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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회복될 공동체의 특징]
(에스겔45:18-46:24)
1. 잦은 예배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는 첫째 달 초하루에는 언제나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하여라. (겔45:18)
"또 너는 매일 주에게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를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너는 아침마다 그것을 바쳐야 한다. (겔46:13)
새롭게 회복된 성전과 공동체의 환상인데,
첫째 달 초하루의 제사로 시작해서
유월절, 초막절, 매월 첫째 날의 제사 등
수많은 제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의 번제에 대해서도 말한다.
새롭게 회복된 공동체의 특징 중 하나는
예배를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이 모든 제사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 것일까?
신앙의 모든 문제를 구원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건
신앙의 수준의 유치함을 보여줄 뿐이다.
이 모든 예배를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그리고 신실하게 살기로 작정한다.
이렇게 잦은 예배는 수고롭거나 귀찮은 것이 아니라
신자의 정체성과 소명을 환기시키는
생명과 은혜의 통로다.
예배라는 형식적인 행위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신자에게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2. 왕의 한계
회복된 공동체는 왕의 역할에 있어서 한계가 분명하다.
왕은 바깥 마당에서 이 문의 현관으로 들어와서, 문설주 곁에 서 있어야 한다. 제사장들이 그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는 동안에는, 그가 그 대문의 문지방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 문은 저녁때까지 닫지 말아야 한다. (겔46:2)
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왕도 예배에 있어서는 지켜야 할 행동지침이 있고
그 의무를 피할 수 없다.
회복이란 사람의 한계가 분명해지고
사람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고개 숙이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겸손히 예배자가 되는 왕은
권리는 없고 의무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왕의 권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신다.
그러나 만일 왕이 어떤 신하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희년까지만 그 신하의 소유가 되고, 희년이 지나면 왕에게로 되돌아 간다. 왕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의 것으로서, 오직 그들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 (겔46:17)/왕은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왕은 자신의 재산만을 떼어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 백성 가운데서는 아무도, 자신의 재산을 잃고 멀리 흩어져 다니는 일이 없게 하여라." (겔46:18)/
왕의 권리는 자신의 땅을 부여받고
그 땅을 신하에게 선물해도
희년이 되면 왕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리는 또한 의무를 당시에 부여한다.
백성의 땅을 빼앗을 수 없다는 의무다.
하나님이 왕에게 충분한 땅을 주시기 때문에
그 땅의 한계에 만족하고 살아감으로
탐욕에 망가지지 않고
참된 자유를 누려갈 수 있게 된다.
왕에게 무한 권리를 주지 않지만,
왕이 누릴 기본적 권리는 철저히 보호하신다.
그게 회복의 모습이다.
3. 새롭게 회복되는 공동체의 특징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회복이 아니다.
회복이란 사람이 참되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되게 예배하는 예배자에게
하나님이 충분한 권리를 주시되,
권리의 한계 또한 분명히 해주셔서
탐욕의 무한질주에 갇히지 않도록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 되는 것이 회복이다.
회복은 4차원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하나님과의 회복, 자신과의 회복, 이웃과의 회복, 자연과의 회복이다.
이 연쇄적 회복의 시작이자 근본이
예배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다.
예배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깊이 교제하는 개인과 공동체에게는
4차원의 회복이 차례대로 일어날 것인데,
그게 새롭게 회복되는 공동체의 특징이 될 것이다.
4. 나는?
회복을 누리고 싶은 갈망이 너무 컸다.
죄와 탐욕과 욕망에 무너지는 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 깊이 좌절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나는 사실 절망만 무수히 본복했을 뿐이었다.
도무지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악하고 패역한 나의 모습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싫고 또 싫었다.
왜 이렇게 성실하게 매일 말씀을 묵상하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단순하다.
"살고 싶어서."
무수히 넘어지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이대로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삶이 끝나버릴까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살고 싶어서,
이렇게 절망스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것에 매달렸다.
살기 위해 말씀을 붙들었을 뿐인데
서서히 내면에 기쁨과 눈물이 동시에 채워져갔다.
죽어가던 영혼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것도 느꼈다.
그건 예배의 회복이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의 마음은 조금씩 진실해졌고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터득해갔다.
살 것 같았다.
말씀 하나에 삶을 걸 뿐인데
나에게 주시는 회복의 범위가
조금씩 넓어져 가는 것을 경험한다.
욕심을 버리고 목사로서의 기본적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권리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의 권리는
목사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서였다.
목사로서 나는 스스로 리더라 생각하기보다
그저 말씀에 삶을 거는 본질적 회복의 삶을
앞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 본질적 회복의 삶을 함께 누려가도록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도전을 주되
강요하지 않고 겸손히 권하는 것이
목사가 해야할 일일 것이다.
그저 그것에만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제법 큰 아픔도 겪었다.
교인들이 결코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고
말씀에 관심조차 갖지 않더니
결국 교회를 떠난 아픔이었다.
절망스러웠으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었고
떠난 교인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에겐 그게 기적이었다.
말씀 안에 거하며 원망을 넘어서는 그 기적을 경험하자
나는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그저 이렇게만 계속 걸어가면 될 것으로 믿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성도들을 한분 한분 만나서
지금의 말씀의빛교회가 되었다.
내가 꿈꾸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목사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려 계속 힘쓰고,
성도는 그런 목사를 존중해주는 관계다.
그런데 앞서 성도들이 떠난 경험을 통해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눈물 나도록 감사한 경험을 많이 누려왔다.
내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배려를
성도들이 나를 향해 해주셨고,
이런 배려와 사랑을 누린다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해 주시는 위로와 격려로 느껴져
감사와 감격으로 울컥할 때가 많았다.
나는 나의 권리를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의 권리를 누리도록 하시되
권리의 한계도 분명히 선을 그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
나는 그저 하나님의 도우심에만 의지하려 한다.
앞으로도 나는 그저 말씀 하나에 삶을 걸어
하나님과의 참되고 진실한 교제만
더 깊이 누려가길 소원한다.
그리고 성도들도 이 깊은 회복을 함께 누려가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훈련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려 한다.
이 복된 회복을 누려가는 동안,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고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또한 나의 삶을 걸어보려 한다.
주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길,
성도들도 긍휼히 여기시길,
그래서 예배의 참된 회복으로부터 시작해서
4차원의 회복을 깊이 누려가는
나와 성도들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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