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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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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중곤 목사 |
참고 : | 들풀쉼터교회 담임목사 |
성경 : 고전12:12-27
제목 :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찬송 : 43(57), 390(444), 290(412), 540(219)
고전12:12-27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오늘 본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여러 지체가 서로 하나 되어 돌보므로 분쟁이 없고, 함께 고통을 받고 영광을 얻음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충주에 가면 산에는 여러 산새들이 있고 다양한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무도 키가 작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큰 나무도 있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작은 꽃들, 크고 작은 나무, 그 나무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살아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피어오르게 합니다.
자연의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형상이 있고 향기가 있고,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미는 장미대로, 매화는 매화대로, 들꽃은 들꽃대로, 고유의 빛깔과 향기가 있습니다. 다른 꽃과 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 꽃만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 각각의 모양과 향이 어우러져 하나님 지으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답고 풍요로워지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우리는 서로 다른 성도들이 모여 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전 세계 인구가 75억 명 인데 75억 명 중에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두 사람의 여행이 똑같을 수 없는 것같이, 우리의 생각과 역량도 똑같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산에도 수많은 나무가 자랍니다. 그런데 똑같은 모양의 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듯이 세상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끔 붕어빵을 집사람이 사오는데, 붕어빵도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 틀에서 나오는데도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과 직분도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속에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식구조, 즉,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구조에서는 나와 ‘다른 것’은 바로 ‘틀린 것’이 되어 버립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분명 다르지만, 봄과 가을이 옳고 여름과 겨울은 옳지 않다고 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노인세대와 젊은 세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야당과 여당이 서로의‘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 같은 사고를 내도 젊은 사람이 사고를 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노인이 사고를 내면 노인이 사고를 냈다고 여러 말이 많아집니다.
노인도 젊은 세대를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젊은 세대도 머지않아 노인 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젊은 세대를 향해 무어라 할 것입니까? 지금 노인들 세대가 가난을 이기고 이 나라를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였다고 이해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는 노인이 되지 않을 것이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노인이 되었을 때 노인들을 폄훼(貶毁; 남을 깎아내려 헐뜯음)하는 젊은이들에게 무어라 할 것입니까?
지금의 시어머니는 지난날 그렇게 시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던 며느리였을 수 있습니다. 지금 며느리도 어느 날 시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여러분은 어떤 시어머니가 될 것입니까? 여러분이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온 정성을 다한 아들 며느리가 부모를 떠나고, 부양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도 가까이 하지 않을 때,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면 지난시대는 ‘상극의 시대’로, 나와‘다른 것’은 곧‘틀린 것’으로 통하였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싸우고 짓밟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서로가 잘 살 수 있는‘상생의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Win-Win’의 시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다르다’와‘틀리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 보통의 것보다 두드러진 데가 있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형용사‘다르다’를 쓰고,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동사‘틀리다’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비결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가능 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대립된 의미로 쓰이는 고사성어 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도 요13: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1.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의해야 할 것은‘옳은 것을 옳다하고 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할 때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고전16:13-14절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 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말씀 같이 모든 일을 믿음에 굳게 서서,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할 때,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오해나 격한 감정에서 너그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의 생각과 다를 때 강압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은 아닙니다. 집단이든 개인이든 서로의 의견과 생각이 다를 경우 오래 참음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서로에게 유익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와 다른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다툴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다른 생각들이 합쳐지면, 더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획일성은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지만, 시대에 뒤처지거나 발전을 저해(沮害; 막아서 못 하도록 해침)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양성은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지만, 서로 다른 많은 사람의 의견을 포용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을 때, 더 좋을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서로를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고 하였고,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12: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2:21-27절에‘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잘 내버리는 것보다,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할 때, 분쟁이 없고, 더욱 튼튼한 몸과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15:16절에‘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므로 한 지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있는 고린도는‘아덴’(지금의 그리스 수도 아테네) 서쪽 64㎞ 지점에 위치한 아가야 주(州)의 수도이며 항구 도시로 해상 교통과 무역 중심지였고, 동시에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들이 총집결한 현란한 우상 도시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바울사도가 처음 복음을 전한 것은 제2차 선교여행 때(행15:40-18:22; A.D.49-52년경)였습니다. 드로아와 빌립보를 지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사도는 로마에서 온 본도 출신의 유대인 천막 제조업자인 아굴라와 아내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으며(행18:2-3)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마게도냐로부터 온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고,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고 비방하므로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18:6) 말함으로 이방인 선교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행18:8)으로 복음 사역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으며,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3차 선교여행(행18:23-21:16; A.D.53-58년경)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접하고 고린도전서(55-56년경)을 보냈으며, 그 후 마게도냐(빌립보)에서 다시 고린도 교회에 고린도후서(56년 말경)을 보내 권면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귀환 길에 헬라(고린도)에 들러 3개월을 체류하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20:2-3).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로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지만, 가장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교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문제 많고 말썽 많은 현대 교회에 좋은 답안을 제시하는 모델이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요 설립자인 바울사도가 떠난 뒤 고린도 교회에는‘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하는(고전1:12) 파벌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고린도의 우상 숭배는 앞에서 말한 대로 유명하여, 애굽 사람들이 세운 이시스(Isis)와 세라피스(Serapis) 신전, 에베소를 대표하는 아데미(Artemis) 신전, 수로보니게(Syria-Phoenicia) 사람이 세운 아스다롯(Astarte) 신전, 브루기아 사람들이 세운 마그나 마터(Magna Mater) 신전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고린도를 대표하는 신전으로는 고린도 광장 남쪽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 언덕에 우뚝 솟은‘아프로디테’(Aphrodite, 사랑의 여신) 신전이라고 합니다. 고린도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보는 해발 575m 높이의 바위산(아크로고린도)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신전에는 당시 무려 1,000여 명의 여사제(女司祭, sacred prostitute)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온갖 음행과 우상 숭배가 일상생활처럼 만연하다보니 고린도 교인 중에도 음행하는 사람들(고전5:1)이 있어 교회에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는 성도 간에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행6:1-10절에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오늘 서로 다투는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하였는데 오늘 교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14:10절에‘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의 모습이 다르듯이,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생각이 다르고 부모와 자식의 생각이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목사와 성도님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정치적으로는 야당과 여당의 생각이 다르고 노사 문제에서도 노사정(勞使政)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누가 틀리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생각이 다르고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 진리인지 잘못된 거짓인지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따를 때, 우리는 죄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행4: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하였고, 살후2:13-14절에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죄에서 구원함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몸의 지체 간에 서로 다투거나 싸움하지 않는 것처럼, 여러 성도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고 화목할 것과 성도들의 받은 은사가 각기 다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나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잘라 내 버리려고 하지 말고 그럴수록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똑같이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과 그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나와 다름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와 똑 같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면 정말 걱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와 다른 사람을 허락하시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주님 안에서 화목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롬12:10-11절에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고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와 함께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온‘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 선교사님의 기도 시로 알려진 ‘기도 시’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살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지체를 이루게 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생활을 적당하게 자기 편한 대로 하지 말고 철저하게 신앙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영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하고 불안하고 걱정되고 염려되고 두렵고 그래서 낙심하고 술 취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함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위함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아무리 매섭고 추운 겨울도 눈 녹듯 녹아지듯이, 작은 사랑이 얼어붙은 우리의 마음을 녹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랑과 믿음으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잠자는 영혼을 깨워,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 행복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인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므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오직 주님만 바라고, 영광된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 받은 자녀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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