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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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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오늘날 자기는 어느 소문에 귀가 솔깃하겠느냐?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고 그건 일거양득이지요? 그러나 어느 것을 더 진하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자기 믿음이 바로 놓여지기도 하고 잘못돼지기도 하는구나.
그런데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오는데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시느냐? 자, 그래서 문제. 예수 당신 자신을 위해서 충전하시려고. 일을 많이 하다 보면 배가 고프면 밥 먹고 일하자고 하듯이 예수님이 병자들을 많이 고쳐주니까 이제 능력이 조금 빠져나갔거든요? 그래서 그 충천시키려고 기도를? 목사님들 영력이 떨어지면 산기도 가지요 안 가요? 산기도가서 뭐 신내림을 받든지 ‘주시옵소서’ 하고 내려와야, 뭐 산에서 계속 밤새도록 ‘주시옵소서.’ 또 있다가 ‘주시옵소서. 안 줄렵니까? 주시옵소서.’ 그 거의가 그래요. 그 이제 무슨 기도를 했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내려오면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뭔가 마음이 시원하다 그 말이지.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받은 것도 없고 자기가 제 바람에 안위가 돼 있는 거요. 그게. 참 이상해요. 시원한 공기 쐬고 그러니까 안위가 된 그런 식으로 생각이 되어지는 건지? 산에서 ‘주시옵소서. 주여 주시옵소서. 주를 위해서 살겠나이다. 주시옵소서.’ 아마 ‘너나 위해서 살아라’ 그럴 거야. 그럼 이제 교회 와서 설교 한 마디 하는데 힘이 좀 있겠지요? 없어요? 기도 안 하고 설교하려고 그러면 이상하게 시금치를 끓는 물에 데쳐놓은 거처럼 시들시들하고, 기도하고 하면 뭔가 파워가 있어서 속에서 뭐가 ‘욱 욱’ 올라오지요? 안 올라와요? 힘이 없을 때에 ‘야’ 하면 뭔가 이게 올라오는 거 같잖아요? 그것도 없다고 그러면 안 돼요. 어느 정도는 있어요. 있는 거요.
자기가 자꾸 잠이 오고 시들시들하고 이렇게 뭔가 흐릿해지면 저 운동장 가서나 넓은 벌판이나 산꼭대기 올라가서 두 손 들고 막 ‘야호’ 하면서 발광을 한 번 하고 내려와 봐요. 피가 빨리 돌기 때문에 뭔가 능력 받은 거처럼 느껴지는 거요. 집에 오면 또 시들해지고. 일을 하다가 움직이는 게 다 그런데 속하는 거요. 어느 정도는 있는 거요. 없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에 두 번째, 너희들도 길가다 한적한 곳에 지형이 기도하기 좋은 모양새 만나면, 나무 밑에 바위가 앉기 좋게 하나 있으면 기도하기 좋지요? 그러니까 그런 걸 만나면 기도하라는 그런 뜻인지? 아닌 말로 우리가 산에서 그 전에 기도할 때에 주위를 둘러보고 납작한 돌 갖다가 반듯한데 놓고 거기 앉아서 하지요? 안 해요? 그냥 흙 푹 파인 그런 곳에서 하는 거요? 안 그렇거든. 그러니까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에 암만해도 그렇게 하셨겠지요. 쓱 보고 ‘아, 저기 돌이 있구나. 거기 앉아서 해야지.’ 그게 쉬운가?
그 다음에 세 번째, 병 고침을 받은 자나 말씀을 들은 자나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느냐? 뭘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그래요. 그 안에는 병든 자고 안 든 자고 간에 다 포함이 되는 거요. 예수님이 특별히 어느 개인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예수님이 집 나와서 30살에, 그러니까 집에서는 부모가 걱정을 하시겠지요? 그러니까 어머니 아버지가 동생들 데리고 사는데 이거 뭐 불황에 무슨 농이 나가겠어? 밥상이 나가겠어? ‘어떻게 사시나’ 하고 조용한 곳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지요? 우리처럼?
우주적일까요, 한 사람만을 위해서 할까요? 예, 우주적이요. 그러나 가다가 이제 만나면 그건 일대 일이 되는 거지. 일대 일이라도 그건 사적은 아니지. 일대 일이라도 항상 공적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 단체라도 둘이라도 열이라도 전체라도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 그게 들어있어.
17절-20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나온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진을 치고 앉았습니다. 그러면 이 자들이 왜 앉았을까? 그게 있어요.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침을 받으려고 앉았느냐, 아니면 그 자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흠 잡으려고 앉았냐? 턱밑에. 그들이 왜 앉아있는 것 같아요? 흠 잡으려고. 그러니까 너희들도 턱밑에 앉아있지 말아. 흠 잡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허허.
