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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십자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다. 하나님 앞에는 죽은 이가 없다. 육신을 가진 이와 육신을 벗어난 이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앞에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고 모세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다. 그런데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
죽을병 걸린 사람이 다급한 나머지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 하겠습니다.” 한다. 그러나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쉽게 잊고 만다.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때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쭉정이로 남아 있다가 추수 때가 되어 밑동이 잘릴 위기에 처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추수를 늦춘다고 쭉정이가 알곡 되지는 않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일 때 살려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인생도 모르는 필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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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꽃을 보았다. 만져 보았다. 생화가 아닌 조화다. 실망한다. 생화가 아닌 조화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예쁜 꽃에 대한 감정이 반으로 줄어든다. 꽃의 소중함도 반으로 줄어든다. 언제든지 싱싱한 것 같은 조화는 그 영속성 때문에 그 아름다움도 가치가 적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시들기 때문이다.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곧 늙기 때문이다. 인생이 소중한 것은 죽을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영원히 윤회하자는 것이 아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불교다. 생로병사가 거듭되는 윤회라는 것은 한없는 고통이니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불자들은 해탈에는 관심 없고 윤회에서 위로를 받는다. 자신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에 위로를 느끼는 것이다.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충격 받은 길가메시는 온갖 어려움을 겪은 후에 삶과 죽음의 비밀을 깨달았다. 길가메시는 말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생명은 자신들이 가졌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길가메시의 결론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한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있다.
“신들은 영생을 차지하고 인간에게는 죽음을 주었다면, 신들은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시들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닌 것처럼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신은 살았다기 보다는 죽은 존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신을 모독했는가? 신은 지혜로운데, 그리고 선한데, 마땅히 지혜로워야 하고 마땅히 선해야 하는데 그런 신이 자신은 좋은 것을 차지하고 인간에게는 나쁜 것을 주었을 리는 없다. 그러면 이래야 할 것이다.
“신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영원한 저주인 영생은 자신들이 가졌다.”
육체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이다. 그러면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도 절망이기는 마찬가지다. 영혼불멸은 좋은 것이 아니다. 영원한 형벌이다.
촛대를 만들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초에 불을 붙이면 미련 없이 타버릴 십자가, 십자가와 함께 소멸될 것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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