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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1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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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18절-21절.
18절: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하나님의 거룩한 것에 대한 구별력이 없어집니다. 교훈성에서 구별이 없고, 지식의 구별이 없고,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분별을 못하고, 사람의 성품을 분별을 못하고, 자기 제어를 못하고,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교회로 말하자면 모여서들 예언 방언이나 하고 신유 은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이게 더러운 귀신이 들린 거요. 인간 삶의 생활이 그렇게 되니까 가정생활 부부생활의 정상적인 생활을 무시하고 그로 인해서 오는 고난을 자기가 아니고 전부는 남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다고 외치는 겁니다. 미신과 이방종교적인 요소들이 잔뜩 들어있고, 자기 제어도 못하는 자기 체면 내세우는 그 성질 참말로 더럽습니다.
이런 것이 다 무엇으로 고침을 받았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 예수 그리스도로 고침을 받는 겁니다. 고침을 받고 또 더러운 귀신들린 자처럼 살겠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의 온전으로 천국복음이 잘되도록 그 하나님의 일에 그 주님의 일에 수종들고 많은 사람에게 구원이 되는 그 일에 덕을 세우는 것이지요.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서도 자기 위주로만 믿고 살고 있다면 이는 또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 자기에게는 고통이 엄습합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또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빛을 받고’ 하는 그 말씀이 있어요. 그러면서 이제 타락하면 회개케 안 된다. 불가능이다. 이제 고통만이 계속 연속되지요. 살고 있으면서. 그거 우리 입장에서 잘 알아야 됩니다. 예언 방언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옳은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아서 자기의 신앙양심에 ‘아, 이거다’ 하는 건 보혜사 성령님의 그 깨달음이 들어간 겁니다. 말하자면 성령님의 역사가 들어갔다 그 말이요.
그 옳음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미련해서 몰라서 또는 자기의 육중심이 너무 강해서 그 면에 대한 신앙 면에 무시하고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회개할 길은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하자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예수님보다도 더 높은 것을 만나야 되는데 이제는 없다 그 말이요. 예수님 이상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깨달았느냐? 신앙양심 속에서 받아졌느냐? 거기에서 타락되면 너는 이제 회개 불능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다 그 말이요. 우리 입장에서는 아주 심각하게 이걸 생각을 해야 돼요.
뭐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번 교회 다니면서 열심이 충성봉사 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흔히들 볼 수 있는데 열심히 충성봉사 하다가 무슨 일로 인해서 교회 다니다가 말하자면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 말이지. 정신적인 피해, 물질적인 피해. 그러니까 이제 교회 가기가 싫고 교인들이 다 싫어지고, 그래서 교회 안 나가는 사람도 있지요? 이거는 이제 그걸로 그 사람의 일생은 끝날는지도 몰라요. 그게 들어있다.
우리 입장에서 말씀가지고 자기가 분별을 잘하란 말이요. 몰라서 하나님의 손에 빠지지 말고. 재앙의 손에 빠지지 말고.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알았느냐? 자기 자체화 시키면서 자꾸 실력적으로 나가야지 딴 짓거리 하지 마라.
19절: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무리가 예수님께 접촉을 하려고 했습니다. 왜냐? 예수님의 그 능력이,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은 ‘병 나아라’ 그 말에 어떤 힘 뭐 이런 걸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을 하는 데요 예수님의 능력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그게 바로 구원이요, 구원이 바로 당신의 이름이요, 이름은 당신이 그 일을 한다 그 말이요. 그 일을 하는 분이시라. 그냥 우리 사람이름 ‘누구 누구’ 그렇게 생각을 하지 말고 바로 당신이 구원이요, 당신이 구원의 일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예수라 그 말이요.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는 게바라 하리라’ 그런 거 있잖아요? 천주교에서 이름 주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질이 달라요. 질이.
예수님의 능력이 모든 사람을 낫게 하니까 서로 접촉을 하려고 해요. 병 낫고자 하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접촉을 해라. 성질을 고치려고 하느냐? 그 분과 접촉을 해라. 그런데 그거는 안 하고 자꾸 예수님께서 이적 기사 행하는 그걸 자꾸 갖고 오려고 그런단 말이요. 그걸 자꾸 갖고 가서 자기도 예수처럼 하려고 한다. 이게 참 오늘날 교회 정말 속이 보인다 그 말이요.
예수님의 능력을 훔쳐가겠어요? 돈 주고 사갈 수 있나요? 자기도 그 예수능력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주신 것도 아니고 그 능력이 탐이 나서 예수님의 능력을 묻혀와 가지고 모든 사람을 낫게 해주려고. 그러니까 자기 입장에서 병자들을 보니까 불쌍하다 그 말이요. ‘아, 요거 고쳐줘야 되겠다.’ 그럼 고쳐주려니 능력이 있어야지. 고쳐주려니 능력을 받아야지. 어떻게? 기도로. 성경에 보면 ‘기도 외에는 없느니라’ 그랬습니까? 무슨 기도?
