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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어려울 때 해결 방법이 있을까?](마가복음 14:32-42)
기도는 쉬울까 어려울까?
기도가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도가 쉬워질 방법은 있는 것일까?
1. 기도는 어렵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엄청난 기도를 하셨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도였다.
(막 14:35-36, 새번역) [35] 그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했다.
(막 14:37-38, 새번역) [37]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38]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제자들도 분명 기도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기도하지 못했다.
마음은 기도를 원했지만 육신이 약했던 것이다.
사실 '한 시간' 동안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라는 주님의 안타까운 책망은 사실
모든 신자를 향한 안타까운 책망이 아닐까 싶다.
기도는 참으로 어렵다.
2. 기도가 어렵지 않으신 주님
그런데 주님은 기도가 어려우셨을까?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왜 주님께는 기도가 어렵지 않았을까?
첫째, 기도의 의미
주님께 기도가 어렵지 않았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기도의 의미와 관계가 있다.
기도는 주술적인 행동이 아니다.
연약한 사람이 신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행위만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 주술적인 어떤 행동으로서,
아니면 종교적인 의무로서 기도하지 않으셨고,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대화로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기도가 어렵지 않으셨다.
둘째,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시되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십자가 지시기 전 날의 이 겟세마네 기도는
주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던
그 기도의 날들 중 하루였다.
기도를 거룩한 습관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주님께는 기도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간절함과 갈급함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세 번이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간절함과 갈급함 때문이었다.
(막 14:34, 새번역)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 된
그 간절하고 갈급한 마음이 주님께 있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걸어가고 싶은 갈망이 있은데,
맞이해야 할 일은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감당하기 버거운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하셨기 때문에,
이 기도는 어렵고 쉽고를 말할 수가 없는 기도였다.
마음의 간절함과 갈급함이 있으면
몇 시간 기도하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고 기도하게 된다.
3. 해결책
그렇다면 기도가 어려운 사람에게 해결책이 있을까?
기도가 너무 어려운 사람은
어떻게 해야 기도가 쉬워질까?
기도가 어려운 사람에게 해결책으로
매일 한 시간씩 또는 두 시간씩
의무적으로 기도하도록 만들면 될까?
심지어는 목사는 하루에 5시간 기도하고
장로와 안수집사는 3시간씩 기도하고
집사는 1시간씩 기도해야 한다고
거의 강요하다 시피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도록 만들면
기도가 쉬워지는 것일까?
그 전에 그 기도는 올바른 기도일까?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을 지 모르지만
그건 올바른 기도일 리가 없다.
기도는 의무나 책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의무로 한다면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일 뿐이다.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동안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계속 그런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기도하게 된다면,
또는 성도들에게 그런 기도를 강요하다시피 한다면
그건 기도에 대해서 매우 나쁜 일이다.
기도하지 않는, 아니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냐 말씀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셨다.
(막 14:41, 새번역) 예수께서 세 번째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기도를 강요하는 것은 기도가 어려울 때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전혀 될 수가 없다.
기도 즉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하라고 가르칠 필요가 당연히 있다.
그러나 기도를 계속 강요하듯 하는 것은
기도가 어려운 사람에게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왜 해결책이 되지 못할까?
그렇게 억지로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면
분명히 기도는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가 되고
기도를 몇 시간 하느냐가
자신과 타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
즉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어떤 신앙의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교만한 사람이 된다면 그는 틀린 것이다.
기도의 강요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님과의 사귐, 주님과의 교제,
주님과의 대화를 왜 해야 하는지,
얼마나 그 대화가 좋은지를 가르치고
계속해서 동기를 부여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방법은 없다.
"이제 자고 쉬어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적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4. 나는?
신대원 다닐 때 모대형교회에 출석하는
신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 목이 쉬어 있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느라 그렇게 된 것인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수업시간의 대부분을 졸았다.
아니 거의 대놓고 자는 수준이었다.
기도하느라 신학생으로서 꼭 해야 하는
신학공부는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짐작이 되는 대로
신학적인 소양이 턱없이 낮은 상태로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개척했음에도
그들과 대화하면 2~3분이 채 되기 전에
거의 대부분 '우리 담임 목사님이....' 라는 표현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 담임 목사'는
자신들이 다녔던 대형교회의 목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목사 우상화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교회론의 핵심이 회중주의인 침례교 목사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럼 나는 기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라고 생각한다.
대화는 주고 받는 것이다.
맗씀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과정이 '듣는' 것이요,
그 들은 내용에 대해서 나의 생각과 결단을 말하는 것이
기도가 된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는 것이
가장 참된 기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말씀을 묵상해야 할 이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주는 유익을
성경에 근거해서 설교할 때가 많다.
매주일의 내가 하는 설교가
말씀묵상 세미나의 효과가 조금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의빛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 말씀을 묵상하고 계실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계시지만,
매일 하시는 분, 일주일에 두 세번 하시는 분,
묵상을 해서 묵상글을 올리시는 분,
묵상은 하지만 올리지는 않으시는 분 등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말씀묵상에 대해서
전혀 강요하거나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그저 묵상의 중요성, 묵상의 유익 등을
계속해서 설교하고 가르칠 뿐이다.
그런데 그 설교들이 강요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강요나 억압으로 비춰질까 조심스러워서다.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묵상을 통한 기도의
중요성과 유익에 대해서 설교하고
말씀묵상 세미나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할 일을 충분히 하는 것으로 믿는다.
더 이상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설교하지 않을 때는
나도 한 사람의 성도로서
다른 성도들과 교제를 누려야 한다.
나도 교제를 통해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교제의 시간에도 '목사'로서
가르치는 짓을 나는 하기 싫고
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면 성도들의 신앙이 자랄 수 있을까?
목사는 더 강하게 성도들을 밀어부쳐서
성도들이 신앙에 열심을 내게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앙은 순수하게 자발적이어야 한다.
말씀묵상이 신자의 삶과 신앙에
가장 유익하다고 나는 믿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할
타당한 명분은 결코 될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내가 나의 삶 전체를 통해서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과 대화하고,
습관을 따라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원하는 마음으로
매일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내가 그저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유익을
나누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과정을 통해서
말씀에 삶을 거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말씀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길
소원하는 마음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기만 소원하는데
여기 저기에서 말씀의 사람들이
한 분씩 세워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들이다.
윤용 목사 (말씀의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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