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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에스겔 37:1-14)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시고
"인자야,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미 다 말라버린 뼈들이 과연 살아날 수 있는 것일까?
1. 살아날 수 없다
이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이스라엘은 이방의 포로로 잡혀갔고
누가 봐도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은지 오래 되어서 뼈가 다 마른 시체가 된 것이
이스라엘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렇게 말했다.
(겔 37:11, 새번역)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뼈들이 바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뼈가 말랐고,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우리는 망했다' 한다.
백성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뼈가 말랐고 희망도 사라진 것이
자신들의 상황와 형편이었으니,
망한 것이 맞고 살아날 수 없는 것이 맞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들의 상태를 보니
당연히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
망한 상태였다.
제국의 점령을 당하고 제국의 포로가 되어버린 그들이
포로에서 돌이켜 다시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른 뼈의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다.
2. 살아난다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에스겔은 "주님께서는 아십니다."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은 "살아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겔 37:4, 새번역)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라. 너는 그것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살아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살아나느냐 아니냐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저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저 뼈들에게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라고
대언하라고 말씀하셨다.
마른 뼈들이 살아날지 살아나지 못할 지를 논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
그러면 마른 뼈들이 소리를 내며 이어지고
뼈들 위에 힘줄이 뻗치고 살이 오르고 살갗이 덮인다.
그리고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난다.
이 환상대로 이스라엘은 마른 뼈 같았던 포로생활에서 회복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살아나는 것은 미래적인 현실이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듣지 못하느냐에 있다.
회복의 능력은 정치적이거나 환경적인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3. 나는?
'나의 뼈가 말랐고 나의 희망도 사라졌으니
나는 망했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젊은 날에 호기롭게 세상으로 달려가 열심히 살았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았다.
소위 허황되게 보이는 엄청난 꿈과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세상의 삶은, 그리고 나의 죄성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뼈가 마른 듯한 상태가 되었고
희망이 사라졌고 망한 듯 느껴졌다.
삶에 소망이 없어졌고 이대로 끝나는
비참하고 무의미한 삶이겠다 싶었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그 비참함을 자세하게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 처절함 속에서도 먹고 살아야 했고
가족을 건사해야 했기에
죽을 듯한 마음과 메마른 영혼의 상태로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었다.
건사할 가족이 있음이 메마른 나의 생명을
그나마 지켜주고 있었다.
그 비참한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느끼면서
메마르고 건조한 삶의 팍팍함 속에서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겨나기 시작했다.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말씀을 붙든 것은 기적같은 선택이었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환경과 여건도 되지 않았기에
그저 매일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학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큐티책을 펼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그 한 가지를 했다.
다만, 그 묵상에 내 삶을 다 담았다.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놀랍게도 그것 한 가지만 계속 했을 뿐인데
마른 뼈 같았던 나의 마음과 영혼에
무언가 촉촉히 젖어드는 것이 어느날 느껴졌다.
그리고 뼈가 연결되고 힘줄이 뼏쳐서
마음에 조금씩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희망도, 소망도 사라진 삶이었는데
이전과 다르게 이상한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아나겠다는 희망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제법 오래 보내었을 때
그 희망이 나를 이끌어 소극적이고 소심한 내가
평생 살았던 부산의 삶을 접고
신학 공부를 위해 경기도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했다.
나의 힘이 전혀 아니었다.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오래 되면서
말씀의 능력이 내 속에 꿈틀대었고
그 능력이 주는 도전을 따라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나고나서 생각하니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생존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생명을 유지하는 법,
생명을 더 풍성하게 유지해서
현실의 팍팍함을 넘어서는 말씀이라는 통로를 놓치지 않았기에
그 모든 고통의 순간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냥 마른 뼈 같은 삶에서만 벗어나고 싶어서
매일 말씀을 묵상했을 뿐인데
나는 지금 그 때와 비교해서
너무나 놀라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고
그 생명을 나누기까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내 삶에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해서도
분명 나는 걱정스러워야 할 것 같다.
아무런 생존의 근거가 없고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믿어진다.
오직 말씀 하나만 붙들고 살아가면,
그래서 메말라서 부서질 것 같은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물기 촉촉한 내면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내 삶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말씀 하나만 생명처럼 붙들었는데
삶이 망한다면?
노후의 삶이 비참해진다면?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그것도 고민할 것이 전혀 없다.
나는 원래 망했던 사람이다.
망했던 사람이 놀랍게 회복되어
꿈도 꾸지 못했던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복된 삶만으로도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이 삶만으로도
나로서는 너무 과분한 삶이다.
그러니 나중에 삶이 어려워진다 해도
그저 감사할 것뿐이다.
그 어려운 삶에서도 그저 말씀 하나 붙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삶의 환경이 좀 어렵다 해도
삶이 좀 팍팍해도 괜찮을 것 같다.
망할 것 같았고 망했다고 생각했을 그 때를 생각한다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말씀의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도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살린다.
말씀이 없으면 내 삶은 여전히
엄청난 무의미와 무가치와 절망에 사로잡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을 나의 삶이다.
말씀이 있어서 마른 뼈같은 내면이 살아나고
힘줄이 뻗치고 살이 붙고 생기가 들어온다.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는 감사한 아침이다.
말씀과 함께 이 생명의 아침을 매일 맞이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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