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7:11-19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07453 |
믿음과 구원
눅 17:11-19,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9년 10월6일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나병 환자들
오늘 설교 본문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벌어진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편으로 슬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멀찍이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큰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슬픈 장면입니다. 나병은 옛날에는 문둥병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병균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경 명칭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삶이 어땠을지는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 그들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이들은 격리되었습니다. 노숙자들처럼 마을 밖 일정한 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가족이 이따금 들려서 먹을거리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옆을 지날 때 ‘우리는 부정합니다.’라는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이 미리 피하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들은 어디선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겠지요.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동냥을 얻고 싶다는 말인지, 병을 고쳐달라는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애처로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이런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눅 13:10절 이하에 18년이나 허리를 펴지 못하던 여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7:11절 이하에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건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병에 걸린 사람을 고치는 행동이나 말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병 환자들의 몸에 손을 대고 기도하신다거나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치료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율법에 따르면(레 14:1-32 참조) 이런 지병이나 난치병이 치료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는 중간에 몸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각자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겠지요.
일반적으로는 이것으로 이야기는 아름답게 끝나야만 합니다. 정말 멋진 일이 벌어진 거니까요. 천형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았으니 그들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아주 특별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더 진행됩니다.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입니다. 15-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야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돌아간 이들을 고마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나머지 아홉 사람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보통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지도 않았으니 돌아오지 않았다 해서 뭐라 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영광과 감사는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식사할 때 기도를 드립니다. 한 끼 식사를 우주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때 이런 기도가 가능합니다. 밥 한 그릇을 단순히 사물로만 보는 게 아니라 거룩한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밥의 재료인 쌀을 보십시오. 벼가 자라서 쌀이 나올 때까지의 긴 과정은 그야말로 신비롭고 거룩합니다. 우리가 지금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도 신비롭고 거룩하기 그지없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도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는 우주의 깊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개입해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영광과 감사의 삶을 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소유에만 집착하고, 경쟁만을 삶의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우주의 주인공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재산이 늘고 지식이 많아지고 티브이에서 볼거리는 많지만, 영혼은 점점 더 빈곤해집니다. 영광과 감사를 모르니 작은 일만 벌어져도 서로 배척합니다. 영광과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열 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이방인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다음의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대한 사람들은 당시 유대교 주류에 속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이 업신여기는 세리, 죄인,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지역에 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마리아 이방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은 매우 엄중한 어떤 진리를 가리킵니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우리보다는 이방인인 세상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깝게 사는지 모릅니다. 종교가 그 본질을 잃으면 세속적인 조직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더 나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더 정의롭고 더 평화 지향적이고 더 이타적일까요? 별로 자신 있는 대답을 하기 어려울 겁니다. 실제로 보면 기독교인들이 더 나쁘지도 않습니다.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은 괜찮고, 예수 믿어도 이상한 사람은 이상합니다. 그걸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우리는 대충 어떤 인생이 행복한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생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줄달음질을 칩니다. 돈이 많고 사회적 신분이 높고 다복한 인생이 그것입니다. 그게 전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기에 오히려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기에 생명의 환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허한 게 아닙니다. 이 말씀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일반적으로 볼 때 모든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삶을 느슨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면증을 앓는 사람은 숙면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 절실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원천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당에서 수천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 신자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제대로 돌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처럼 백 명이 채 안 되는 신자들이 모여도 준비만 되면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이 넉넉하게 갖추어지면 삶의 절실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실함이 떨어지면 영혼은 매너리즘에 떨어집니다. 매너리즘에 떨어진 영혼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
예수님은 나병 환자였다가 치료되어 돌아와 발아래에 엎드린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말씀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사람이 명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에게 오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아홉 명도 똑같이 병이 치료되었지만, 예수님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만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여기에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유대교인들도 하나님을 믿고 영광을 돌리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만 예수님을 절대 진리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별함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와 장로가 되어도, 소위 교회 중직자가 되어도 교회 생활에서만 내공이 깊어질 뿐이지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합니다. 예수가 참 신이며 참 인간이라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명제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몰라도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 많은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 신앙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거나 거듭난다는 가르침을 정보로만 알지 실질적으로 모르고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교회 당회원들이 모여서 신앙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교사와 성가대와 제직들이 모여서 다른 이야기만 합니다. 교회 발전이나 교회 정치 같은 것, 또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평가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어떻게 기능적으로 잘할 것인지에 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신앙이 피상적입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과대하게 포장되었습니다. 최소한 죽은 다음에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해서 만이라도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에 관해서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 이방인 이 한 사람을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를 찾아온 이 한 사람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홉 사람처럼 유대교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길을 옳게 찾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바로 이 한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신앙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교회의 정체성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릴 수만 있으면 다른 부분은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실질적으로 예수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는 뜻입니다. 누가 헌금을 많이 드리냐, 누가 교회 봉사를 더 잘하느냐, 누가 기도를 더 많이 하느냐, 하는 것들은 우리 교회에서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개인이 알아서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깊이 알고 그에게 가까이 가는 일이 우리 교회의 특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저도 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구원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한 말씀을 다시 주목해서 보십시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기서 구원이 무슨 뜻인지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병이 치료된 것을 가리킨다고 일단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지병을 앓는 이들이나 장애인들에게는 그것의 치료가 삶을 완전히 바꾸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만이 아니라 나머지 아홉 사람도 사실은 다 병이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구원받은 겁니다. 만약 나병 치료만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이 한 사람에게만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구원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구원이라는 말을 협의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이 나았다든가, 위기에 몰렸던 사업이 회복되었다거나 삶의 허무에 떨어졌다가 벗어났다는 사실에 한정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는 죽어서 천당 가는 걸 구원으로 여길 겁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의 넓은 뜻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창조주이고 완성자이시기에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면 당연히 생명을 얻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애매하게 들릴 겁니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완전히 낯설게 들립니다. 평생 동굴 안에서 산 사람은 동굴 밖의 세계에 관해서 아무리 많은 말을 들어도 실감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또는 바둑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바둑의 묘미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형국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신앙의 깊이가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 대다수는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사람으로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오늘도 바쁜 시간을 내서 교회에 나아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게 어떤 것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제가 그걸 대신 설명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병 환자였던 사마리아 이방인 이 사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여기 결혼을 앞둔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결혼만을 무조건 목적으로 하는 청년이 있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 청년이 있을 겁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으니 좁은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좁은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을 갈 것이고,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대충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 겁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제가 억지로 여러분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강요한다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서만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실만은, 즉 실질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만은 여러분에게 목사의 직을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