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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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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04206 |
즐거운 인생(?)
눅 12:13-21,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2019년 8월4일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은 종종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진리를 간단명료하면서도 깊이 있게 전하는 데에 효과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원래 부자인 데다가 큰 풍년이 들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큰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템의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게 대박을 터트린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났으니 이 부자는 기분이 좋았겠지요. 그렇지만 머리는 복잡해졌습니다. 눅 12:17절에 이 사람의 복잡한 심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얼마나 곡식 소출이 많았는지, 쌓아 둘 곳이 부족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를 처리할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빈 곡간만 채우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든지, 아니면 품꾼이나 소작농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기금을 조성해서 몇 군데 동네 도서관을 만들든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세워도 좋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풍년이 들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통 크게 헌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게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자도 그 사실을 안다면 늘어난 재산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사용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은 그런 쪽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곳간을 증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거기에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둘 작정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노래와 춤이 나올 것 같습니다. 19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이 사람은 원래 부자인 데다가 이제 더 큰 부자가 되었으니 주변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입니다. 더구나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게 아니니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한 것도 없습니다. 자기 재산을 아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오늘도 그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떤 목사는 청부론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즐기는 일입니다. 바로 순간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편으로 뜨끔하기는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무기로 즐거운 인생을 망가뜨리는 언어폭력처럼 들립니다. 가끔 기독교 신앙이 공포심을 조장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재물을 거둬가신다거나, 심지어 주일예배나 새벽기도회를 빠져서 큰 사고를 당하게 했다는 말을 합니다. 아주 극단적으로는 지옥 공포심을 자극적으로 불러일으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 구덩이와 구더기가 들끓는 통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공포심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에서 말하는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는 표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거나 즐겁게 살려는 꿈을 훼방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직시하라는 요구입니다. 어떤 삶이 참된 의미에서 풍요롭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자 방향 제시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인 21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런 구절을 이용해서 헌금을 많이 바치라고 닦달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의 참된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가르침이지 여러분이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 봉사하라는 가르침이 절대 아닙니다. 충성 봉사에 관한 직간접적인 구절이 성경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도 근본적으로는 여러분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왜 충성 봉사를 해야 하는지, 그 충성 봉사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충성 봉사하라는 요구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입니다. 강요받는 충성 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삶의 태도로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라는 말은 재물과 인생을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재물 증가가 바로 인생의 즐거움이고 재물이 줄면 인생의 즐거움도 줍니다. 재물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재물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재물 자체에 부정이 아닙니다. 재물에만 묶이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어느 정도 인생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재물에만 묶이는 게 아니라 적절한 선을 지킨다고 주장할 겁니다. 그렇게 살면 다행입니다만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재물에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한 계기는 어떤 사람에게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곤란한 요청을 한 사건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에게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유산 문제로 형제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에는 이미 유산 상속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오늘 대한민국 실정법에도 그런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법은 모든 상황을 다 해결해주지 못해서 사람 사이에 분쟁이 벌어집니다. 형이 동생에게 돌아갈 몫을 주지 않았는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는 본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이미 유산을 받아서 다른 데 다 써버리고 다시 손을 벌렸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산 분쟁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거나 다른 랍비를 찾아가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따끔하게 책망합니다. 그 책망은 이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15절입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탐심은 주로 재물에 대한 욕망을 가리킵니다(골 3:5b 참조). 재물에 대한 탐심을 물리치기는 우리에게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재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잠을 자야 합니다. 자급자족하던 옛날과 달리 모든 생활 물품을 돈으로 사들여야 하는 오늘의 삶에서는 재물의 필요성이 더 절박해졌습니다.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21세기는 누구도 재물에 대한 탐심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심을 에너지로 돌아가는 경제 이데올로기입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자본주의는 악입니다. 