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최주훈 페이스북 |
---|
<설교만 아니면 할 만하다>
어떤 사람은 설교만큼 쉬운 게 어디 있냐고 말하지만, 나는 ‘설교만 아니면 목회 할 만하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다른 건 '하면 는다'는데, 나에게 설교는 해도 해도 늘지 않는 꼬인 실타래 같은 것이고, 할수록 힘들고 괴롭고 절망적인 그런 곤욕스런 과정이다. 시중에 설교 잘하는 비법을 요약한 책들이 널리고 널려 있지만, 정작 읽어보면 도움도 안 되고, 하나마나 한 얘기에 또 속았다는 느낌만 거듭 확인한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설교란 강연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강연은 책 몇 권에 담긴 핵심 지식을 잘 요약하고 거기에 강연자의 경험과 달콤한 이야기 몇 개를 잘 버무려 전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강연자는 지식의 전달자일 뿐이다. 그러니 강연은 소피스트 같은 말쟁이면 누구나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주석책 몇 권 요약하고 설교자의 경험을 전달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설교대에서 유창한 말솜씨와 지식을 한껏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걸 설교라고 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청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이기 이전에, 준비단계에서부터 단독자로서 말씀 앞에 벌거벗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갇힌 독방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세워진 다음, 대화를 시작한다. 묵상의 단계이다. 이것 자체가 곤욕이다. 정직하게 설수록 괴롭다. 나도 그렇게 못 살면서 믿음 소망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하니, 준비하는 순간부터 설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원고 첫 줄도 못 쓰고 성경 구절 묵상하는 단계부터 절망하는 이유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생각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결코 죽지 않는 병이다.' 오히려 그런 절망을 통해서만 새로운 빛을 보게 된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 십자가 복음은 늘 역설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은 나사로를 향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요11:4)는 그리스도의 선언은 자연인의 상태에선 이해 불가한 내용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가르치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거기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을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오직 신앙의 세계에서만 허용되는 깨달음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절망은 희망의 문이 된다.
설교자로서 매번 절망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만, 오늘도 설교를 준비한다.
설교는 나에게 신앙고백이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최주훈 목사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