그럼 기도의 내용 있습니까? 내용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럼 내용적인 그 기도가 뭐냐 그 말이요. 기도의 내용이 뭐냐 그 말이요? 그냥 ‘능력 달라. 나도 그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그게 기도냐 그 말이요. 그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의도성의 기도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모든 사람을 낫게 해주려고 하는 이 발상부터가 바로 박힌 정신이냐 그 말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남의 눈의 티를 빼려면 자기 눈이 밝아야지. 이치가 그런 건데 자기는 소경이 돼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려고 하니 그 말이나 될 법해요?
여기서 무리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아니고 여러 가지 소원 목적을 가진 혼합된 사상들입니다. 혼합된 사상으로 많이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건 무리라 그 말이요. 무리라. 예수님의 성품 속성 예수님의 인격이 탐이 나서 예수님과 접촉하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병 낫게 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욕심이 나고 탐이 나서 예수님께 접촉하려는 것. 사기꾼이 왜 자기에게 접촉을 하지요? 말하자면? 자기 재산 다 털어가려고 접촉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을 고치는데 어떤 식이냐?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케. 그러니까 거기는 신령성의 의미가 들어있는 거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처럼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소원 목적성이 들어있는 고침들이지요. 이 사람이 온전케 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것은 안 보이고 무리들은 그냥 병 낫는 것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무리 속에 속하는 자기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면, 정립되지 못하고 혼합된 그 정신을 가진 자는 이게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라. 그 자기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능력이 있다고 본다면 그 다음에 부르는 것은 돈이다. 왜? 고쳐줬으니까 돈을 받아야지. 안 그래요? 고침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감사해서 내는 것과 ‘내가 고쳐줄 테니 돈 얼마 내라’ 하는 것과 이거는 달라요. 다르잖아요? 참 그 예, 엉터리 의원들도 참 많아요. 특히 교회 안에는 더. ‘헌금을 하나님께 얼마 바쳐라. 내가 낫도록 해 주마’ 뭐 이런 거. 정말 그거는 사람이면서 하나님 행세하려고 그래요. 근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걸 믿는단 말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기꾼이 있는 모양이요.
사기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는 증거요. 마귀가 속여먹을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증거가 되는 거지요. 우리 개인적으로 보면 ‘마귀가 늘 속여먹으려고 있다’ 그런 말도 되는 말이지요? 거짓 종들이 예수님의 능력이 아닌 능력 즉, 신유은사. 이적이 나타난다고 떠들고 있는 그 속에는 돈이 들어온다는 그 욕심이 있는 겁니다. 예, 앞으로 목회할 분들, 가령 교인들이 헌금 하나도 안 가지고 와도 자기가 목회를 할 건지 그것도 생각을 해야 돼요. 안 그래요? 목회자 중심은 그게 들어있어야지.
거짓된 능력을 주장하고 부르짖는 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케 되는 참 예수님이 능력은 없습니다. 그럼 뭐냐? 심리전을 쓴다 그 말이요. 심리전을 써서 사람을 속이겠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근원에서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더라.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들어가지를 못해요. 구원으로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 말이요.
20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예수께서 눈을 들어’: 아니, 그러면 딴 때, 제자들 볼 때는 눈을 안 들고 땅을 보고 있었나? ‘눈을 들어’ 하는 이건 우리가 성경 보면 자연스런 말인데 왜 눈을 들었다고 그러냐? 눈을 밑으로 땅을 쳐다봤다가 그런 건가? 가령 ‘제자들을 볼 때에 눈을 땅으로 향하시고’ 이러면 어떤 해석이 될까? ‘제자들을 볼 때 눈을 들어.’ 아니, 제자들을 그냥 보면 될 거 아니요? 이게 눈높이 아니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가? 그럼 눈만 드나? 머리도 들고 다 들겠지.
뭐 키는 거의 같을 거란 말이요. 그러면 ‘땅을 보고 계시다가 제자들을 보시고’ 그러면 될 걸 왜 ‘눈을 들어’ 그 말이요. 왜 눈을 손으로 이렇게 드는 것처럼. 예, 성경에 이거 가만 보면 거기에 계시적인 뜻이 다 들어있다 그 말이요. 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라고 했을까? 날마다 보는 제자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랬나? 하늘의 높고 높은 신령천국의 일을 볼 수 있는 그 영의 눈을 가지라고 하는 뜻인가? 제자들을 보고?