이에 관한 사회 경제 과학적인 진단은 이미 오래전에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와 혁명가들에 의해서 내려졌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붕괴하고 미래 사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자 계급)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 예측했으나 아직은 그 예측이 적중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죄성을 그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탐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탐심이 없으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탐심을 물리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틀렸나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을 외면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처럼 비현실적인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이 말씀에서만 우리는 실제의 풍요로운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인식과 깨우침이 전제됩니다. 그 전제를 모르면 공허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그 전제는 본문에 나온 말씀, 즉 ‘사람의 생명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보장되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충분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더 먼저 필요한 근본적인 질문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예 질문도 하지 않고 대답도 찾지 않는다는 게 오늘 현대인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고단하다거나, 이미 알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꾸준하게 질문하고 대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오늘 설교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게 됩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생각만 합니다. 그런 생각이 그의 무의식을 지배해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물리학자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모여 우주와 생명을 주제로 대담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신 인간 과학>에 다음과 같은 판넨베르크의 설명이 나옵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영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영이라고 할 때 이 영은 ‘의식’이나 ‘이성’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영은 ‘숨결’ 또는 ‘바람’을 뜻합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느님을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지요. 그러자 진흙으로 빚은 형상이 생명체로 바뀝니다. 무기물에 불과하던 진흙 덩어리가 신의 숨결을 받자 호흡을 시작하고 생명체가 되는 겁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생깁니다.”(94쪽). 우리가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장합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여럿이지만 그중에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물질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만약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물질과 돈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는 삶을 풍요롭게 지켜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예로 들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불편한 조건에서 예배를 드리고,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느 독지가에 의해서 20억 원 헌금이 들어와 시외 전원에 독립 교회당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당분간은 느낌이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가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곤란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 문제보다는 개인의 살림살이를 예로 드는 게 실감이 나겠군요. 제가 어렸을 때 화장실은 대단히 불편했습니다. 어릴 때가 아니라 군목으로 입대해서 포천군 일동면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군부대 교회당이 영외에 있었고, 교회당이 있는 작은 마을 길명리에서 월세 집을 얻었습니다. 옛날 집입니다.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사람이 올라가 발을 디딜 수 있는 돌만 두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뒤편에는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옆에는 삽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배웠습니다. 변을 처리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요즘 웬만한 집의 화장실은 거기서 음식을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청결합니다. 재를 사용하는 화장실에서 살다가 비데까지 달린 화장실에서 산다고 해서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냥 편리할 뿐입니다. 편리한 삶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런 편리성에만 치우쳐서 삶 자체는 외면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풍요로워지려면, 즉 하나님을 풍요롭게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생명 통치에 가까이 가는 게 최선입니다. 이건 음악 경험과 비슷합니다. 여기 피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는 곡이 있다고 합시다. 5번은 유명한 ‘보리수’입니다. 저는 마지막 24번 곡인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을 좋아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도 좋긴 하지만 가사와 멜로디와 피아노 반주까지 다 포함해서 깊이 느낀다면 거기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술과 시를 빈약하게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풍요롭게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빈약하게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풍요롭게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빈약하게 느끼면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이 늘어나서 아무 걱정 없이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에만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지만, 예수님의 주변에는 부자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자를 일부러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가 부자들에게 불편하게 들렸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부자로 불릴만한 분이 없어서 설교할 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자와 관련해서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잘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재산이 많은 관계로 예수를 따르지 못했다고 합니다(막 10:22). 영생의 길을 찾다가 포기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는 섬기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본주의가 신처럼 추앙받는 시대를 살기에 오늘과 같은 설교가 은혜롭게 들리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중요해도 가난하면 행복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즉 삶이 파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뭐라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뿐입니다. 여러분이 일부러 가난해져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해져도 즐거운 인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부자가 되어도 즐거운 인생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걸 기억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려고 목을 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풍요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듯이 하나님께 대하여 풍요로운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한평생 인생입니다. 우리는 그런 길을 함께 가는 믿음의 도반(道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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