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모욕을 견디는 힘](마가복음 15:16-32)
1. 모욕과 자존감
사람에게 가장 강한 힘이 있다면
자존심 또는 자존감일 것이다.
그래서 자존감을 망가뜨리는 모욕을 겪고서도
평점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떻게하면 모욕조차 견딜 수 있을까?
사실 모욕이란 모욕하는 사람이 나쁘다는 증거일 뿐인데
그 말과 행동을 무시하면 그 뿐일 텐데,
왜 그 모욕을 무시하고 못 들은 척하지 못하는 것일까?
십자가 지시는 주님으로부터
모욕을 견디며 자존감을 지킬
비결을 배울 수 있을까?
2. 모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모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많고도 집요한 모욕이다.
(막 15:17-18, 새번역) [17]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18]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하였다. [19]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막 15:29-30, 새번역)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막 15:31-32 a, 새번역)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2] 이스라엘의 왕 ④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막 15:32 b , 새번역)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
군인들이 주님을 모욕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욕했고
종교지도자들이 모욕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조차도 주님을 욕했다.
이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조롱을 집요하게 받으면
자존감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함께 욕을 하든지
능력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내려가서
모욕하는 그들 모두를 처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주님의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다.
3. 주님의 반응
주님은 모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오늘 본문 전체에서
주님의 반응은 딱 한 번만 언급되고 있다.
(막 15:23,. 새번역)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님께 드렸다.
일종의 마취제였다.
주님은 고통을 완화하는 그것을 거부하셨다.
십자가 고통을 적게 받지 않고
고스란히 다 받으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보이는 행동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장면에서도
주님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다.
주님은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수동적으로 당할 뿐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욕을
있는 그대로 당하기만 하고
어떤 적극적인 반응도 없으신 주님의 모습이
모욕에 대한 가장 올바른 대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사람은 자존감 또는 자존심이 있어서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모욕을 듣고 기분이 상하거나 자괴감이 들거나
화가 나서 함께 욕을 하거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주님처럼 반응하는 것이 옳다 인정한다 해도
주님처럼 반응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안타까움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처럼 반응할 수 있을까?
주님이 화내거나 함께 욕을 하거나
십자가에서 내려가 그들을 심판하는
그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이 다른 곳에 있어서였다.
주님은 십자가 지시는 그 순간에
오직 한 가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만 있었다.
아마 주님은 그 모든 고통의 순간에
아버지께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온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기에
주님은 사람들의 모욕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었고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모욕에 대한 주님의 무반응의 비결은
주님이 시선이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의 그 무엇보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4.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해
나는 너무 민감했었다.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표정 하나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특히 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까,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나를 비웃지 않을까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사실 너무 피곤했다.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롭고 싶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만든 그 시선에서
나는 결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스스로에게 놀란다.
사람들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나 태도에
예전보다 훨씬 관심을 적게 가지게 된 자신을 본다.
이런 변화가 스스로도 좀 놀랍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한 것 같다.
예전에 나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말들,
나에 대해서 누군가 한 말을 전해 들은 것 등을
반복하고 곱씹으며 묵상했다.
묵상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 시선과 말들이 묵상이 되었다.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그 말들이 맴돌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를 향한 남들의 시선과 말들을
그렇게 열심히 묵상했으니
어찌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런데 변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젠가 생각해보니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고 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말씀 묵상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부터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해서
그다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시선과 말에,
특히 나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과 말에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무시할 힘이 나에겐 여전히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시선과 말을 생각하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이 나를 해석하는 그 시선과 말에
나의 온 관심이 집중된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이
나의 내면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함을 본다.
말씀의 능력이 이 영역에서도
나를 살린 것이다.
3년쯤 전에 교인들이 거의 모두 교회를 떠날 때
두 세 분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변질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 그 말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그다지 상하지 않는 자신이 놀라웠다.
마음이 상하지 않으니 편안하게
그분들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나의 입장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설명을 드려도
그분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안달하지 않는 내가
스스로 놀라웠다.
왜 그랬을까?
나를 규정하는 참된 시선은
그분들의 시선이 아니라
그 다음날 아침에 말씀 앞으로 나아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하시는 그 말씀임을
알고 경험하고 누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
완벽하게 담담하게 살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 어떤 말을 듣고 그 어떤 시선을 받더라도
그 말과 시선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더라도
다음날 아침 말씀을 펼쳐 들고 묵상하면
말씀이 나를 새롭게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그 말씀으로 마음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하고 나니
이제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도
조금만 지나도 그럭저럭 괜찮아진다.
그들의 말이나 시선과 달리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때다.
온갖 소리들이 들려오는데
예배당에 성도들이 모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부활절을 보내야 한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시간들을
목사들도 성도들도 보내고 있는데,
목사로서 나는 이런 때에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그저 말씀을 매일 묵상한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주님과 교제한다.
나를 향한 주님의 따뜻한 시선을 누린다.
그렇게 누린 주님에 대해서
주일에 온라인 예배를 통해 나눈다.
그것이 목사로서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척박할수록,
상황이 답답할수록,
무언가 할 수 없는 곤고함이 있는 때일수록
성도들은 더욱 말씀의 은혜를 깊에 누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언가 새롭게 일을 만들어서
열심을 내야 할 때가 아니라
그저 목사도 성도들도 모두가
말씀의 은혜를 더 깊이 누려가는 것만이
이 어려운 때를 견디는 가장 지혜로운 대처라고 믿는다.
이런 나를 향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모르겠다.
사실 관심이 별로 없다.
나는 그저 나와 성도들이
말씀의 은혜를 더 깊이 누려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말씀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 관심이 나를 살리고 성도들을 살릴 것을 믿으며
그저 주의 긍휼을 구하며 걸어갈 뿐이다.
윤용 목사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