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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존재감의 기초

다니엘 이익환 목사............... 조회 수 314 추천 수 0 2020.01.29 23: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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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단3:17-18 
설교자 : 이익환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www.telavivchurch.org 

2018년 3월 10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이익환 목사

다니엘서 3 자기 존재감의 기초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3:17-18)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내일 또 어떤 사람이 공개 대상이 될지 놀랍기만하다.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가해자들은 그들이 가진 지위를 의지해서 피해자들이 자신의 요구 앞에 무릎 꿇게 했다. 힘과 권력은 흔히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한다. 힘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권좌를 자기 존재감의 기초로 삼는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한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안전하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지금 미투운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게 그 권좌에서 힘을 남용했는지 고발당하고 있다. 그들의 권좌는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자기 존재감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왕은 앗수르제국과 애굽제국을 무너뜨리고 바벨론제국의 권좌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고대근동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의 존재감은 하늘을 찌를듯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그를 평가해보고자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 살펴보며 오늘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단 3:1,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을 위한 신상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지난 주 살펴본 것처럼 그는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니엘이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해주자 이런 고백을 했었다. 단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바로 이어지는 다니엘서 3장에서 자신을 위한 금신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기록한 70인역에 의하면 본문 3장은 기원전 587년 그의 재위 18년에 일어난 일이다. 2장에서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준 일이 있고 나서 15년이 지난 이후의 일이다. 기원전 600년경 느부갓네살왕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공중정원을 짓는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메디아 출신 왕비 아뮈티스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바벨론 제국은 평안했고, 그는 못할 일이 없었다. 바벨론 도시에 이중 성벽을 쌓고 자신의 왕국도 새로 지었다. 그의 권좌는 아무도 흔들 수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다. 다니엘이 해석해준 꿈이었다. 그 해석에 의하면 자신의 나라에 이어 그보다 못하지만 다른 나라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느부갓네살 왕은 강력한 자신의 권좌를 영원히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금으로 된 신상을 세운다. 그것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입힌 것이다. 자신이 꿈에서 본 신상은 머리만 금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세운 신상은 전체를 금으로 입혔다. 이전의 꿈의 내용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가 영원할 것을 표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만지고 있는 권력에 취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단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자신의 권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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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공중정원(상상도)

 

금신상의 높이가 60규빗이면 27미터다. 너비가 여섯 규빗이면 2.7미터다. 정말 크다. 그것을 바벨론 제국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두라 평지에 세운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자기 존재감을 세웠던 것이다. 그것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을 보자. 단 3: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바벨론 제국의 주요 직급의 관리들이 다 동원된다. 그리고 선포하는 자가 나와 외친다. 단 3:5-6,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왕은 바벨론의 관료들을 다 동원하여 제국의 모든 시민들이 자신의 존재감 앞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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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을 보자. 단 3: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갈대아 사람들은 갈대아 점성술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보다 뛰어나 인정받았던 유대인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지목하여 왕에게 이들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고발한다. 그리하여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 앞에 끌려온다. 느부갓네살왕은 그들에게 이제라도 절하여 죽음을 당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왕의 요구에 세 친구가 응답한다.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의 요구는 그들이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 앞에 대답할 필요를 못 느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첫번째 계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기준이었다. 그들은 이어서 말한다. 단 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9]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설령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내지 않으실지라도 금 신상에는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 말에서 이들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말하는 그들 앞에 오히려 초라해 보이는 건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이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들은 어찌 그리 당당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자기 존재감이 하나님 앞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가능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거둬 가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임을 믿었다. 그들은 자신의 민족이 우상숭배로 인해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음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경험했다. 포로로 끌려온 그곳에서 또다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숨막히는 갈등의 결과를 우리는 안다. 헤피엔딩이다. 이들은 결국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죽지않고 살아 나온다.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 그들을 보며 느부갓네살왕이 고백한다. 단 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왕은 이들에게 더 높은 관직을 주며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준다.

 

자,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의 헤피엔딩이 아니다. 더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왕과 하나님 앞에서 했던 믿음의 고백이다. 그리고 늘 하나님 한 분 앞에 선 이들의 존재감이다. 이들의 존재감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었기에 바벨론 제국의 왕도 흔들 수 없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된다. 히 11:33-34,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은 건 다니엘이다. 불의 세력을 막은 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이다. 이들은 믿음 때문에 소위 세상 기준으로 헤피엔딩을 맞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또 다른 사람들을 나열한다. 히 11:36-38,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들은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빛을 못보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똑같이 평가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서 영향력을 끼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죽는 순간까지 어떤 존재였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존재감을 믿음으로 지킨 사람은 혹 이 땅에서는 헤피엔딩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세상은 우리에게 더 높은 곳에 올라 너의 가치를 입증하라고 말한다. 명품을 옷을 입고 신제품을 구입하며 너 자신의 브랜드를 높이라고 말한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 기준을 버리고 세상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현대인의 자기 존재감은 흔들리고 있다. 성취를 통해, 소유를 통해, 타협을 통해서는 결코 진정한 자기 존재감이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감은 내가 처절하게 경쟁하며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부여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임을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로 세우기 위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감당하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가치 있는 자이기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대신 생명을 드려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존재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서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에 연결될 때 우리는 비로소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존중을 받을 때 자기 존재감을 가진 자로 서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의 개인주의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가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가치가 교회 안에도 다 들어와 버렸다. 공동체와 관계에 헌신하는 가치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개인과 가족의 만족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 살기도 피곤한데 관계에 얽히는 것이 피곤한 일로 여겨진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통해 관계 훈련을 하며 더 건강한 자기 존재감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다.

 

빌립보서는 말한다. 빌 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이 왜 이런 권면을 하는가? 자기 존재감의 기초가 세상의 성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초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선택할 때 우리는 우쭐할 이유가 없어진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진다. 우리의 생계를 위협하는 어떠한 존재 앞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내 존재감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을 때 이미 완성된 것이다.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우리의 교만이 사라진다.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우리는 우리의 기호에 따라 사람을 가리지 않게 된다.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우리는 자기 혐오를 버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자처할 때 우리는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사람으로 세워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내가 진짜 나다. 세상을 기준으로 자기 존재감을 결정하지 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힘써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섬길 수 있길 바란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주는 만족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기준을 타협하지 않길 바란다. 바라기는 비록 세상에서 헤피엔딩의 삶이 안될지라도 세상에 절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말씀 나눔
1.느부갓네살왕이 자신을 위한 금신상을 세운 마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2.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적용
1.요즘 세상이 바꾸라고 위협하는 하나님의 절대 기준은 무엇입니까?
2.내가 타협하고 있는 신앙의 가치와 기준은 무엇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3.공동체를 통해 서로 자기 존재감을 세워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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