서 축복적인 마음보다도 저주스런 마음이 나간다. 이방 불신자라도 웬만한 가정은 이런 일이 없는 건데, 내가 어느 목사님 집에 갔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4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발을 씻고 나무 아래서 쉬면 마음이 기쁘고 편안하다. 아브라함의 신행으로 아브라함의 마음도 기쁘고 그들의 마음도 기쁘다. 이런 대접을 받으면 잊을 수 없는 거다.
이 때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의 늙은 할아버지인데,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많은 분 중에 이런 마음을 가진 할아버지가 있을까? 믿는 사람은 규모가 바로 서야 한다. 안 그러면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렇게 고상하게 늙은 아브라함이 참으로 돋보인다. 복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게 나이 든 분들이 많다. 악만 들어있어서 바락바락 악을 쓰고, 심술만 들어있어서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나이 든 분들이 많다. 이러면 참 피곤하다.
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쾌활’이란 ‘만족한 것을 의미한다. 떡을 먹으면 배가 부르니 만족이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에게 떡을 대접해서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 줬는데, 아브라함의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에게 하나님의 양식을 주어서 기운이 나게 해서 보내는 거다. 이게 성경이다. 참 아름다운 신행이다.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내 쪽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라는 거다. 이에 대해 그들이 ‘네 마음대로 하라’ 라고 허락을 했다.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것이 나그네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거다.
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기다렸다는 듯이’ 라는 의미다. 나그네들의 말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합해서 즉각적으로 나오는 준비된 행동이다. 준비가 안 됐으면 ‘속히’가 안 나온다.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이 말을 보면 항상 손님을 대접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놨다는 거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에게 말을 할 때 사라가 툴툴거리며 준비를 했을까? 또 심술이 나서 눈을 히쭉거리고 입을 종알거리면서 일을 했을까? 이랬다면 하나님의 사자들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7절: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항상 미리 준비하고 있던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하인에게 주어 급히 요리하게 했다. 미리 준비한 것도 귀하지만 주인 아브라함이 아내나 하인에게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키니까 온 가족이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간다. 가정이나 교회도 구원의 일에는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8절: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나무 아래의 그들 앞에 차려놓으니 그들이 먹었다. 이 장면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즐거웠을 거다. 물론 나그네들도 마음이 즐거웠을 거다.
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이 장막 문은 나그네들이 앉아 있던 곳에서 잘 보인다. ‘장막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언제든지 부르면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고 수종들 수 있는 위치다.
10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내가 내년 이맘 때 돌아온다. 그 때에 반드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언약하신 게 없느냐? 아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룰구원 면으로는 생명잉태를 말한다. 생명잉태가 되면 이게 점점 자라게 되고, 자란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실력이 되는 거고, 이 실력으로 가정에서 교훈이 되고, 교인들에게 교훈이 되어 나온다. 이게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는 생명적 약속도 되는 거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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