맨 앞에 앉은 사람이 신앙이 좋은 줄 압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앞에서 졸면 뒤에서 잘 몰라요. 그런 장점이 하나 있고요, 또 맨 뒤에 가서 앉아있으면 또 다 이쪽을 보기 때문에 그 쪽에서 조는지 모르잖아요? 제일 불리한 곳은 중간에 앉은 사람. 허허허. 그리고 좀 빠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중간에 앉으면 표시가 팍팍 나버려. ‘누가 왔구나, 안 왔구나.’ 꼭 이빨 빠진 것처럼 보기 흉하지요. 고게? 잘 빠지는 그런 측에 속하는 사람들은 문 밖에 있거나 맨 나중에 와가지고 집에 갈 때 맨 먼저 가는 거. 그럼 잘 몰라요. 누가 왔다갔는지 잘 몰라.
참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목사님들이 간혹 있어요. 자기 교인이 저러면 저게 모양새가 보기 좋겠느냐? 그걸 알아야 돼. 자기 교회 교인들이 물질적 행동적 활동적 시간적 충성봉사하면 그렇게 아름답고 보기가 좋지요. 안 그럴까요? 그런데 이게 목사님들 세계는 그게 아니야. 다 대접 받는 측이 돼가지고 이게 참 저런 식으로 자기 교인들이 된다면 어찌 될까? 그 병이야. 사람이 센스가 눈치가 빨라야 되잖아요. 그래야 사랑 받잖아. 빨라야 할 때 빨라야 되는데 안 빨라야 할 때 빨라가지고 눈치 받고 그거 참. 자기 일은 안 하고 남 쫓아다니면서 간섭한다면 그건 병이요. 낫게 해달라고 그러세요. ‘어쨌든 하나님 앞에 규모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옵소서.’
소문을 듣고 갈릴리 각 촌 유대 예루살렘 그리고 바리새인 교법사. 각 촌. 여기서도 여기 온 분들 다 각 촌이지? 어디 뉴욕 시에서 왔어요? 그건 아니지. 각 촌에서 왔어. 뉴욕시 사람들이 볼 때는 이건 각 촌, 벽촌이야. 이건. 다 뭐 시골서 올라오고 도시에서 이사 다녔고 돈 따라다니다가 돈 부르면 휙 따라 갈 거고. 안 그래요? 잠깐 머문 그 곳에서 영원한 것을 내가 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영원한 사람으로 산다면 하나님 앞에 온전자로 산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예, 각 곳에서 왔기 때문에 그 지방의 색깔 옷 입는 모양새 음식 짭짤한 것 싱거운 거 매운 거 뭐 이런 거. 예, 아주 각각이요. 그러니까 성격도 성질도 각각, 모양새 크기도 색깔도 골각도 각각. 참말로 총 천연색이다. 주님의 집에서 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다. 사람 구경하려면 주님의 집으로 와라. 그럼 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다. 사실이고. 주님의 집에도 가정에도 똑같아요. 노래 잘 부르는 사람, 공부는 못해도 일 잘하는 사람, 공부만 잘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도 없잖아 있고, 먹기만 먹는 사람, 그릇도 씻을 줄 모르는 사람, 뭘 먹었는지 화장실 늘 뻔질 하게 다니는 사람, 그렇게 먹고도 화장실에 안 가지는지, 어쨌든 배 안에 축척만 해놓는 건지? 어쨌든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어. 그게 주님의 집이요.
이게 지금 병자들 정신병자 귀신들린 자가 멀리 있는 게 아니요. 요게 한 지역 안에, 예수님이 다니시는 그 지역 안에 다 들어있어. 물론 세계라도 그건 지구 안이요. 맞잖아요? 지구 안의 어느 지역, 어느 지역 안의 어느 동네. 없는 사람이 없어. 없는 사람이. 그런데 말씀에 통일을 시켜야지. 병 고치는 이게 귀신 내쫓는 것도 말씀에다가 통일이에요. 이게. 당신의 의사단일에 통일, 당신의 성품에 통일이에요.
병원에서 낫게 해주면 성질까지 고쳐줘요? 그건 아니야. 성질이 못 돼 먹어가지고 조금 있으면 병원에 또 들어와. 예수님은 그런 거 아니란 말이요. 영적 차원의 병은 완전하게 나았단 말이요. 완전하게.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은 마지막 날 부활을 시키는 그런 면을 미리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거고.
그래, 참 못된 사람들이 흠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아는 사람들일까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일까요? 예? 안다는 사람들이다. 성경 많이 안다는 사람 주의해야 돼요. 많이 아냐? 너부터 고치고 자기를 잘 돌아보고 네가 몰랐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런 사람을 또 자기편으로 끌지 말고 자기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성품으로 밀착되게 하는 그런 마음을 또 가져야지. 이 참 아름다운 거요. 그게 주님의 종이요.
