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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일]
(마가복음 10:17-31)
1. 사랑스러운 일
주님이 사랑스럽게 보신 사람이 있다.
재산이 많은 한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스럽게 보신 이유는,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한 갈망을 갖고 있었고
영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막 10:17-19, 새번역)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영생을 갈망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영생에 대한 갈망도 없고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에 관심도 없는 것이
악하고 나쁜 것이다.
제자도의 첫걸음이 영생에 대한 갈망과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주님이 그를 사랑스럽게 보셨기에
그에게 부족한 것을 말씀해주셨다.
(막 10:21, 새번역)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에게 부족한 것은 재물을 버리는 일이었다.
재물을 버려야, 재물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데,
그 길이 영생을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안타깝게도 재산을 버리지 못했다.
가진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고 제자의 길을 가는 문제는
사랑스러운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영생을 갈망하기만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지키기만 해서도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두 가지가 바람직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영생이라는 열매, 제자가 되는 열매를 얻으려면
그 다음 단계가 꼭 있어야 한다.
재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재물의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면
그는 영생을 얻지도, 제자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재물은 '맘몬'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돈은 돈일 뿐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돈은 '맘몬'이라는 신이다.
그래서 재물을 버린다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것이다.
돈은 신이기 때문에 신의 힘으로 사람을 붙든다.
그래서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위해 살아가고 돈을 결코 놓지 못하고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 것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울고 웃는 사람이 되어야 참 신자의 삶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주님 말씀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정도다.
부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돈에 대한 집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쉬울 것이다.
3. 제자들
참으로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제자들은 신이 났다.
(막 10:28, 새번역)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였다.
다른 제자들도 주님의 부르신 앞에서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신이 났을 것이다.
제자들이 운이 좋았다는 것은
그들은 대부분 부자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래서 재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쓸데 없는 자부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셔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인정해주시면서
지금 세상에서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말씀하셨다.
(막 10:29-30, 새번역)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30]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앞에서 부자가 물었던 '영생'을 받는 비결을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다.
제자들은 영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 적어서 버리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 버리기가 어려운 사람보다
제자도에서는 복이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버리고 나누고 주님을 따르는 길 외에
영생의 길은 없다.
그런데 사실 부자든 아니든
재물을 나누고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제자의 길에서는 언제나 이런 반전이 일어난다.
(막 10:31, 새번역)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4. 현대 기독교인들의 병폐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심각한 병폐가 많다.
첫 번째 병폐는 교회는 다니는데 영생에 대한 갈망은 없다는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교회는 다니게 되었고
심지어 수십년을 다녀서 안수집사, 권사, 장로가 되긴 했으나
영생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많다.
예수 믿고 복 받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고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두 번째 병폐는 율법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사람을 자유케 한다고 생각해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려고만 한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를 가고 싶으면 가고
작은 일만 있어도 예배에 빠지는 것을 예사로 한다.
주일을 지킨다는 개념이 없어졌고
술과 담배에서도 마음껏 자유롭다.
헌금 (연보)와 구제에 있어서도 개념이 없다.
선택은 자유지만 참된 신앙의 과정에서
기본적인 틀 안에 거하고
기본적인 것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인 틀마저 거부하고서 신앙이 제대로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일을 지키고 성경을 배우고
술, 담배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 버리려 하고
최선을 다해서 헌금하는 등의 행위는
신앙과 상관이 없지 않고
제자도와도 상관이 없지 않다.
이런 노력들은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런 노력이 전혀 없다면
그의 신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 두 가지를 극복한 다음 단계를 걸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사실이다.
교인들 뿐 아니라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도
재물을 버리는 것을 하지 못해서
온갖 탐욕을 다 드러내는 경우가 다반사인 시대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저지른 재정비리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목사가 그러고 있으니 교인들은 말해 무엇할까?
사회에서 돈의 문제로 큰 물의를 빚은 사람 중에
장로와 안수집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교회에 십일조만 하면
세상에서 어떤 짓을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도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돈 때문에 다른 모든 가치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병폐다.
그런데 그 병폐에서 벗어나는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5. 나는?
어릴 때 고신측 교회에서 자랐다.
주일을 목숨 걸고 지키는 교단이었다.
심지어 주일에 돈을 쓰는 것조차 죄악시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고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명절에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서
친척들에게 욕을 먹는 경우도 많았다.
십일조는 십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잘 준비해서 주일에 헌금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신앙이 그러했음에 대해
나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 '행위'들이 나의 신앙을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신앙이 무너졌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서
신앙이 지켜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예배를 기다리는 갈망이 없고서
영생을 갈망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내 마음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이었다.
학원 강사로 치열하게 일주일을 살아가는데
주일 예배를 통해 듣는 말씀이
내 마음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죽을 듯 고통스러웠다.
자연스럽게 나는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피해서
들을 만한 설교, 들어서 은혜가 되는 설교를 하는
올바른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았다.
아무리 오래 다닌 교회라도
그 부분에서 만족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떠났다.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듣지 못하는 설교에서조차
말씀의 깊은 맛을 누리지 못한다면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나는
어디에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주일에 설교자가
성경 한 구절 읽고 나서
자기 생각만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을 혐오한다.
그런 사람은 목사 될 자격이 없다.
그 사람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마구 짓밟고 죽이고 있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갈증과 영생에 대한 갈증은
연결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그 갈증이 없이도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
아무 불편이 없고,
그 갈증이 없이도 버젓이 목사가 되는 이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고 화가 난다.
그 갈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율법적인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고서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말까인데
그 갈증조차 없다면 그건 신앙의 길을
제대로 시작조차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그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나는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가장 중요한 믿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말씀에 삶을 걸려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말씀에 삶을 거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에
나의 목회의 전부를 걸고 있다.
영생에 대한 갈망을 가져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망으로 이어지고
그 갈망 때문에 신앙의 외적인 것들을
자연스럽게 지켜나가고,
그 과정을 통해 돈의 문제까지 넘어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와 성도들이 세워져 가길 소원한다.
그렇게 올바른 신앙의 단계를 밟아가기 위해
말씀은 가장 중요한 도구다.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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