무리들이 자기 주격적 입장에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예수님과 교제하면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로 오는 줄 아는 모양이요. 이게 오늘날 기독교 참 낭패라. 이거. 기독교는 내가 그 분의 뜻에 맞추면 그 분이 좋아서 주는 거. 이걸 가져야 되겠는데 그 분이 좋아서 주는 게 아니라 어찌든지 예수님께 알랑방귀 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살짝 도둑질해가지고 자기에게로. 이 참 보통 문제가 아니로구나. 예수님은 안 속지요. 사람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은 많은 교육과 시련과 연단을 받도록 한 후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보시고 천국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제자 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더라. 또 한 뜻은 제자들을 향해서 눈을 드시는 것은 무리들이 보는 차원은 땅에 속한 것이니 무리들의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 하늘의 높은 차원의 눈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영의 눈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그러면 이게 어느 나라에 대한 가난인지 그건 해석이 자동적으로 들어가지지요? 그런데 그걸 모르게 되면 이게 어디에 가난한 것을 말하게 될까? 세상물질 면에서 가난이던, 하늘의 뜻에 많이 깨달은 것이 없다는 면에서 가난이던 가난한 거는 부족하고 없단 말이요. 어쨌든 가난 자체는 좋은 것은 아니지요? 맞지요? 예, 가난 자체는 좋은 건 아니에요. 죄는 아닌데 가난 자체는 참 안 좋아. 좌우지간 어느 쪽 가난이든 가난을 알고 있다면 그 가난 면에서 자기가 가지려고 애를 쓸 거다. 맞잖아요? ‘내가 이게 가난한데 이게 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 쪽으로 애를 쓸 거란 말이요.
물질적인 가난은 임시적인 가난이고, 부자가 되었더라도 끝내는 심판의 불에 탑니다. 하늘 신령천국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이 가난은 영원히 간다. 천국에 대한 부자도 영원히 가고 천국에 대한 가난도 영원히 가는 성질이다 그 말이요. 임시적인 것은 가난도 임시 부자도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임시. 예수님은 어느 쪽을 말하고 있느냐? 자기가 어느 쪽 가난을 더 느끼고 힘쓰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달라집니다. 자기가 무엇에 어떤 면에든 가난하면 그것을 자꾸 가지려고 할 테니까. 하늘의 부자가 돼야 되겠다면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자꾸 열심을 품고 욕심을 낼 것이고, 예수 믿어도 ‘우리 집 돈이 없고 가난하구나’ 그러면 그 가난성을 뼈아프게 느낀다면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 하고 그 쪽으로 막 자꾸 간다 그 말이요.
가난하면 그걸 내가 더 가져야 되겠다는 그게 들어가 있는 거지요. 가난한 데도 자기가 거기에 대해 생각고 노력도 안 한다면 뭐요? 이게? 그 사람 완전히 게을러터진 거지. 쉽게 말해서 신앙 면에 가난, 이 면에 대한 열심도 없고 세상물질 면에 가난, 이 면에 노력도 없다면 어쩔 거요?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성경 하나님의 말씀 하늘의 것에, 신령한 말씀의 이치의 깨달음에 부족하거나 깨달음이 없거나 한 그 가난을 알고 자기가 ‘하나님의 것의 깨달음이 나에게 없구나’ 그걸 알고 구하는 사람을 말을 하는 겁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어떤 면에 가난이 나오지요? 이제 여기서? 그리고 뭘 구했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렇게 들어가느냐 그 말이요. 해석은 나와 있잖아요? 이제. 그런데 무리들은 어느 쪽 가난성을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오늘날 교인들 중에 예수 믿는 교인들 중에. 우리교인들은 없겠지요? 이 ‘세상 축복 축복’ 늘 기도로 구하는 자는 어느 쪽 가난성을 자기 가난성으로 알고 있는 겁니까? 세상 쪽이지요? 사람이 자기의 가난성을 알면 그 면에 대한 추구성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난성을 알면 말씀을 구하게 되지요.
교회가 물질축복 중심주의로 돌아가면 이것은 땅의 가난을 말을 하는 거지 천국의 가난성은 아니잖아요? 그 구함이?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겠느냐? 안 된다. 천국 못 들어간다는 그 말이 아니고 들어간들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면이 안 되면 그 뭐 들어가나 마나. 못 다스리는 데야 뭐.
21절: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사람이 배고픔을 느끼게 되면 음식을 자꾸 먹고자 하는 의욕성이 생깁니다. 육신의 배고픔이 그렇듯이 영적 면에서도 마찬가지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깨달음을 원하고 깨달음을 추구하고 깨달음을 사모하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배부름 즉, 만족을 얻게 된다 그 말이요. 배가 부르다는 것은 만족이다 그 말이요. 깨달음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다 그 말이요.