그리고 이방인을 보듯이 하지 마라. 주님의 집안에서 이방인을 보듯이 하지마라. 안 믿는 사람을 보듯이 하지마라. 그건 잘못됐다. 고쳐가는 와중이고 고쳐져야 되고 필연적으로 고쳐야지. 얻어맞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한다. 그러니까 남 얻어맞을 때에 ‘잘 얻어맞았다. 시원하다’ 그러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거요. 실질적으로 집에서 아버지가 매를 들고 두들길 때에, 동생이 말 안 듣는다고 두들긴단 말이요. 형이 있다가 ‘아버지, 좀 실컷 두들겨 패요’ 하면 ‘너 이놈, 이리와. 너부터 잡자’ 그리로 들어가는 거요.
남 얻어맞을 때 절대로 흉보거나 고소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고소하기는커녕 나중에 쑥물 먹어. 오히려 가서 ‘아버지,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 하면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감동이 될까? 안 그럴까요? ‘참 너는 나이 얼마 안 먹었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어른 같구나’ 요렇게 들어가는 거요.
근데 집안의 형제들도 가만 보면 항상 말끝에 말을 물고 잡고 늘어지는 거 정말 몹쓸 성격이다. 그것도 이제 우스개로 장난한다고 웃으면서 싹 돌리는 거. 이런 건 참 부드럽기도 하고 재치가 있다. 그 물고 늘어져가지고 ‘네가 그전에 이랬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그 때 그러고 말아야지 지금 또 갖고 와서 또 씹고 있느냐?‘ 이래가지고 그거. 이거 병이요, 성한 사람이요? 병이요? 좋아요? 사람을 잘 물고 씹는 것은 이건 개다. 이단자들 개가 그래요. 안 그러면 참 많은 세월이 흐르겠구나.
왜 그런 사람을 소문을 듣게 하고 자기 눈앞에 지나가게 할까요? 왜 보게 할까요? 그런 사람을? 좀 안 보이게 하면 되겠는데 세상은 어디 그러냐? 자기와 똑같은 성격 성질은 없어요. 왜 별 희한한 사람을 자꾸 이렇게 내 성격 돋아지게 왜 지나가게 하는 거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요? 그 왜 그래요? 왜 그런다고 생각해요? 깨닫고 지나가야지? 붙잡고 싸울까? 깨닫되 나부터 먼저 깨닫고 그래야 그게 되는 건지? 그 어때요? 못 쓴다. 그런 건 못 쓴다. 네가 그 사람을 보듯이 너를 또한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눈으로 너를 보고 있다. 맞잖아요?
온전하고 완전한 자가 어디 있어요? 아무도 없다. 좋은 것도 보고 깨닫고 만들어져가고, 자기에게 없으면 본을 보고 만들어져야지. 상대가 나쁜 것으로 들어있다면, 자기 보기에 덕이 안 되고 그러면 ‘아, 나도 고쳐야 되겠구나.’] 은연중에 다른 사람 보기에 그게 있을 수 있겠구나. 고쳐야지‘ 요게 나와야지. 실수가 없도록. 그리고 이제 교훈이나 이 뭐요? 권고 권면이나 하려면 자기가 바로 선 후에 해야 되는 거요. 그게. 안 그러면 책잡혀지고 그건 안 돼. 권위가 없어져.
특히 교회적으로 보면 암만해도 강론하는 목사는 눈이 밝아야 돼요. 눈 어두우면 이건 안 돼요. 눈이 밝아야 되겠고, 그럼 책망도 권고도 일대 일로 고치라고 야단도 하는데 목사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목사가 잘못되면? 그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교인들이 데모를 해요?
자, 집에 애들이 대여섯 명 된다. 그 아버지가 돈도 안 벌어주고 만날 엄마만 두들겨 패고 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겠어? 속에서 울분이 안 나와요? 아버지 편을 듭니까, 어머니 편을 듭니까? 그러면 자식들이 노동조합처럼 결성이 되가지고 어떻게 아버지를 ‘우’ 달려들어서 두들겨 패면 되는 거요? 참 그 자체가 지옥이다. 그런 경우 몰라. 우리교인들 나보다 더 좋은 마음을 가지겠지. 나 같은 경우 집에 안 있겠다. 나 살 길 찾아서. ‘목사님이 그러니 아, 정답 얻었다. 나도 그래야지’ 그게 아니요. 적었어? 적으면 안 돼. 허허.
훗날의 얘기지 지금은 아직은 아니요. 아, 근데 얻어맞지는 마라. 일단은 튀어야 돼. 아버지 죽은 후에 들어오든지. 안 그러면 아버지가 자기 붙잡고 때리다가 자기가 아버지에게 맞아죽으면 아버지가 어디 가겠어요? 감옥 가지. 쇠고랑 차지. 그렇게 안 하도록 하려니까 내가 안 얻어맞고 피해야지. 안 그래요? 그리고 나쁜 곳에 빠지지 말고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지. 괜히 집 나가서 이상한데 가서 몸 팔아먹으라는 거 아니에요. 이해하시죠?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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