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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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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8.12.3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고정관념-신앙의 적
요9:1-3
고정관념은 비단 신앙의 적만이 아닙니다. 삶이나 학문, 인간관계에서나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롭지 않습니다. 오늘 교회가 교우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맡기면서 당부하고자 하는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자신의 고정관념을 교회가 맡긴 그 일에 투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아주 분명하게 고정관념의 폐해가 어떤 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러니 성서가 우리에게 걸어오는 이 말, ‘고정관념으로 맡은 일을 하거나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이 명령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반듯하게 앉혀지길 바랍니다.
9장 전체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뜬 사람들은 눈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말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에 눈이 멀었지?’ 눈뜬 사람들의 시선은 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마음속에 ‘죄 때문에 눈이 멀었을 거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발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9장은 이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시의 기층대중들에 대해서 그 고정관념으로서의 신앙과 삶을 반박하는 예수의 이야기 외에 다르지 않습니다.
요9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은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의심해 볼 필요도 없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염접한 후, 어떤 종교적인 교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희생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종교나 사회에서 배제된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라는 장애물이 없었습니다. 9:2을 보면 예수님은 그저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긴다’는 마음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이게 예수의 마음이며, 우리가 각자 함양해야 할 신앙의 본바탕이라 여깁니다. 예수 믿는 큰 뜻은 바로 각자가 이 마음으로 존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지극히 직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하신 뜻도 굶주린 사람들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9:39절에서 밝힙니다.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눈먼 사람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대칭적인 관계를 역전시켜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대부분의 언어들을 보면 모두 이 대칭의 역전화 인 것을 알게 됩니다. 눈먼 사람은 보는 사람이 되고, 소위 본다는 사람들, 눈먼 사람들을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구속해 버리는 사람들은 눈먼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무심코, 상식적(또는 진리처럼)으로 통용되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 예수님은 이처럼 범주를 역전시키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게 공생애 3년의 삶입니다. 이걸 우리들에게 보여주셨고, 이렇게 살라고 하셨던 겁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릴케도 이런 역전을 그의 시에 반영합니다. 이를테면 장미 잎사귀 뒤에 숨어 있는 가시를 보면서 ‘장미는 아름답다’는 고정관념을 역전시키는 시입니다. 고대 인도의 종교서사시에서도, 바가드 기타에서도 이런 역전이 소개되는 것은 ‘종교는 바로 고착된 의식이나 관습의 역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들어 익숙한 요가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요가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으나 깨어 있는 사람’이다.”이 말은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깨어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두 고정관념의 파괴 혹은 역전을 도모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생은 고정관념에 무의식적으로 굴복하고 있기 때문에 여간 맑은 정신이 아니고서는 거기서 벗어난다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엘리자베스 콜버트라는 기자가 ‘뉴요커’라는 시사지에 이런 글을 올렸답니다. “왜 팩트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가.” 어떤 진실을 전달받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상상이상으로 고집스럽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믿음이 틀린 것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여간해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부지런히 배우고 배운대로 실행해보고 다시 도전하고 그래야 합니다. 요9장에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고정관념이 파괴를 통한 인간 재생’에 있다는 것을 39절에서 확인해 줍니다.
사람이 작거나 크거나 고정관념이 믿음처럼 굳어져버리면 오만해집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편견, 편협, 뒤틀린 입장을 절대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장 확실히 보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살다가 죽는 게 아니라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사람과 대상 사이에 알게 모르게 들어와 자리 잡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고정관념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치기 가장 어려운 품목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기도를 해도 쉽게 소멸되지 않습니다. 아니 점점 더 정당화되고 고착되어 갑니다. 그러나 생각과 마음이 자유로운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고정관념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한 해 동안 우리의 내부적이고 외적인 갈등과 싸움은 이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얼마나 내가 고정관념을 넘어섰느냐 로 판가름이 나겠지요.
그러니 교회에서 직임을 맡은 이들은 물론 이려니와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 모든 신앙인들의 삶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얼마나 자기 안에 독소처럼 자리 잡은 고정관념을 파괴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고정관념에 조정당하며 살았던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정관념이 강하면 정보부족 즉,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켜면 쏟아져 들어오는 파편적인 정보들만으로 배가 부른 것처럼 교회를 오래 다녔으니, 직분이 있으니 내 생각이나 판단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내 편향성’즉 ‘고정관념’만 강화될 뿐입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버려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거나 직분을 맡으면 저절로 믿음이 쌓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나 생각이나 판단이 누구보다 옳을 거라는 관념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음과 무식을 흔쾌히 인정하는 자기훈련이 필요합니다. 새해에 직분을 감당하는 교우들은 필히 이걸 명심하기 바라고, 모든 교우들이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이 덕목을 잘 수행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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