그리고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랬지요? 우는 자가 왜 복이 있어요? 징그럽지? 만날 자고 일어나서 울고 하루 종일 울고 잘 때도 울고. 예, 그 너무 울면 짜증나지요? 어머니들, 어린 아기 너무 울면 짜증나지요? 때려주고 싶고. 아프지도 않는데 징징 짜고, 밥 달라고 그러는 것도 짜면서 밥 달라 그러고. 좋아도 짜고 싫어도 짜고. 사람이 자꾸 짜면 인상이 짜는 얼굴이 돼버려요. 맞아요.
사람마다 이게 다 손발 길이나 눈이라든지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나는 유난히 차이가 나요. 왼눈보다 오른쪽 눈이 조금 더 크지요. 이게 원래 내 눈은 잘 안 보이는 건데. 왜 이렇게 됐냐? 그 뭐 새총이나 이런 걸 갖다가 맞추려면 한 쪽 눈을 감는 거거든. 그리고 자기가 웃는 얼굴도 거울 가만 쳐다보고 씩 웃어 봐요. 유난히 엄청나게 올라가는 사람도 있습니까? 웃을 때 골고루 되면 좋은데 웃기만 웃으면 한 쪽으로 쓱 올라가버려. 왜 그럴까? 왜 그런 거 같아요? 사람 또 쳐다봐도 흘기는 눈으로 보면 사람이 흰자가 많아져요. 맞아요.
자기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라. 옛말도 있잖아요. 마음속은 슬퍼 죽겠는데 마음속은 독이 올라있는데 앞의 사람이 웃기면 얼굴상이 오만상이 이건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어. 울다가 억지로 웃는 것 참 묘해요. 그게. 얼굴이 아마 신경조직도 골치 아플 거야. 그럴 때는.
우는 자가 왜 복이 있느냐? 왜 복이 있다고 그래요? 우는 자가 왜 복이 있어요? 그 왜 우는 자가 복이 있어요? 눈물 닦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나? 왜 그래? 뭐라고 써놨어요?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이랬단 말이요. 그러면 이게 울어도 앞으로 웃을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울어야지 무조건 울기만 하고 떼를 쓰면 이게 웃음이 오느냐? 웃음이 오는 울음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왕 울 바에야 웃음이 오는 울음을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우느냐? 누가 때렸기 때문에 우느냐? 돈 때문에 우느냐? 사랑 때문에 우느냐? 몸이 아파서 우느냐? 마음이 아파서 우느냐? 이방인들이 우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자가 우는 것과는 이건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거다. 달라야 하는 것이고. ‘깨닫지를 못해서 어리석었구나’ 해서 울고, 알지를 못해서 죄지은 것에 대해서 울고, 인생 헛 산 것에 대해서 울고, 나를 인간으로 만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몰라서 알지를 못한 것에 대해서 울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여 울고, 회개를 하느라고 울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울고, 선지사도들의 마음이 알아지니 울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울고.
예, 자기는 어떤 울음을 울어봤어요? 배가 고파서 울어본 거 그거는 있을 수 있고, 돈이 없어서, 누가 자기를 때려서 울고, 배가 아파서 울고, 똥이 안 나와서 울고,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아파서 울고, 병원에 가서 울고, 주사 맞으면서 울고. 전부 시시껄렁한 잡다한 너무 저질 것에 대한 그 면에 많이 울었지요? 고상한 울음을 울어본 사람? 울음이 달라요. 자기 울음이 고상해야, 하나님 앞에 고상해야 미래적으로 웃을 수 있는 울음이다. 값진 울음이다 그 말이요. 왜 쓸데없이 자꾸 울어? 그러니까 얻어맞지. 이제.
그 참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눈에 티가 들어가면 엄마 아버지가 안 죽었는데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 나옵니까? 그 이상하잖아요? 티 작은 거 하나 들어가면 그냥 눈물이 막 떨어지는 거요. 왜 그렇지요? 이게 신앙 면에 뜻이 들어있다. 일반적인 것이지만 신앙 면에 뜻이 들어있다.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참 그 생각은 고상하다. 자기 눈에는 세상 오만 잡다한 티가 다 들어있으면서 눈 아픈 줄 모르고 남의 죄만 크게 보이고. 이거 참.
이제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나에게 대한 구원을 아니까 기쁘고, 출생목적 내가 사는 재세기간의 목적을 아니까 기쁘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으니 기쁘고, 하늘나라의 부요 배부름 기쁨 만족 예, 이제 없어지지 아니할 것에 소원을 두고 사니 기쁘고. 마음이 풍족해지면 사람이 기뻐지는 거요.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런 말씀들을 주시고 있어.
예수 믿는 것이 뭔지? 구할게 뭔지? 왜 울어야 되는지? 안 울어도 될 분 있어요? 여기서? 운다는 게 뭐요? 만날 ‘아이고’ 하고 운다 그 말이요? 운다는 게 왜 울어요? 슬퍼지니까. 하늘의 것이 없음을 자기가 슬픔으로 여기는가? 월급 많이 타면 기쁘지요?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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