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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cafe.daum.net/peter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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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능력 부족
국내 대부분
종교인구가 감소세에 접어들고 있다.
이런 징조는 이미 5년 전부터
구체화 되었다.
‘2015년 인구주택 총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
56%로 나오면서 무종교인이 인구절반을
드디어 넘어 섰다.
그 때 종교별로 반응은
엇갈렸지만
‘종교 인구 감소’는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발표 후
5년을 보낸 지금에 와서는
모든 종교마다
더 절박한 위기감을 호소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 직격탄은
물론 고민의 포인트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종교계가
먼저 철저히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개신교는 놀랍게도
10년 전에 비해 123만 명이 증가했지만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모든 종교 인구가 감소하는데
물론 소폭이지만
왜 개신교는 증가추세에 있을까하고
의아해 한다.
하지만 실제 교회는
사람들이 분명히 줄어들고 있다.
작은 교회들이 무너지고,
큰 교회들도 전체 평균 내보면
매년 10% 정도 감소가 이어지는 것은
거짓뉴스가 아니다.
통계상 개신교 증가는
어디까지나
신천지 같은 이단이나 아니면
가나안 성도의 증가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일은
이번 조사처럼 무종교인 숫자가
종교인 숫자를 넘어선 것에 대해 우리는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상황들은 분명
종교적 욕구를 더욱 증대시키고 있음에도
종교인구 감소의 현실은
제도적 종교들의
문제라고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한국교회하면
떠오르는 단골 이슈들이 있다.
이원론, 샤머니즘, 개 교회주의, 대형화교회,
성직자 윤리 그리고
로마 카톨릭교회 복귀화 등이다.
여기에
자성의 목소리를 더한다면
교회의 비상식적 처사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한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이런 요인에 대해 어느 교수는
신학교 운영과정에서
학생 과대 배출과 교육의 부실을 먼저
꼽았다.
또 다른 관점은
87년 민주화 이후 복지사업의
정부보조금 획득과
배분으로 인한 신경전은
본연의 역할보다 이런 사업에 더 마음에
담아 두는 동안 그들은 멀어졌다.
종교권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질수록
여러 사안에서 갈등을 겪으며
대사회 신뢰도와 함께
종교 인구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작년 9월 ‘한복협’주최로
20대, 30대, 40대 청년들이 한 명씩 나와
한국교회에 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먼저 20대가
바라본 한국교회 문제점은
현재와 호흡하지 못한다는 것과
여성적 시각에 취약하다는
두 가지였다.
다음 30대 대표는
교회는 세대 간 갈등을 인정하고,
젊은이들을
판단하거나 책망하기 전에
주님처럼 이해가 먼저 요구되고
그 후에 가서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40대 친구는
교회가 사회 변화에 대해
방어에만 급급했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역동성을 잃은 채 경직되고
교회가 구조화된 점을 제시했다.
자신은 그래서
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만 교회의 대답을 먼저 듣고 싶고,
그런 다음에 함께 일하고
동역할 기회를
젊은이들에게 교회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적어도 젊은 세대들이 본
개신교는
불확실한 시대에
이웃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다는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국 사회는 전쟁 이후
인구변화만큼
엄청난 변화를 겪었는데,
교회는 중세시대 교회의 전철을 밝느라
뒷걸음 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지도자들은 종교인구 감소의 요인으로
다원주의 사회를 꼽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거나
상대화시킨 상황에서
절대자 대신
자기 자신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은 악하므로
그런 세상과 분리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
이게 가능한가.
믿는 자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어찌
무관하게 산단 말인가.
오히려
세상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강자를 대변하고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울어야 한다.
교회는
악한 세상에 대해 분석은
잘 할지 몰라도,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감 능력을 잃으며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다.
누군가가 그랬다.
코로나19에 대해 섭리, 심판, 애국 등,,.
이딴 거 운운하지 말고
우리를 돌아보며 골방에 들어가
울며 회개하자고...
교회가 교인들과의 나눔이 아니라
오늘 현실 속에
이웃과 함께 호흡해야만
그들과 함께 공감해야만
교회는
내일이 있을 수 있다.
분석하거나
분리하는 일은 매우 쉽다.
누구라도
함께 공감한다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문제를 알고
끌어안는다는
미션을 실천한다는 의미이기에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평안해야 정상이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부에게는 사랑,
믿는 자에게는 믿음,
병사에게는 평화라고 했는데,
이 세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 가정이다.
하지만 가정 안에도
수많은 불효화음은 얼마든지 있듯이,
교회도
부조리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가정처럼 얼마든지 흔들릴
가능성은 무수하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리 이웃들을 도와야 하고
도울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있다.
교회는 말씀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 안에
새 지혜와 재생 능력이 있다.
이러한 내부적인 요인과 함께
종교인구 감소란
풍요로운 삶과 무관할 수 없다.
영국은
18C, 19C에 전 세계 선교를 담당했다.
우리나라 초창기 선교사들도
대부분 영국교회
영향을 받고 변방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랬던 영국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인력이 현장에 배치되면서
일꾼이 부족했고,
많은 돈을 번 후부터
레저에 관심을 갖자 교회는 자리가
더욱 비어가기 시작했다.
와중에 흑사병이 확산되면서
목회자들도 많이 죽자
그 빈자리를 교회 집사들이 대신하면서
교회는 더욱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돈과 레저에 정신 팔려
예배가 약화되고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말씀이 무너지면서,
영국은 무슬림이 국교와 비슷한 교세로
성장하면서
온갖 이질적 문화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에서
서서히 해가지는 나라로 바뀌었다.
한국교회도 어떤 면에서는
영국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음에 두려울 뿐이다.
하용조 목사가
생전에 교인들에게 말했다.
‘돈 많이 버세요.’
‘성공하세요.’
‘명예를 얻으세요.’
‘그런 후에 뭐 할 건데요?’
아무리 바보라도
어찌
돈과 성공
그리고 각자의 욕망이
인생 목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절대적인 것을 외면하고
상대적인 것만 추구할 때
인생은
태초 모습처럼
혼돈, 공허, 흑암을 벗어 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보았다면,
이제라도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지킨다면
이런 재앙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
2020년 3월 20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작가:하누리님, 우기자님, 이요셉님
경포호수http://cafe.daum.net/peter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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